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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모필장 곽종찬 씨 "서예는 붓이 먼저…필력은 붓에서 나오는 것"

▲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 모필장 곽종찬씨가 자신이 만든 붓을 보여주며 설명하고 있다. 안봉주 기자

지난해 가을, 귀한 전시를 만났다. 전주의 전통공예 부문 기능 보유자 열 일곱 명 명장이 빚어낸 공예품들이 한자리에 모인 전시였다. 침선과 소목, 단청 유기 지우산 나전 낙죽 악기 유기와 모필, 옻칠에 부채와 한지발까지 명장의 손길로 만들어진 전통 공예품들은 아름다웠다.

 

그중에서도 새롭게 눈에 띈 작품, ‘사동고리’라 이름 붙여진 액자 속에 크고 작은 붓들이 줄지어 있었다.

 

마치 자연스럽게 얻어진 얼룩처럼 선명하지 않은 무늬를 몸체에 얹은 이 붓들의 정체(?)가 궁금했다. 붓 하나에 여러 개의 붓이 들어가, 붓 한 자루만으로 다양한 글씨를 쓸 수 있게 제작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이전에도 세필 중필 대필이 하나로 된 ‘삼동필’이 있었다. 선비들이 휴대용으로 지니고 다녔던 ‘삼동필’은 전통 붓의 백미로 꼽혔지만 제작자의 수가 워낙 적어 오늘에 이르러서는 좀체 마주하기 어려운 유물이 되었다.

 

그러나 이미 40여 년 전에 전통붓 ‘삼동필’의 형식을 다시 살려 현대적 미감으로 온전히 복원해낸 모필장이 있다. 2015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된 곽종찬 명장(66, 전주시 중노송동) 이다.

 

사실 서예의 전통이 뿌리 깊은 전북에서 모필장의 역사와 존재는 빛나야 옳다.

 

그러나 붓을 만드는 사람과 그 기술을 이르는 ‘모필장’은 안타깝게도 전통문화의 영역에서 오랫동안 부각되지 못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록의 방식이 바뀌어 붓의 쓰임이 소멸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터다. 사실 쓰임의 기능을 잃은 전통 공예품이 전통붓 뿐이겠는가. 옛사람들의 일상에서 숨 쉬었던 수많은 공예품들은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되는 상품들에 그 자리를 내주고 쓰임의 영역에서 도태된 지 오래다.

 

재작년 전북에서는 유일하게 모필장 기능보유자가 된 남파 곽종찬 명장을 만났다.

 

모바일 기기와 컴퓨터 자판이 기록의 수단이 되어버린 현실에서도 전통붓의 존재를 꼭 되살려내고 싶다는 그의 의지가 궁금했다.

 

-붓을 판매하고 직접 만드는 공간인데도 가게 안이 깨끗합니다.

 

“일을 제대로 할 때는 몇날 며칠 치우지 못하니 지저분하죠. 깨끗하다는 것은 그만큼 작업 시간이 적다는, 이를테면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웃음)”

 

-2월이 가장 바쁘시다는데 이 시간에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대나무를 구하러 다니신다고 하셨죠. 지금이 대나무 채집시기인가요.

 

“조금 늦었어요. 설 쇠고 나면 바로 시작해야 좋은데……. 설 지나고 보름 사이가 적기지요. 어제 가보니 벌써 물이 많이 올랐더라고요.”

 

-어디로 다녀오셨습니까.

 

“김제에 있는 대나무 숲인데, 오후에 가서 베어놓고 밤에 실어 날랐어요. 옮기는 일만 자정 넘어 끝났습니다.”

 

-대나무 채집은 미리 예정해놓으십니까.

 

“오랫동안 하다 보니 어디에 좋은 대나무가 있는지 대충은 알죠. 그런데 갈수록 쓸 만한 대나무 밭을 찾기 어려워져요. 가봐야만 쓸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요. 한 군데를 두세 번 걸음하게 되죠.”

 

-대나무 베어오는 일도 직접 하십니까.

 

“물론이죠. 모든 과정을 내 스스로 알아야 제대로 된 붓을 만들 수 있어요. 대나무를 자를 때 그 특성도 알게 되거든요. 대나무를 베어 옮기는 일은 만만치 않아요. 대나무는 깍지에 명치털 같은 가시가 있는데 아주 사나워서 일하고 며칠만 지나면 손등이 새까맣게 됩니다. 긁힌 자리에 딱지가 앉아서죠. 우리같이 붓 일하는 사람들은 연례행사처럼 겪는 일이에요.”

 

-쌓아놓은 대나무 양이 엄청난데요. 저 정도면 1년 작업할 수 있는 양인가요.

 

“어림도 없어요. 저 대나무는 아주 좋은 것들이지만 다듬어 붓의 몸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또 한계가 있어요. 더 구해야죠.”

 

-꼭 이시기에 다 해놓아야 하는 이유가 있나요.

 

“대나무 재료는 반드시 겨울에 다 준비를 해야 해요. 대나무는 물이 내렸을 때 베어야 합니다. 물이 오르면 마르면서 병충해가 들어 못 쓰게 되거든요.”

 

-뭐 한 가지 순조로운 과정이 없군요.

 

“공력이 대단하죠. 사서 쓰는 사람은 비싸네 싸네 하지만 준비하는 과정만도 아주 복잡합니다. 잘라놓은 대나무를 햇빛에 말려 깍지를 지그재그로 돌리면서 벗겨냅니다. 그런 다음 황토와 모래를 섞어 문지르죠. 황토는 대나무의 진액을 빨아냅니다. 그것이 보름쯤 지나면 뿌옇게 마르기 시작하는데 20일 정도 지난 후에 개울에 가서 씻어 말립니다. 대나무 한대에 10개 정도의 도막이 나오는데 골라내면 두 마디쯤 쓰게 됩니다.”

 

-모든 붓이 그런 공정을 거치나요.

 

“그렇지는 않아요. 제가 쓰는 대나무는 흙을 바르니 깨끗해지거든요. 그런데 과수에 하루 정도 담가 말리면 더 하얀 색을 얻을 수 있습니다. 색은 좋은데 그렇게 하면 대가 삭게 돼요. 그래서 저는 좀 힘들더라도 대나무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자연스러운 방식을 사용합니다.”

 

-털 작업도 시간이 많이 걸리지요.

 

“150번 정도 손길이 가는 일이죠. 하루 종일 붙잡고 있어도 안 끝나는 경우가 많아요. 맘에 들지 않으면 마무리할 수가 없으니까요. 제 마음에 맞게 한 번에 모양이 나오는 일은 거의 없어요. 그것이 다 세상의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털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겠습니다.

 

“물론이죠. 저는 다행히 아버지 덕분에 털 고르는 일도 배웠어요. 아버지는 동물 가죽을 통째로 구해서 털을 잘라 사용하셨거든요. 암놈 수놈 부위별로 질감이나 길이, 색깔까지 골라낼 수 있게 되었지요.”

 

-붓도 쓰임에 따라 종류가 다양할 텐데 공통적으로 좋은 붓은 어떻게 고릅니까.

 

“붓은 털이 가장 중요합니다. 우선 붓털의 끝이 뾰족하고 가지런해야 합니다. 털의 모둠은 원형을 이루어야 하고 획을 긋고 난 다음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합니다. 짐승의 모든 털은 붓의 재료가 될 수 있는데, 겨울에 잡은 짐승의 털이 윤기가 있어요.”

 

-붓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대표작품이 ‘사동고리’라고 알고 있는데 그 형식이 흥미롭더군요.

 

“붓 한자루에 작은 붓들을 차례로 넣어 만드는 것인데, 동그랗게 깎아내기 때문에 ‘동고리’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붓이 네 개 들어가면 ‘사동고리’, 다섯 개 들어가면 ‘오동고리’가 되겠죠. 지난번 서울 문화재청 전시 때 여섯 개까지 들어가는 붓을 만들었어요. 속을 파내는 일만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데 그런 새로운 일을 도전하면 일이 재미있어지더라고요.”

 

-대나무 자루 위에 무늬를 넣는 것도 독특합니다.

 

“일종의 낙죽기법인데 만들어지는 물방울처럼 보이는 무늬는 저만이 낼 수 있어요. 비법이 따로 있는데 아직 아무한테도 전수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광주에서 붓을 만드는 부부가 와서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더군요. 아직 넘겨줄 일이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돌아가실 때 가르쳐주고 가세요” 하더라고요. 빨리 죽으라는 이야기로 들리던데…….(웃음)”

 

-넘기지 않으시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

 

“저 무늬가 있는 것이어야 곽종찬 붓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제 이름으로 내는 모든 붓은 저 무늬를 넣습니다. 그러니 아직은 그 무늬를 함부로 내놓을 수 없어요.”

 

-사동고리는 언제부터 만드셨습니까.

 

“군대 가기 직전이에요. 그냥 재미삼아 만들어서 전주에서 유명한 필방에 몇 자루 내놓았는데 금세 팔린 거예요. 몇 개 더 만들어달라고 사정을 했는데 그 다음날 군대에 가야 했어요. 1972년이었을 겁니다.”

 

-아무래도 붓을 찾는 사람들이 적어졌을 텐데요.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어려움은 말할 수 없죠. 붓을 쓰는 사람이 아예 없잖아요. 서예 하는 사람들 말고는 붓글씨 쓰는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붓마저도 중국산이 많거든요. 실제로 팔리는 갯수는 한 달에 다섯 손가락 안의 숫자만큼으로 보면 됩니다. 이런 상황이 9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것이니 20년 사이 붓은 우리 생활에서 완전히 잊혔다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도 왜 붓 만드는 일을 놓지 않으셨습니까.

 

“배운 기술이 이것뿐이니까요.(웃음) 사실 70년대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살만했습니다. 70~80년대에는 돈도 많이 벌었어요. 다 까먹어서 그렇지. 아내가 10년 정도 병으로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어요. 젊어서 번 돈을 그때 다 썼죠. 그러고 나니 설상가상 붓이 쓸모없는 용품이 되어버리더라고요. 먹고 살 방법이 없어서 오랫동안 가게는 열어놓고 공사장 일을 다녔어요. 안 해본 일이 거의 없지요. 그래도 저녁에 집에 와서는 붓을 만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있으니 오늘까지 그래도 기능을 지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찾는 사람도 적고 특별히 팔려나가는 수량도 많지 않은데 그렇게 계속 만드시면 다 어떻게 처리하시려고…….

 

“붓 만드는 사람이 안 팔린다고 손을 놓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예전에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더구나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라도 더 열심히 만들어내야죠.”

 

-사실 전북은 서예의 전통이 깊은 지역인데 붓을 만드는 장인들이 잊혀 있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렇죠. 서예는 붓이 먼저입니다. 필력은 붓에서 나오는 것이니까요. 붓의 성질을 알아야 좋은 글씨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서예하는 사람들은 붓이 저절로 써주는 것인 줄 아는 것 같아요. 그러니 좋은 붓을 구하려는 성의도 없고, 값싼 붓만 찾게 되죠. 어느 분야든 기본을 갖추는 것이 먼저인데, 글씨를 공부한다는 사람들이 붓의 성질을 연구하는 일에는 왜 그렇게 무관심한지 참 마뜩치 않아요.”

 

-열세 살부터 지금까지 붓 만드는 일로만 지켜온 삶이 후회되지는 않으십니까.

 

“후회할 일은 없어요. 돌아보면 좋은 시절도 있었고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붓 만드는 일이 내게 주어져서 그래도 큰 허물 없이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그동안 몇 명 함께 일했던 제자들이 있는데 더 이상 생활이 되지 않으니 붓 만드는 일을 지켜가지 못하고 중도에 길을 바꿀 수밖에 없는 현실입니다.”

 

-붓 만드는 기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습니까.

 

“근래 들어서는 거의 없죠. 다행히 재작년에 새로운 제자를 얻었어요. 배우려는 의지가 높아 기능을 이어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게는 큰 힘이지요.”

 

-붓의 쓰임이 없어진 상황에서 전통붓을 살려내는 일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붓이 제 기능을 하기에는 환경이 너무 많이 바뀌었으니까요. 그래도 붓 만드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2000년대 초반, 경제적 어려움이 커졌을 때 이러다 붓 만드는 일도 할 수 없겠다 생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생각났어요. 5·16이 일어난 직후인데, 지펜이 나오면서 붓이 안 팔렸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일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일하게 했어요. 월급도 못 주어서 계속 빚이 쌓였었는데, 정말 거짓말처럼 지펜이 서서히 들어가고 붓이 다시 일어나더라고요.”

 

그는 더 이상 붓의 기능이 현대에 되살아날 수 있다는 기대는 하지 않게 됐다고 했다. 그런데도 붓 만드는 일에 희망을 잃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붓을 보세요. 이렇게 액자 안에 넣어 놓으면 훌륭한 장식품이 되죠. 훌륭한 공예품으로서 쓰임을 겸비하면 좋겠지만 예술성만으로도 전통붓의 존재를 지켜가는 방법은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봅니다. 좀 더 새로운 형식으로 붓을 살려내고 싶어요.”

 

전주 붓의 옛 명성을 다시 찾고 싶다는 그에게 과제가 생겼다. 전통에 현대적 삶의 문화를 입히는 일, 붓의 쓰임을 새롭게 찾아내는 일이다. 머지않아 ‘전주 붓’의 이름이 우리에게 올 것 같다.

 

● [곽종찬 명장은] 아버지로부터 '붓일' 배워…독창적 '사동고리' 만들어내

남파 곽종찬 명장의 고향은 완주다. 아버지가 한때 천안으로 가 살면서 천안에서 태어났지만 완주로 다시 돌아와 줄곧 이곳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붓 만드는 일을 즐겼다. 할아버지 대부터 붓만드는 일을 가업으로 삼아온 덕분에 그의 아버지(곽준팔) 또한 붓으로 이름을 널리 알렸다.

 

당시만 해도 붓은 없어서는 안 되는 생활도구였다. 상관에 터를 잡고 살았던 그의 집은 붓을 만들어 파는 일만으로 부를 쌓아 일대의 땅을 거의 사들일 정도로 부자 소리를 들었다. 어린 시절은 그만큼 유복했으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는 공부와 담을 쌓았다. 4남 1녀 중 유난히 노래 부르기 좋아하고 놀러만 다니는 셋째 아들을 아버지는 아예 소리꾼으로 키우겠다며 남원의 국악학원으로 보냈지만 밤중에 도망쳐 걸어서 상관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좋았다. 집에서 붓일을 거들던 할아버지가 하루는 그에게 붓을 만들어보라고 권했다. 잘 만든다는 칭찬이 좋아 학교에서 오면 아예 붓일하는 일에 매달렸다. 야간 중학교를 거쳐 고등학교에 들어갔지만 며칠 되지 않아 그만두고 아예 붓만드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붓만 잘 만들면 먹고 사는 일은 걱정 없을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가 며칠씩 붓을 팔러 나갔다 들어오시면 물건이 들었던 박스가 돈으로 채워져 왔다.

 

아버지로부터 배운 대로 전통붓을 만들면서도 뭔가 창의적인 붓을 만들고 싶었다. 군대 가기직전 만들어 인기를 끌었던 ‘사동고리’는 그 결실이었다.

 

군대 제대 후에는 ‘내 장사’를 하고 싶어 독립을 했다. 자신이 만든 붓을 갖고 문방구와 필방을 돌면서 몇 자루씩 써보라고 권했다. ‘지금 들여놓지 말고 쓸 만하면 그때 주문해 달라’는 방식을 썼다. 기대 이상으로 주문이 많이 들어왔다. 전주 뿐 아니라 익산 군산 서천까지 건너가 붓을 팔았다. 돈은 두둑한데 물건은 물건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 신기했다. ‘장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구나’고 깨달았다. 장사의 재미를 알아가고 있을 무렵, 한복 짓는 솜씨가 좋은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아내는 그 못지않게 손재주가 좋았다. 나중에는 ‘그보다 부인이 붓을 더 잘 만든다’는 소문이 날 정도였다. 80년대 초반, 건물을 사서 ‘이조필방’을 냈다. 한참 잘나가던 시기, 아내가 병을 얻었다. 10여년 동안 고생하다 세상을 떠났다. 모아 놓았던 재산도 바닥이 났다. 그즈음 붓의 수요가 줄기 시작했다. 당장 생활이 곤궁해지자 막노동이라도 나가야 했다. 철쭉 캐내는 일, 축대 쌓는 일 등 가리지 않고 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면 밤에는 붓일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덕분에 전통 기법과 기능을 온전히 지키면서 ‘사동고리’ 같은 그만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힘을 얻게 됐다.

 

그는 붓만드는 일 뿐 아니라 붓과 관련된 기물 만드는 일을 즐긴다. 대나무 뿌리를 활용한 붓걸이 장식품은 그의 빼어난 손재주를 그대로 담아낸 걸작이다.

 

전주전통공예대전에서 동상과 특별상을 수상하면서 대중들에게 모필장의 존재를 알렸던 그는 2015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됐다. 자신의 기능을 인정해준 자치단체에 답을 하고 싶다는 그는 올해 개인전을 계획하고 있다. ‘전주붓’의 이름을 다시 알리고 싶다는 바람이 거기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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