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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⑦ 전주 탁백이국과 진안 애저찜 - 역사도 '전북의 맛'에 반했다

▲ 대중잡지 『별건곤』 1928년 12월호 표지.

1928년 12월에 발간된 대중잡지 <별건곤(別乾坤)> 에는 경기도 여자부터 시작해 팔도(八道) 여성들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나온다. “전라도의 여자들이 다른 도의 여자보다 요리를 잘한다. 그 중에 전주여자의 요리하는 법은 참으로 칭찬할 만 하다”고 말하며 “음식에 관한 한 서울여자가 갔다가 눈물을 흘리고 호남선 급행열차를 타고 도망질할 것”이라고 재미있게 표현한 문장이 있다. 사실 예로부터 전라북도가 다양한 전통의 맛과 푸짐한 상차림으로 유명할 수 있었던 것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옛말처럼 풍요로운 전라북도 농경문화를 낳은 자연의 축복에서 비롯된 것이다. 호남평야의 기름진 땅과 이를 둘러싼 산 그리고 옥토를 적시며 흐르는 좋은물에서 양질의 쌀과 갖가지 채소가 생산되었고, 서해바다에서 온 다양한 수산물이 음식재료로 더해져 풍요로웠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와 전주의 유명한 음식 목록에 비빔밥이 빠지지 않는 것은 근방에 좋은 쌀과 식재들이 있는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한 비빔밥 못지않게 향토색이 짙은 음식이 바로 콩나물국밥이다. <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 (방신영, 1917)에 ‘콩나물국밥’ 대신 ‘콩나물국’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콩나물국밥은, 전주에서는 탁주를 담는 그릇을 뜻하는 ‘탁백이’ ‘탁백이국’이라고 부르며 우리 조상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콩나물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고려시대부터 나오며, 조선시대에도 이를 나물로 무쳐먹거나 구황식품으로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보이는데, 이를 콩나물국으로 먹었다는 기록이나 구체적인 조리법은 1910년대 이후부터 나타난다. 콩나물국은 사실 재료를 구하기 쉬워 사시사철 맛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 정착된 조리법은 매우 단순해 별로 특별해 보이지 않기도 한다. 그럼에도 유독 전주의 콩나물국밥이 유명했던 것은 주재료인 이곳의 콩나물, 쌀, 물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 별건곤 12월호에는 팔도의 명물을 예찬하는 기사에서 전주의 탁백이국이 특별히 맛있는 것은 좋은 물 덕분이라며 이를 칭찬하고 있다.

▲ 『별건곤』 1928년 12월호.

“서울의 설렁탕이 명물이라면 전주명물은 탁백이국일 것이다. … 다른 채소도 마찬가지지만 콩나물이라는 것은 갖은 양념을 많이 넣은 맛있는 장과 놓아야만 입맛이 나는 법인데 전주콩나물국인 탁백이국만은 그렇지 않다. 단지 재료라는 것은 콩나물과 소금뿐이다. 이것은 분명 전주콩나물 그것이 단 것과 품질이 다른 관계이겠는데, 그렇다고 전주콩나물은 류산암모니아를 주어 기른 것도 아니요, 역시 다른 곳과 똑같이 물로 기를 따름이다. 다 같이 물로 기르는데 맛이 그렇게 다르다면 결국 전주의 물이 좋다고 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후략)”

 

지금의 전주시를 관통하며 흐르는 맑고 풍부한 물은 맛있는 콩나물을 재배하기에 제격이었다. 콩나물국밥 보급의 비결은 물뿐만이 아니기도 했다. 현재 남부시장의 근원이 된 남문 풍남문밖에 형성된 시장의 여건도 영향을 주었다. 시장음식으로 전주의 좋은 물과 콩나물, 싸전다리에서 유통되던 쌀 등을 조리하여 손쉽게 상인들이 먹게 되면서 콩나물국밥이 호황을 누렸다.

▲ 『별건곤』 1929년 12월호 내용 中.

전국에 널리 알려진 콩나물국밥과 다르게 좀 특별한 별미도 있다. 전북 10미(味) 중에서도 특히 호기심을 끄는 진안의 ‘애저찜’이 바로 그것이다. 애저(兒猪·哀猪)를 한자로 풀었을 때, 아이 ‘兒’자가 붙어 혐오감이 들 수 있는 까닭에 슬플 ‘哀’를 붙이기도 하였다. 어미 뱃속에 있지만 바깥세상에 나오지 못하고 죽어 슬프다고도 해석할 수 있고, 어쩔 수 없이 죽은 새끼돼지를 먹는 것이 슬프다고 풀 수도 있다. 옛날 먹을 것이 귀해 일반적인 식재는 물론 농가의 고기가 특히 귀하고 아쉬웠던 당시, 죽은 새끼돼지도 그냥 버릴 수밖에 없어 찜으로 요리했던 데서 생겨난 음식이다. 돼지는 대략 8마리에서 15마리까지 새끼를 낳는데, 한꺼번에 많은 새끼를 낳다보니 새끼가 뱃속에서 죽은 채 태어나기도 했고 어미젖을 먹다가 깔려 죽는 경우도 있었기에 애저찜의 탄생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로 넘어오면서 애저찜의 기원은 조금 변질된다. 조선시대 독점적 상권을 부여받은 상인들은 많은 돈을 벌어들였고 돈 많은 상인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했다. 그러한 부의 과시수단으로 공급이 한정되어 있던 애저찜을 먹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고, 결국 죽은 새끼돼지의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에 이르자 어미돼지를 잡아 태어나기 직전 어미 뱃속에서의 새끼돼지로 애저찜을 요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 진안애저찜.

애저찜에 대한 기록은 콩나물국밥보다 시기가 더 거슬러 올라간다. <규합총서> 나 <증보산림경제> , <조선무쌍 신식요리제법> 등 조선시대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쓰인 문헌에서 “돼지새끼집을 삶아서 갖은 양념과 함께 찐다.”, “새끼돼지의 뱃속에 여러 가지 양념을 채우고, 솥에 물 한 사발을 부은 다음 대나무를 솥에 걸쳐서 새끼돼지를 안친다. 동이에 물을 담아 솥 위에 놓고 천천히 불을 지핀다. 동이의 물이 따뜻해지면 찬 물로 세 번 바꾸어 고기가 충분히 익으면 식기를 기다렸다가 초장에 찍어 먹는다.”와 같은 조리법을 찾을 수 있다. 최초의 기원을 알아본다면 진안군 강정리의 당산제의 제물 목록에 애기돼지가 기록 되어있었던 걸로 그 역사를 추측할 수 있다.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나 오래 전 진안 강정마을 당산제에 올랐다는 돼지새끼를 마을사람들이 도로 파내어 찜 형태로 요리해 먹었을 것이라고 전해진다. 진안 사람들은 이 당산제의 역사를 근거로 애저찜의 본고장을 진안으로 여기고 있다. 이런 사연을 지닌 애저는 양반들도 즐겨 찾았던 음식이며, 조선시대에는 궁중연회의 식단에도 들어 있던 특별식이기도 했다.

 

어머니의 정이 담긴 집밥이나 콩나물국밥 같은 친숙한 음식이거나 혹은 애저찜처럼 생애 몇 번 먹어볼지도 모르는 별미이던 음식은 우리와 떼어놀 수 없는 것이다. 음식은 어떨때는 장소가 연상되기도 하고 누군가와 먹었던 기억으로 인해 때론 위안이 되기도 향수를 느끼게도 한다. 그렇기에 요즘엔 요리와 맛집에 관련된 것들이 대중의 높은 관심사가 되었다. TV프로그램뿐만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맛집투어를 다니며 SNS로 인증하는 것이 유행이다. 그도그럴 것이 맛있는 음식은 생각만해도 즐겁고 찾아가는 여정에 따라 그만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어 더욱 특별해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지역의 특색을 음미할 수 있는 맛있고 든든한 향토음식으로 모두가 행복한 봄날을 이어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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