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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 펴낸 유기상 전 전북도 기획실장 "풍수는 동양 전통사상…하늘·땅·사람이 소통하는 이치"

▲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 펴낸 유기상 전 전북도 기획실장이 고창군 성내면 이재 황윤석 선생의 생가에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안봉주 기자

고령화와 저출산 시대, 인구가 감소하거나 정체되면서 지방 도시들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사실 인구가 늘지 않고 감소하거나 정체된 상황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주목되는 것은 그 정도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30년 안에 적지 않은 지방도시가 아예 사라질 수도 있다는 전문가들의 분석까지 나오고 있으니 지방도시, 특히 작은 도시들이 처한 현실은 절박한 것임에 틀림없다.

 

얼마 전 고령화와 저출산으로 지방 침체의 위기를 우리보다 먼저 겪은 일본 지방 도시의 사례를 다룬 기사를 읽었다. 도시는 도시대로, 농촌은 농촌대로 ‘다움’의 가치를 살려 위기를 극복하고 지역을 살려낸 지혜가 돋보였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었다. 그 성공의 과정과 결실의 뒤에는 반드시 건강한 리더와 활동가들과 지역 주민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오래전 실전으로 체험하고 연구한 경험을 바탕으로 〈일본 발 지방자치 정책실험〉을 펴낸 유기상 박사(61·전 전라북도 기획실장)가 떠올랐다.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던 90년대 초, 전북도청 사무관으로 일했던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가고시마대학원에서 지방자치행정을 전공했다. 그의 학업은 남달랐다. 대부분의 유학생들이 연구에만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가고시마현청의 공무원 서클에 들어가 공부하고 주말에는 일본 농가들의 홈스테이를 경험하면서 문화적 정서를 공유했다. 그 결실은 빛났다. 고령화시대를 대비하는 실버산업이나 지방자치와 지역 경영, 문화산업 육성, 문화거버넌스 구축 등을 주제로 한 논문과 책으로 엮어졌다. 더러는 대학의 관련학과의 부교재가 되거나 더러는 담당공무원들의 교과서가 되었다.

 

37년 공직생활을 끝내고도 여전히 배우고 공부하는 일을 일상으로 삼고 있는 유기상 전 전라북도 기획실장을 만났다. 지난해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 박사과정을 마친 그는 최근 박사논문을 새롭게 구성한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을 책으로 펴냈다.

 

논문의 주제도 의외였지만 ‘지역’과 ‘지역의 자산’을 남다른 시각으로 주목하며 자치단체의 정책으로 그 가치를 살리고 지켜내는데 앞장섰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가 의외였습니다.

 

“제가 문화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하다보니 우리의 문화유산, 전통문화, 역사 쪽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갔어요. 유불선 모든 사상에 공통 코드가 있더군요. 풍수에 담긴 전통사상이었어요. 한국문화를 제대로 알려면 ‘풍수’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하겠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역사에 관심을 갖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전주시에 근무할 때 고전번역원이 문을 열었어요. 제가 담당부서를 맡고 있었죠. 어린 시절 서당을 다녔던 경험이 있었는데 기회가 되니 공부를 다시 하고 싶더군요. 3기 수강생으로 들어갔죠. 3년 과정이었는데 충실히 공부하지는 못했으나 수료는 했습니다. 그때 공부한 것이 박사과정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최근 펴낸 책이 〈조선 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입니다. 책을 보니 호남 실학자들을 주목하셨던데요.

 

“박사논문을 준비할 때 이재 황윤석 선생의 〈이재난고〉에 완전히 빠졌어요. 깊은 학식도 그렇지만 모든 방면에 걸친 풍부한 지식이 정말 놀라웠거든요. 오늘날 우리가 앞세우는 문화콘텐츠가 다 거기 담겨 있었습니다. ‘원소스 멀티유스’라고 하는데 다양성 면에서 보면 일상 생활문화는 물론이고 영화 연극, 심지어 디자인까지도 활용할 수 있는 콘텐츠의 보고라 할 만하죠. 이재난고를 들여다보면서 고창 사람인데도 이렇게 대단한 학자를 모르고 살았다는 부끄러움이 컸습니다. 후학으로서 제대로 조명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출발이었습니다.”

 

-이재의 학식이 그렇게 깊었습니까.

 

“이분은 어문과 역사 예술 천문지리까지 모든 분야를 다 통달하신 분 같아요. 심지어는 어원을 비교하는 책 까지도 있습니다. 오늘날 음운학 하는 사람들까지 이재를 연구하는 정도니까요. 제 생각에는 개인저술로 치자면 아마도 가장 방대한 저술을 한 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중에서도 풍수에 집중하게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워낙 이재의 저술이 방대하고 자료 또한 풍부하니 다양한 분야에서 주목해 수십 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상하게 잡학으로 분류되는 부분은 손을 대지 않았더라고요. 저는 애초 전통문화 분야를 주목했었는데, 그 뿌리를 좇다보니 풍수라는 전통사상에 이르게 된 것이죠.”

 

-실학은 경기도 쪽의 학자들이 주도했던 분야라고 생각이 되는데 호남의 실학은 그동안 왜 조명 받지 못했을까요.

 

“연구 자체가 그만큼 미진했다는 증거겠지요. 사실 호남학파는 용어도 없어요. 각광을 받은 사람들은 근기학파 실학자들인데 들여다보면 호남의 실학자들의 학문적 성과도 그렇게 만만하지 않거든요.”

 

-실학의 비조라 할 수 있는 반계 유형원이 부안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반계수록〉 같은 명저를 남겼는데도 호남의 실학자들에 대한 조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물론이죠. 조선 후기 3대 호남 실학자로 황윤석 신경준 위백규로 꼽는데 연구 작업은 한결같이 미진합니다. 조명을 제대로 안했으니 그분들의 업적도 당연히 평가절하되고 있었던 것이죠.”

 

-지금이라도 호남실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와 조명작업이 절실하겠군요.

 

“아마도 호남 학자들이 제대로 조명이 안 된 이유는 오늘까지도 학문을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기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근기학파가 스타학자들을 여럿 배출해낸 것에 비교하면 호남 학자들은 너무 많은 부분이 묻혀있어요.”

 

-풍수 이야기를 좀 들어보죠. 정통 학자들이 풍수를 사상으로 받아들이고 삶속에 그러한 사상을 실천하고 구현했다는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호남쪽 학자들만의 특성인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풍수는 고려시대부터 천년동안 관학이었습니다. 국가공무원이 연구하고 실행했던 학문이었다는 이야기지요. 풍수를 미신으로 취급해 전통사상의 개념까지 덮어버린 것은 일제강점기예요. 일제의 식민 정책으로 우리의 전통사상까지도 식민화 시켰잖아요. 그 가운데 하나가 풍수예요. 풍수는 조선의 탄탄한 기층문화였거든요.”

 

-정식 학문의 영역이었다는 게 흥미롭습니다.

 

“잡과로 학과에 들어가 있었고. 경국대전에도 고시과목으로 분류되어 있었어요. 기술학 과목으로 음양과가 있었잖아요. 풍수 10개 과목을 봐서 정식으로 채용을 하는데 채용된 사람을 지관이라 했죠. 6품이 책임자였는데, 정인지 같은 사람이 풍수학을 강의했습니다. 풍수가 공식 학문과 공식 관청에서 사라진 것이 일제 강점기인데 해방이 되고도 제자리를 찾지 못했던 것이죠. 이런 상황에서 풍수를 학문의 반열에 올린 분이 최창조 교수고 그 뒤를 잇는 분이 김두규 교수예요.”

 

-그동안 풍수 연구를 하는데 자료도 한계가 있었겠군요.

 

“그런 셈이죠. 풍수 연구의 기본 원전을 〈경국대전〉이나 〈조선왕조실록〉 같은 공식 관찰 사료에 의존해야 했었으니까요. 간혹 있다고 하는 것이 유학자 문집인데, 그 문집에는 풍수 분야가 들어있지 않았을 겁니다. 풍수를 철저하게 일상에서 활용하면서도 잡학으로 치부하고 부끄럽게 여겨 후손들이 없애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이번에 연구하면서 보니 유성용의 형님인 유운용은 풍수 역학의 대가인데 유언으로 반드시 풍수 등을 공부하라고 일렀더군요. 가학으로 효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풍수를 꼭 하라고. 이번에 연구하면서 이재난고의 내용과 비교하면서보니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조선시대 유명한 풍수사 지관 20-30명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알 수 있겠더라고요. 덕분에 조선시대 풍수사의 공백을 거의 복원할 수 있었어요. 그만큼 이재난고가 대단한 저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죠.”

 

-민간 기록이 지닌 가치가 참 큰 것 같아요. 관찰 사료가 갖지 못한 내용까지도 다 담아 놓은 기록들이 많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이재난고가 그 대표적인 자료인데 안타깝게도 아직 한글로 번역되어 있지 않거든요. 이재난고는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초서를 정서로 만드는데 만 열 일곱 권, 10년 걸린 작업입니다. 현재 번역 사업을 진행 중이긴 한데 그 과정이 너무 더뎌 국가차원의 적극적인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지요. 이재난고는 민속 생활사를 비롯해 모든 전통문화 콘텐츠의 보고라 할 만 합니다.”

 

-이제 화제를 좀 돌리겠습니다. 그동안 저술하신 논문이나 책을 보면 지방자치, 지역, 역사문화유산, 지역의 자원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으신데요. 계기가 있었습니까.

 

“개인적으로는 일본 유학이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 유학은 93년부터 2년 6개월 동안 석사과정으로 거쳤는데 그때 우리나라가 지방자치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어서 일본 지방자치정책을 공부했습니다. 당시는 국제교류 업무가 없어 전라북도와 가고시마 국제교류의 창구 역할도 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가고시마현청의 공무원 서클에 들어가 정책 연구 활동도 함께 하고, 주말에는 일본 농가들의 홈스테이를 경험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지역의 가치를 알게 되었죠.”

 

-우리나라와 일본은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많은데 정책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까.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우리 실정에 맞게 적용하거나 활용할 수 있는 점들이 많았어요. 그때 강하게 와 닿았던 일본 정책을 돌아보며 〈일본발 지방자치 정책실험〉이란 책을 냈는데, 당시 고령화 사회를 앞두고 지방자치단체의 과제가 노인복지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노인복지를 분석한 책을 냈지요.”

 

-공직에 계실 때는 문화 분야 정책과 사업에 남다른 관심을 쏟으셨습니다. 성과도 컸고요.

 

“돌아보니 업무의 대부분이 문화 분야에서 이뤄졌더군요. 좋은 체험이었죠. 전주한옥마을 조성, 전주영화제, 전주세계소리축제, 월드컵경기장, 자연하천형 전주천 조성,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우리 지역의 빛나는 문화 자원을 만드는데 참여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고창은 어떻습니까. 역사문화자원이 어느 지역보다 좋은 곳아 인구 감소나 정체 위기에도 자생력과 성장 가능성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고창은 제 고향이어서가 아니라 역사문화자원이나 농업자원이 워낙 탄탄하고 뛰어납니다. 예전부터 이런 자원을 하나로 묶는 10차 산업을 실험하기 가장 좋은 지역이 고창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인구 6만 명에 역사문화자원이 산재해있고, 좋은 농업자원이 있으니 이것을 잘 엮으면 10차 산업의 메카로 만들 수 있다는 확신과 희망이 있습니다.”

 

-풍수로 보자면 고창은 어떤 지역입니까.

 

“최고죠. 결국은 땅의 기운인데, 저는 풍수사상을 하늘 땅 사람이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지의 틀이라고 정리합니다. 천지인 합일사상이지요. 결국 하늘과 땅이 소통하는 기운이 ‘풍’과 ‘수’거든요. 고창은 산과 들 강 바다, 자연 환경이 다 갖춰져 있습니다. 고인돌이 있던 자리만 봐도 정확하게 풍수상 명당이거든요. 그 시대의 조상들은 하늘과 자연과 소통하는 교감 능력이 뛰어났던 것 같아요. 고창은 또 한편으로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땅입니다. 유형유산인 거석문화의 고인돌이 있고, 무형유산으로는 판소리와 농악이 있습니다. 곰소만 갯벌은 람사르 습지 갯벌 중에서도 세계 최고로 종의 다양성이 많습니다. 생물 다양성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건강하고 사람 살기 좋은 땅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실 일이 많은데 너무 고향에 빠져 지내시는 것 같습니다.(웃음)

 

“공직에서 물러나면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을 위해 일하고 싶다는 바람을 오랫동안 가져왔습니다. 일하는 것도 때가 있으니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서두르지 않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고향에 돌아와 둘러보니 할 일이 적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을 성장시켜나갈 사람을 키워내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기회가 된다면 고창을 ‘인양(人養) 고창’으로 만드는 일에 역량을 쏟고 싶습니다.”

 

● [유기상 박사는] 9급으로 공직 시작, 1급으로 은퇴

유기상씨는 1956년 고창군 월산리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3남 2녀를 둔 부모님은 먹고 살기도 빠듯한 어려운 살림에서도 남들보다 더 가르치겠다는 교육열이 높았다. 특히 어머니는 생활력이 강해 나무를 지고 장에 나가 팔기도 하고, 나물 장사도 하면서 자식들의 학업을 도왔다. 큰 굴곡 없이 고창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애초 학비 안드는 육군사관학교를 가고 싶었다. 돈 들지 않고 노력으로 하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으나 번번이 2차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돈부터 벌어야겠다 싶어 서울로 갔다.

 

20대 초반, 그의 삶은 지난했다. 팔리겠다 싶은 물건은 가리지 않고 떼어다 파는 행상부터 술집 웨이터와 ‘기도’까지 가리지 않고 일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유도선수였던 덕분에 마음만 먹으면 할일은 널려 있었지만 그대로 가다가는 하루살이 인생이 되겠다 싶었다. 총무처가 공모한 9급 공무원 시험에 응시한 것은 안정된 직업을 갖고 싶어서였다. 공무원 생활은 서울 불광동 우체국에서 시작했다. 군대에 다녀와 복직을 한 즈음 방송통신대가 문을 열었다. 행정학과에 들어가 학사과정을 마쳤다. 경력에 따라 승급이 되었지만 7급 공채 시험에 응시해 노동부로 옮겼다. 기왕에 공무원을 하려면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악화되자 전주사무소를 지원해 내려왔다. 내친김에(?) 행정고시에 도전했지만 뜻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합격한 것은 서른 세살, 35세 나이제한으로 보면 거의 막차를 탄 셈이었다. 내무부를 지원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얼마되지 않아 다시 고향으로 왔다. 이후 전주시 문화과장과 문화영상산업국장, 전라북도 문화관광체육국장, 익산시 부시장을 등을 두루 거쳤으며 전라북도 기획실장을 끝으로 37년 공직생활을 마쳤다.

 

인생의 전성기를 공무원으로 보내는 동안 그는 전주와 익산, 전라북도의 문화 분야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데 각별한 공력을 쏟았다. 전주한옥마을 조성, 전주국제영화제와 전주세계소리축제,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문화유산 등재 등 의미있는 문화적 성과들이 직간접적으로 그의 손을 거쳤다.

 

오랫동안 주경야독의 일상을 지켜온 그는 일본 가고시마대학원에서 지방자치행정으로 석사를, 전북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마쳤으며 〈일본 발 지방자치 정책실험〉 〈실버산업을 잡아라〉 〈일본의 지방자치와 지역경영〉 〈고창사람 유기상의 꿈〉 〈조선후기 실학자의 풍수사상〉 등의 저서를 냈다. 공직에서 은퇴한 직후 귀향, 고향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도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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