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넓지도 않은, 기껏해야 2차선밖에 안 되는 도로를 몸집 큰 화물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가고 있었다.
건널목 차단기는 올라가 있었다.
북전주역에서 빠져나온 철길은, 한 가닥은 아스팔트의 강을 가로질러 이제는 흰 꽃잎을 다 떨어내 버린 이팝나무들 사이로 뻗었고, 또 한 가닥은 한일시멘트 공장 방향으로 누웠다.
지난 5월 26일, 취재팀은 전주 팔복동을 다시 찾았다. 그곳에서부터, 전주를 관통하던 옛 전라선 철길의 흔적을 더듬었다.
철길 걷힌 자리엔 자동차가
“이게 원래 철길 자리여.”
텃밭에 바가지로 물을 뿌리고 있던 정운오 씨(76)는 바로 앞을 지나는 4차선 도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북전주역 앞에서 추천까지 그대로 이어지는 신복로다.
옛날 철길의 모습이 어땠는지 묻자, 정 씨는 “풍경이랄 게 뭐 있어…”라면서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예전엔 여기가 (손을 높이 드는 시늉을 하며)이렇게 높았거든. 철길이 그 위로 지나가고. 저쪽 버스 서 있는 데 있잖여? 거기 조금 못 미쳐서 굴다리가 있었어. 동네로 들어가는 길, 굴다리.”
높이 돋운 노반 위에 누운 철길은 마을 사람들에겐 일종의 장벽이었다. 굴다리가 있긴 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는 않았을 터. 정 씨도 종종 철길을 넘어 다니곤 했다고 말했다.
1981년에 전라선 철도가 전주시 외곽으로 옮겨지고, 과거 철길이 차지하던 공간은 도로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신복로 일대는 자동차 공업사가 밀집해 있고 폐차장과 운전면허학원도 찾아볼 수 있는, 자동차와 관련한 ‘종합 패키지’와도 같은 지역이다.
정 씨의 텃밭을 뒤로하고서 반듯한 길을 따라 쭉 걷자 추천이 나타났다.
‘추천’이라고 하면 약간은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전주천과 삼천이 하가지구 즈음에서 만나 한 몸이 되는데, 그때부터는 추천이 된다. 인근에 추천대라는 누각이 있고, 추천대교가 가로지른다.
봄철이면 하안이 벚꽃으로 물드는데, 그런 벚꽃길이 그대로 쭉 만경강 둑방길로 이어져 춘포, 목천포 어드메까지 장관을 이룬다.
옛 철길은 신복로 자리로 흘러 내려와서 추천대교 바로 위를 지났다. 아쉽게도, 철교가 있었던 흔적은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그 플랫폼엔 창포 향도 났을까
추천을 건너면 이제는 철도의 자취를 찾아보기가 더욱 어렵게 된다.
권삼득로와 기린대로 사이 어디쯤을 가로지르는 직선인데, 블록마다 도로(라기보단 골목에 가까운 길)가 끊어지는 탓에 ‘어떤 도로가 정확히 일대일로 옛 철길과 대응한다’는 식으로 결론을 짓긴 어렵다.
그래도 역의 흔적은 금방 알아볼 수 있다. 덕진 시외버스 간이터미널(정류장), ‘덕진광장’이 바로 옛 덕진역의 흔적이다.
마침 파란 하늘과 대조되는 빨간 시외버스가 정차 중이었다. 버스는 군산·대야·익산 방향이 대부분인데, 여기서 충남 보령이나 충북 청주, 강원 강릉 등지로 가는 버스도 탈 수 있다.
덕진역은 전라선의 전신이자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의 후신인 경전북부선이 표준궤로 개축된 1929년에 개업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향토역사학자 이용엽 선생의 부친인 故 이상래 선생의 1916년 5월 21일 자 일기에는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가 임시 운행돼 운동장 인근의 덕진역을 통해 이리 출신 관중이 운집해 있었다”고 적혀 있다.
또 1942년 발간, 2009년 국역 출간된 <전주부사> 에는 “경편철도는 전주·이리 양 역 사이 15.56마일의 협궤 증기철도로, 전주평야를 대략 남북으로 종단하며 전주 방면으로부터 덕진·동산·삼례·대장 및 구이리(동이리) 5개 역을 연결했으며 선로의 위치도 지금과 커다란 차이가 없었다”고 기록돼 있어, 이를 보면 이미 경편철도 시절에도 덕진역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전주부사>
지금의 덕진터미널이 그렇듯 당시에도 전북대 통학생들이 주로 이용했지만, 60~70년대엔 또 단오 무렵이면 그야말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창포가 많이 자라는 덕진연못의 물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으면 머릿결이 고와지고 피부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널리 돌던 때였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폐역 전해인 1980년의 덕진역 이용객 수는 88만 1973명이었다. 그해 전라선 역 가운데선 이리, 전주, 순천, 남원, 여수에 이어 여섯 번째다.
마지막 해인 1981년의 통계를 보면 위치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1981년 5월 폐역 직전까지 덕진역 이용객 수는 39만 1341명이었고, 덕진역의 역할을 그대로 이어받아 5월 25일 문을 연 송천역의 연말까지의 이용객 수는 5만 1608명이었다. 기간은 송천역이 두 달여가 긴데도 이용객 수는 8대 1 수준, 덕진역의 완승이다.
그랬던 덕진역이 1981년 폐쇄되고, 이 자리가 1987년 교통광장으로 지정된 뒤 90년대부터는 시외버스가 이곳에 멈춘다. 또 일부는 주차장이 된다. 이후 시민광장 조성 사업을 거쳐 2010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바뀐다.
덕진을 지난 철길은 금암동 전북일보사 뒤쪽 골목을 지나 금암광장으로 향했다. 물론 전북일보사 건물은 1984년에 지어졌으니, 철길과 이 건물이 마주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금암광장 즈음부터는 기린대로를 따라가면 된다. 정확히 그 자리가 철길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건산로’라는 이름의 도로가 그 위를 덮고 있어 낯을 볼 수 없는 모래내(건산천)를, 철도는 다리로 건너 그대로 직진한다. 진북동을 가로질러, 철길은 노송동으로 들어선다.
대로와 광장과 전주역
전주시청 건물은 볼 때마다 새롭다.
풍남문의 모양을 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콘크리트를 아낌없이 쓴 현대 건축물 구조 가운데에 한옥 기와지붕이 얹혀 있다.
좋게 말하면 ‘신-구가 조화를 이루는’ 건물이라 하겠고, 좀 나쁘게 말하면 ‘어색하게 뒤섞인’ 모양이라 하겠다. 그만큼 시민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린다.
일단 전문가들 눈에는 부정적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지난 2013년 동아일보와 월간 Space가 공동으로 건축 전문가 10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전주시청사는 ‘최악의 현대건축’ 19위에 오르는 불명예를 얻었다. 당시 전문가들은 “전통이라는 키워드가 강박관념으로 이어져 빚어진 변종”이라고 혹평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이렇다. 현대 도시로서 쌓아 올린 구조 위에서 제 나름대로 ‘전통’을 해석해 공존하는 길을 걷고 있는, 전주의 그 근·현대사를 몸에 담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전주다, 이렇게 주장할 수도 있지 않은가.
시청사 앞 노송광장은 전주시청사가 들어서기 전부터 광장이었던 곳으로, 큰일이 있을 때 전북도민이 이곳에 모여 목소리를 내곤 했다.
이를테면 1980년 5월 15일 오후 2시, 이 광장에는 1만여 명이 모여 ‘연행 학생 석방’과 ‘계엄령 철폐’ 등을 외쳤다. 광장 한쪽에는 지난 2014년 5·18 구속부상자회 전북지부가 세운 ‘1980 민주화 운동 집결지’라는 글귀가 적힌 비석이 이 장면을 기리며 서 있다.
5·18 민주화운동 역사의 한 페이지에 기록된 이 자리. 1980년 당시만 해도 광장 뒤에 서 있던 건물은 전주시청사가 아니라 전주역이었다.
조선총독부는 1927년 10월 1일, 이리-전주 간 경편철도를 매수해 국철화한다. 이때부터 이 철도의 이름은 ‘경전북부선’이 된다.
762mm 협궤를 그대로 쓰던 경전북부선은 1929년에는 1435mm 표준궤로 개축되고 일부 구간이 이설되는데, 상생정(현 태평동)에 있던 전주역사는 이때 노송정(노송동)으로 옮겨졌다. 새 역사는 주민 요구에 따라 기와지붕을 얹은 한옥으로 지어졌다.
경전북부선은 여기서 남쪽으로 연장된다. 1931년에는 남원, 1933년에는 곡성, 1936년에는 순천까지 이어졌고, 이미 개통돼 있던 순천~여수 구간이 연결되며 드디어 완전체가 된다. ‘전라선’이 된 것도 이때다.
다시 동남쪽으로 발을 뗀다. 지금은 호텔 르윈(옛 리베라 호텔)과 한옥마을 공영주차장 등이 들어서 있는 옛 전주여중·전주여고 옆을 스쳐 지나가, 오목대 구름다리 밑을 지난다. 언덕배기라 그런지, 열차가 이곳에만 오면 속도가 느려져서 달리는 열차에서 그냥 뛰어내리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벽루 옆 터널을 지나, 철길은 전주천을 따라 흘러갔다. ‘숨길’ 또는 ‘전주 한옥마을 둘레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길이다. 그렇게 승암사와 치명자산 성지, 대성동과 색장동을 거쳐 전주를 빠져나간다.
이즈음에서 ‘흔적’은 지난 2011년 복선전철로 새로워진 전라선 철길과 재회한다.
만경강을 건널 때만 해도 주변에 펼쳐져 있던 평야는 보이지 않고, 이제는 산이 좌우에 늘어선다.
권혁일 기자
태평동에 겹친 세월
입구에 들어서자, 널따란 비빔밥 상징원에 금방 살아 숨 쉴 것 같은 소 동상이 취재진을 반겼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 정자에 올라서니 좌우로 굴뚝 모양 조형물이 늘어서 있는 게 눈에 띈다. 일직선으로 놓인 전주역 터 상징물까지, 모두 태평문화공원의 풍경이다.
전주역 터 상징물을 가까이서 살펴보니 몇 미터쯤 되는 철길의 끝자락에는 작동하지 않는 완목신호기와 수동 전철기(선로전환기)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옛 시절을 추억하듯 꿋꿋하게 서 있다. 짤막한 이 레일에는 쓸쓸함마저 감돈다.
<전주부사> 의 통계에 따르면 국철화 직후이자 노송동 이전 직전인 1928년, 전주역의 승차 인원은 18만 9022명, 하차 인원은 20만 6912명이었다. 이때까지는 협궤 철도였기 때문에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전북지역의 교통 운수에 공헌했으며 영업성적 또한 매우 우수해 경영 측면에서도 적잖은 이윤을 올렸다고 한다. 전주부사>
공원의 담 너머에는 바로 고층 아파트단지가 조성돼있다. 어린아이들이 바닥분수에서 솟아오르는 시원한 물줄기를 만지며 재잘거리는 소리가 있었다면 더욱 좋았을 뻔했다.
1921년 7월 조선연초전매령이 공포되고 고사동 일대에 전주전매지국이 문을 열었다. 이후 태평동 이 자리에 연초 공장이 자리잡는다. 연초의 경작, 제조, 판매 등 사무를 관장하던 이곳은 독립 이후 전주지방 전매지국 , 전주지방 전매청, 전매청 전주연초제조창으로 개편된다.
창설 이후 80년이 넘도록 움직이던 연초제조창은 1980년대 후반 이후 기계화 시설이 도입되면서 노동자의 수가 급격하게 줄고, 2002년에는 문을 닫는다. 이후 2008년 이 부지가 택지로 개발되면서 아파트와 문화공원 등이 조성되면서 오늘날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태평문화공원은 그러던 2008년 12월, 안득수 전북대 조경학과 교수가 설계한 공간이다.
공원 설계개념비에 따르면 최초의 전주역과 공북정이라는 정자가 자리했던, 그리고 연초제조창이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로서의 태평동의 역사가 이 공간에 담겨 있다.
여기에 공원 뒤쪽에 들어서 있는 고층 아파트까지, 이 넓지 않은 공간에 전주의 근·현대사가 그렇게 쌓여 있는 셈이다.
김태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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