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지나던 옛 신리터널, 지금은 예술 공간으로 / 문 잠기고 홀로 낡아가는 신리·죽림온천역 플랫폼 / 슬치 앞두고 숨 고르던 남관역은 터만 남아
좁은목을 지나고부터는 산이 마치 골목의 담장처럼 전주천 좌우로 늘어서, 정말 이름 그대로 ‘좁은’ 통로가 된다.
이 지형으로 전주와 남원 사이를 잇는 춘향로와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순천완주고속도로), 그리고 전라선 철길이 전주천과 함께 달린다. 물길과 찻길과 철길이 나란히, 혹은 서로 교차하며 달리는 셈이다. 이들의 공존은 전주천 발원지 인근인 완주군 상관면 슬치까지 이어진다.
철도는 색장동을 지나, 완주군 상관면으로 접어든다. 그 경계에 해당하는 것은 신리터널이다.
터널은 죽지 않는다,
다만…
여름날 뜨거운 햇볕을 피하기에 ‘굴’만한 곳이 또 있을까. 단선이던 전라선 옛 구간에 있던 옛 신리터널은 1931년 10월 개통돼 70년 가까이 쓰이다가, 2011년 5월 전라선 복선전철화 개통 후 버려졌다. 이곳이 2015년에 갤러리로 탈바꿈했다.
지난 6월 27일, 취재진은 ‘마중물 갤러리’가 된 옛 신리터널을 찾았다. 전주천을 가로지르는 월암교를 지나 곧장 좌회전하면 나오는 곳이다.
월암교 동단부터 선로를 걷어낸 기찻길 터가 길게 이어져 있는데, 침목도 레일도 없이 자갈들만이 옛 모습을 추억하는 듯 드문드문 깔려 있다.
갤러리 바로 옆 위쪽에 뚫린 새 터널에는 이따금 기차가 쌩 지나간다. 지난 시대를 바로 옆자리에 두고, 빠르게도 멀어진다. 입구 앞길 정원에는 옛 철길자리 양옆으로 온갖 식물이 장식돼 있다.
입구에서부터 찬 기운이 마음을 확 끌어당긴다. 온도계는 14~16도에 머물러 있다. 잠시 다른 차원의 세계에 들어온 기분이 든다.
이곳을 주로 찾는 것은 미술작품 전시 관람과 도예 수업을 위한 발길들. 주말에는 가족단위 나들이객이 많고, 평일에는 강의와 작업을 위한 공간으로 쓰인다.
올 4월부터 이곳을 맡아 운영하는 강옥자 씨의 손길이 곳곳에 닿아 있다. 이곳에서 ‘별별미술관’을 꾸리고 있는 그는 이 공간을 그림, 도예, 만화 등 미술 활동을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한다.
“터널이라는 공간의 특성상 습기가 많아요. 그래서 종이 관리에 더욱 신경을 쓰죠. 여기 전시된 작품은 거의 다 제가 그리고 만든 것들이에요. 제 작품들이 실험대상이 된 셈입니다.”
습기 때문에 종이가 버티기는 힘들지만, 대신 조소 작업에는 유리한 면이 있다고 한다. 흙이 빠르게 굳지 않아서다.
이곳의 구조는 단순하다. 오로지 직진뿐이다. 제1전시실, 제2전시실, 휴게실 등 구획이 나뉘어 있긴 하지만, 샛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딱히 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입구부터 반환점까지가 전부 하나의 큰 덩어리 같다.
기차 입장에서는 목적지를 향해 빠른 속도로 통과하던 길. 길이 225m, 딱히 긴 터널도 아니고, 특별할 것도 없던 통로였겠다.
하지만 이제는 양쪽 벽면에 걸린 작품들과 천정의 장식을 살피느라 저절로 뒷짐 지고 사뿐사뿐 걷게 되는 길이다. 터널 저 끝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하며 자꾸만 나아가게 되는 별 희한한 미술관이다.
강 씨와 함께 터널의 북쪽 끝, 전주시 색장동 땅으로 나왔다. 강 씨가 포부를 밝혔다.
“수익 고민을 안 하긴 어렵죠. 하지만 전 이 공간이 우리 지역에서 지역 사람들이 미술을 배우고 작업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요.”
바로 옆의 새 철길로 무궁화호 열차 한 편성이 쌩 지나갔다. 역시 속도 차이가 엄청나다. /김태경 기자
사람을 거부하는
새마을 새 역
신리는 ‘새마을’이다. 새 신(新)에 마을 리(里)를 쓴다.
완주군 상관면의 중심지로, 한일장신대가 이곳에 있고, 전주 남부를 빙 돌아온 국도 21호선이 이곳에서 춘향로(국도 17호선)와 만난다. 우체국·면사무소와 신리역 등 상관면의 주요 시설도 이곳에 있다. 높이 솟은 ‘신세대 지큐빌’ 아파트를 보면 정말 ‘새마을’ 같은 느낌이 든다.
1931년 문을 연 신리역은 상관면의 중심역이나 다름없는 역이지만, 여객 수요의 측면에서는 그다지 신통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군산~임실 간 통근열차가 다니던 시절인 2005년 이 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6029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간선열차 이용객은 967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통근열차 폐지가 직격탄이 될 수밖에 없었고, 결국 지난 2010년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1981년 지어진 凸자 모양 옛 역사는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역 광장이었던 자리는 주차장이 됐다. 역의 기능은 바로 옆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옮겨졌지만, 맞이방도 없고 도로 쪽 출입문도 따로 없는 새 역사는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다.
물론 이 역에는 아무도 없다. 전주역에서 이곳까지 관리하는데, 취재진이 찾은 이날(6월 26일)도 전주역 관계자가 동행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 리 없는 플랫폼에는 파릇파릇 풀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았다. 플랫폼 남쪽 끄트머리에는 화단(?)이 있었다. 루드베키아가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일명 ‘계란꽃’이라고도 하는 개망초 같은 들꽃들도 눈에 띄었다.
전주역 관계자에 따르면 “일부러 심은 것은 아니다”고 하는데, 고속열차도 다니는 간선철도 구간에서 열차가 들꽃 바로 옆을 지나가는 모습이 결코 흔한 풍경은 아닐 것이다. 퍽 재미가 있다.
새 역사 주변에는 철길의 유지·보수를 위한 자재 따위가 보관돼 있고, 둘레에는 공사장을 방불케 하듯 고철 기둥들이 쌓여 큰 언덕을 이루고 있다.
옛 역사 자리 인근 공터에서 텃밭을 가꾸고 있던 주민 이정두(69) 씨는 신리역에서 기차를 타던 일을 ‘까마득한 시절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옛날에 학교 다닐 때나 어쩌다 친구가 찾아오면 신리역에서 기차를 타곤 했다”며 “전주와 가깝고 시내버스도 다니다 보니 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던 모양”이라고 덧붙였다.
아닌 게 아니라, 옛 신리역 터 바로 앞 버스정류장에서는 752번과 같이 전주 도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버스들이 20~30분 간격으로 멈추곤 한다. 그러니 신리역이 ‘까마득한’ 옛 시절처럼 자기주장을 펼 수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옛 건물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아쉽다. 별 특징도 없이 흔한 건물이었음에도.
/권혁일·김태경 기자
화양연화,
혹은 남가일몽
도로 동쪽에 큰 건물 몇 채가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이 죽림온천 단지의 뒤로는 전주천이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또 전라선 철도가 지난다.
1993년 개장한 죽림온천은 전북의 대표 관광지가 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보도된 내용을 보면 개장하자마자 하루 평균 이용객 2000여 명, 주말이면 6~7000명 이상도 몰렸다는데, 1996년에는 한 해 동안 이곳을 찾은 이가 무려 114만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죽림온천 단지’라고 하지만, 사실 이 단지에는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온천이 두 곳 있었다. 북에서 두 번째 건물이 ‘죽림온천’, 그리고 다섯 번째 건물이자 가장 큰 건물이 ‘송산온천’이었는데, 대체로 수질은 죽림온천 쪽이, 시설의 쾌적함은 송산온천 쪽이 우세하다는 것이 당시 이용객들의 일반적인 평가였다.
그러나 사업 주체 간의 갈등과 자금난 등이 겹치면서 초기부터 휴업과 재개장이 반복됐고, 결국 지금은 두 온천은 운영되지 않는 상태다. 이 상태로 벌써 몇 년은 흘렀는데, 다만 두 온천 사이에 위치한 상가는 아직 살아있다.
온천 단지 남쪽, 높이 자란 나무들 뒤로 죽림온천역이 보일락 말락 서 있었다.
철도를 떠받치는 교각 아래로 들어가면, ‘죽림온천역’이라는 팻말과 함께 역사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혹여 역사 정면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있나 둘러봤지만, 그런 것은 없고 오직 다리 밑 출입구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아니, 사실 지금은 그렇게도 들어갈 수 없다. 원래 출입구였어야 할 문은 굳게 잠겨 있다.
시설관리원 김영수 씨(56)가 관계자들이 출입하는 곳으로 취재진을 안내했다. 이곳에는 김 씨를 포함해 시설관리원 3명만 남아 있다. 이들은 선로를 관리하는 역할을 한다.
“이제는 시설관리반만 남아있죠. 적자 때문에 여기뿐 아니라 신리, 봉천, 서도, 산성, 주생, 금지, 이런 역들 다 폐쇄됐거든요.”
엄밀히는 ‘폐쇄된’ 역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무배치 간이역’으로, 여객취급만 중지돼 있을 뿐이지 춘포역이나 송천역, 아중역처럼 아예 폐역된 것은 아니다.
그러면 뭐하나. 열차는 멈추지 않고, 탈 열차가 없으니 올 승객도 없다.
1999년 5월에 전라선 복선전철화 1단계 신리~임실 구간 개통과 함께 문을 연 죽림온천역은 원래 도로 건너편에 있던 남관역을 계승하는 역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죽림온천 이용객 수요를 잡기 위한 포석이었다.
의도는 좋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1999년이면 죽림온천이 슬슬 내리막길로 접어들기 시작할 때였고, 역사의 위치도 미묘하게 불편했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죽림온천역 개업 이듬해인 2000년 한 해 이용자 수는 2265명이 전부였다.
과거 역 직원들이 찾던 식당을 운영했다는 동네 주민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없응게. 마을이 윗동네 열 가구, 여기 서너 가구, 다리 건너 동네도 한 서너 집 있나? 빈집이 많아요. 또 집에들 차가 다 있으니까. 역 생기자마자 온천도 저렇게 돼서…….”
지난 2006년 11월, 여객취급이 중지됐다. 역사에는 군산~임실 간 통근열차와 용산~여수 간 무궁화호, 이렇게 상·하행 두 편씩만 적혀 있는 시각·운임표가 그대로 남아있다.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으로 올라가는 통로에는 ‘전주죽림유황온천’이라는 글자가 박혀 있는 커다란 거울 두 장이 붙어 있었다.
플랫폼으로 올라서면, 빛깔이 죄다 바래서 무채색으로 통일된 풍경이 나타난다.
사람이 앉은 지 대체 몇 년이나 지났는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의자에는 시꺼먼 먼지가 두껍게 쌓여 있었고, 팻말들은 녹이 슬어 있었다. 바닥 일부는 빗물을 오랫동안 맞아서인지 움푹 패 있었다.
하선에 녹색 신호가 들어왔다. 곧 누리로 열차 한 편성이, “따르릉따르릉 비켜나세요~” 하는 예의 그 멜로디 경적을 올리고는, 속도를 유지하며 플랫폼으로 들어왔다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남쪽으로는 이제 한때 국내에서 가장 긴 일반철도 터널(6128m)이었던 슬치터널이다.
/권혁일 기자
고개 한 번 넘어보자,
남관역
남관초등학교 맞은편, 버스정류장 뒤쪽에 길 하나가 나 있다. 이 길을 따라 잠깐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위로 올라가는 경사로가 하나 갈라지고, 오른쪽으로는 평탄한 부지가 나타난다.
죽림온천역의 전신이자, ‘산악철도’ 전라선을 상징하는 역이던 남관역이 있던 자리다. 역사나 플랫폼 등 구조물은 전혀 남아 있지 않지만, 의외로 그 터는 옛 모양 그대로 보존돼 있다. 곳곳에 ‘철도공사 자산’이라고 적힌 팻말이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남관에서 관촌 방향으로 가려면 반드시 넘어야 하는 슬치 고개는 만경강 수계와 섬진강 수계가 갈라지는 분수령이면서 완주군과 임실군의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경사가 심해 통행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춘향로를 타고 자동차로 넘기에도 험한 편인데, 급경사(급구배)에 취약한 철도로는 이 슬치 한 번 넘는 것이 그렇게도 힘이 들었다. 그래서 증기기관차 시절에는 남관에서 관촌 방향으로 가던 열차들이 이곳에서 멈춰 증기압을 올린 뒤 달려야 했다고 한다.
갈 때 급한 오르막이면, 올 때는 급한 내리막이다. 관촌에서 슬치를 넘어 내리막을 타던 열차가 제동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사고 위험이 있었는데, 바로 그때 필요한 것이 왼쪽에 있던 피난선이었다. 지형을 이용해 열차를 멈추던 시설이다.
제동장치에 문제가 생기는 사고가 아주 드문 것도 아니었다. 1990년대에도 연중 1~2차례씩은 벌어지던 일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만난 주민 서기섭 씨(60)는 “옛날에는 슬치재 경사가 심하니까 열차가 못 올라가고, 그럼 올라가다 거기서 내리고 그랬다”면서, “이 자리가 옛날에 열차가 브레이크 못 잡으면 이쪽으로 보낸 선이다”고 말했다.
철도산업정보센터에 따르면, 남관역은 1929년 6월 16일에 ‘죽림역’이라는 이름으로 먼저 문을 열었다. 이후 1931년에 전라선 전주~남원 구간이 개통되면서 남관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보통역으로 격상된다.
40년 이상 그렇게 지내 오다가 1977년 5월 16일, 승객 부족을 이유로 여객 취급이 중지된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그해, 여객 취급이 중지되기 전까지 남관역을 이용한 이는 모두 5783명이었다.
다만 단선이던 전라선의 상황과 슬치를 넘어야 하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신호장으로서의 역할은 계속 남아있었다.
그러다 1999년, 신리~임실 구간이 복선으로 이설 개통된다. 복선이 됐으니 이제 열차 교행을 위한 시설이 필요 없어졌고, 슬치는 터널로 지나게 되니 피난선도 필요가 없어졌다. 그렇게 남관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권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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