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1> 만석꾼, 곽동원의 초상화 사진>
지난 6월 초상화 한 점이 2억2000만 원에 낙찰되었다. 채용신(1850~1941)이 그린 작품이다.
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의 장남으로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채용신은 동근(東根)이라는 본명 외에, 석지(石芝)라는 호와 고종에게 하사받은 석강(石江)이라는 호 등 그 이름이 많았던 화가이다. 그는 모든 분야의 그림을 다 잘 그렸지만, 특히 초상화를 잘 그렸다. 태조, 숙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고종의 어진(御眞)을 그려 어진화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채용신의 어진 모사와 화사 내용은 고종 시기 승정원일기에 잘 기록되어있다.
채용신은 뛰어난 화가이자 무과로 등재해 벼슬이 종2품(從二品)에 이른 사람으로 칠곡군수와 정산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채용신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도 지금의 서울 양천구와 강서구 일대를 관리한 현령이었고, 김홍도도 정조의 어진을 잘 그린 포상으로 현풍현감이 되어 관직에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유명 화가가 관직에 종종 올랐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겸재 정선이 진경산수화의 대가로서 당시의 자연풍경을 주로 남겼고, 김홍도가 세시풍속을 주로 남겼다면 채용신은 사람들의 사연이나 초상화를 그림으로 남겨냈다.
특히 채용신은 우리 지역과 인연이 깊은 인물로 벼슬에서 물러나 전주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정읍에서 세상을 떠나 익산에 묻히기 전까지 주변 고을을 다니며 사람들의 모습과 이야기를 담아냈다. 그가 남긴 그림들이 특별한 까닭은, 그림이 전하는 당시의 스토리 속에 지역의 이야기와 애국충절의 마음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김제와 군산 사이 만경강을 배경으로 춘우정의 사연을 그린 ‘김영상투수도(金永相投水圖)’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 <사진2> 김영상 투수도 사진2>
작품을 보면, 산 위에서 내려다보듯 보이는 그림 한가운데에 배 한 척이 떠 있고 배 좌측으로 물에 뛰어들어 몸부림치는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그림의 주인공 김영상이다. 물에 빠진 김영상을 보며 부지런히 손짓하는 순사와 승객, 뱃사공의 당황한 모습은 물론, 화폭의 위와 아래로 민가와 함께 그 무렵 다녔던 기차까지 그려져 역사의 한순간이 실감나게 전해지고 있다.
김영상은 일제강점기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로 호는 춘우정(春雨亭)이다. 1836년 정읍에서 태어나 저명한 유학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으나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활동을 중단하고 학문을 닦는 일에만 정진하였다. 그러던 와중에 조선의 국권을 빼앗아간 일제가 분노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의 이름 있는 유학자 100여 명에게 천황 이름으로 ‘노인 은사금’을 내리자, 김영상은 일왕의 더러운 돈을 받을 수 없다며 일왕 도장이 찍힌 은사금 증서를 찢어 입에 넣어 삼키고, 일본 순사의 팔뚝을 물어뜯었다고 전해진다. 이 일로 김영상은 천황모독죄로 군산감옥으로 압송되고, 군산으로 가던 그가 만경강 신창 나루 근처에서 입고 있던 옷의 의대에 절명사를 남기고 강물에 뛰어들었던 사건이 바로 그림 속 장면이다. 당시 투신 후 괘씸죄가 추가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뒤 옥사한 김영상의 정신과 이를 후세에 알리고자 사명감을 가지고 그려낸 채용신의 뜻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채용신은 명나라 소설 삼국지연의 내용인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도 그렸다. 총 8폭의 그림으로 가로 183㎝, 세로 169㎝의 대작이다. 감상용이 아닌 관우를 모시는 관왕묘에 봉안되었던 종교화다. 관우 신앙은 명나라 때 조선에 온 장수가 전파한 것으로, 왜적을 물리친 것이 관왕의 위령 덕이라 믿었던 것이 유래가 되어 관왕묘에 제사 지내던 것이 일제에 의해 1908년(순조 2년) 폐지되었다. 현재 전북에는 전주와 남원 등에 관왕묘가 남아있고 전북대학교 박물관에는 채용신이 그린 관우 초상이 남아있기도 하다. 아마도 채용신이 삼국지연의도나 관우초상을 그렸던 마음에는 주유가 적은 군사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것이나 관왕에 대한 믿음을 통해 우리도 일본을 물리치기를 기도하는 애국의 마음이 담겼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진이나 관우 초상 외에도 다양한 초상을 그린 채용신의 그림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정면을 응시한 모습이다. 특히나 눈빛을 중심으로 세밀한 의복과 소품 등 표현 속에 그 사람의 품성이 깃들어져 보는 이들에게도 주인공의 마음이 전해지는 듯싶다. 자애롭게 표현된 고종의 눈빛, 영조의 형형한 눈빛과 불에 타 반쯤 남아 용안의 모습을 안타깝게 짐작하게만 하는 태조의 어진에서 풍겨오는 왕의 기품은 글로 다 나열할 수도 없다. 걸작인 황현 초상(黃玹 肖像)은 사진과 더불어 보물 제1494호로 지정될 만큼 높은 가치로 인정받는다. 한말 4대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불리는 매천(梅泉) 황현(1855~1910)은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경술국치를 맞아 나라를 잃게 되자 「절명시」 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한 우국지사로 유명하다.
△ <사진3> 황현 초상 및 사진 사진3>
황현의 초상화는 그가 자결한 다음 해인 1911년 5월에 1909년 김규진이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것이다. 사진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지만 자결한 그의 스토리를 담아 사진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게 표현하였다. 사실적 묘사와 흑백의 사진으로는 알 수 없었던 역사적 느낌이 더해져, 황현의 당당하고 굳은 의지가 생동감 있게 전해져온다.
김영상이나 황현 등 수많은 우국지사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 데에는, 당대의 역사적 사실과 신분 고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의 뜻깊은 정신과 업적을 고스란히 후대에 전해고자 했던 채용신의 사명감이 그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채용신은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유명한 인물의 초상만 그린 것이 아니다. 사대부나 중인, 일반 민중의 그림도 그렸다. 그가 그렸던 인물 중 운낭자(雲娘子)는 관청에 소속된 기생으로서 이름은 최연홍이다. 27세 때인 순조 11년 홍경래의 난 때 군수를 도운 일을 높이 평가하여 조정에서는 기적(妓籍)에서 제외하며 상을 내렸고, 사후 평양 의열사에 제향되었다고 한다. 채영신이 운낭자의 27세 때의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사내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마치 서양화의 인자한 성모자상(聖母子像)을 연상시킬 만큼 신분을 떠나 그 사연을 특별하고 숭고하게 보이게 한다.
△ <사진4> 운낭자상 사진4>
사람의 정신까지 담아 그려낸 그의 섬세한 작품에 감탄을 하고 보니, 채용신의 붓끝과 그의 마음을 따라 우리 고을 미술 기행을 해도 좋을 듯싶다. 채용신은 92세의 일생 중 벼슬에서 물러난 후 35년을 전북도에 거주하며 자기공방을 가지고 초상화를 의뢰받아 많은 작품을 남긴 군수 출신의 전업 화가로 살았다. 사실, 당시 초상화의 주요 쓰임이 제사를 지내기 위해 필요했다니 하니, 아직도 우리 고을 어딘가에는 그가 그린 수많은 초상화 중 몇 점이 가문에 모셔져 아는 듯 모르는 듯 특별한 눈빛을 건네며 있을 것만 같다. 이제, 그 흔적도 찾아 그가 남긴 눈빛들을 만나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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