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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 한국지역문화생태연구소장의 사연 있는 지역이야기] ⑮조선의 금서 '설공찬전'은 그저 귀신이야기였을까

조선 중종 때 문신 채수, 최초 국문 번역소설 / 반역자는 임금이라도 지옥에 간다 등 파격 / 조선실록에 기록 전해지다 1997년 13쪽 발견 / 숨겨진 후반부 이야기 발굴 지역자산으로

▲ 묵재일기 제3권 중 설공찬전(1511년, 채수) 개인 소장.

여름엔 귀신 이야기가 인기다. ‘무서운 이야기’ 이른바 귀신 이야기나 공포영화가 여름에 인기를 끄는 것은 서늘한 이야기가 무더위를 가시게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 밥을 먹으며 숟가락질을 하는 아들 모습을 본 아비가 ‘오른손잡이가 왜 왼손으로 숟가락질을 하느냐’라고 질타한다. 그러자 그 아들이 ‘내가 아들로 보이오? 저승에서는 모두 왼손으로 숟가락질을 한다오. 나는 죽은 조카 귀신이오’라고 말을 한다. 이 소름 돋는 귀신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 소재로도 활용된 조선시대 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이다. 이 소설은 <금오신화(1465~1470)> 를 이은 두 번째 소설이자 <홍길동전> 보다 무려 100년 앞서 한글로 번역된 최초의 국문 번역 소설이자 대중화된 소설이었다. 그리고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 6차례나 등장한 ‘조선의 금서’였다.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아예 불태워 흔적을 멸하게 한 소설이었으며 이야기의 배경은 전라북도 순창이다.

 

<설공찬전> 은 조선시대 중종 때 문신이었던 채수(蔡壽, 1449~1515)가 지은 소설이다. 성리학이 존중받는 시절에 당시의 유학자가 윤회 사상을 도입하여 이야기를 풀어낸 방식도 흥미롭지만, 귀신 이야기를 빌어 당시 정치 상황을 비판한 내용은 더욱 파격적이었다. 사실 이이의 <사생귀신책> 과 서경덕의 <귀신론> , 김시습의 <금오신화> 에 영향을 준 중국의 <전등신화> 등도 귀신 소재였지만, 유독 <설공찬전> 이 금서로 지목된 까닭은 윤회화복(輪廻禍福)설에 의한 것만이 아니었다. 채수처럼 유능한 인물이 시대 상황을 비판한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조정의 조치였을 것이라 여겨진다.

 

채수는 21살 때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후 젊은 나이에 요직을 거쳐 34세에 대사헌에 오른 인물이다. 그는 유학자임에도 불구하고 산수(山水)나 지리, 불교나 도교, 토속신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또한, 그는 연산군 때 도승지 임사홍의 잘못을 탄핵하였으며, 성종 때는 연산군의 생모 윤씨를 폐위하는 데 반대하였다가 파직될 만큼 강직한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1506년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에 봉해졌으나 벼슬을 버리고 처가가 있는 지금의 상주로 내려가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곳 쾌재정에서 1511년 순창을 배경으로 하는 <설공찬전> 을 지었다가 소설의 내용을 두고 유학 사림과 조정의 공격을 받아 책은 불태워지고 채수도 핍박을 받게 된다.

 

어린 시절 귀신을 목격한 경험이 있다는 채수는 패관소설(稗官小說)에 능통한 타고난 이야기꾼으로, 순창 설(薛)씨 족보에 등장하는 실존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적당히 섞어 귀신 이야기를 풀어갔다. 순창 설씨는 순창군 금과면 동전리 등에 가계가 이어져 동전리의 지명을 본따 동전설씨(銅田薛氏)로도 불린 순창의 주요 성씨 중 하나이다.

▲ 순창지역 고지도 (1872년지방지도).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순창에 살던 순창 설씨 가문의 설충란은, 좋은 가문에 부유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으나 딸은 혼인하자마자 죽고, 아들 공찬도 장가들기 전에 병들어 죽는다. 한편 설충란의 동생 설충수에게도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어느 날 큰아들 공침이 뒷간에 다녀오다 귀신이 들린다. 이에 귀신 쫓는 무당을 불러 귀신을 내쫓으려 하자 귀신이 이르기를, “나는 여자이므로 이기지 못해 나가지만 내 남동생 공찬이를 데려오겠다.”고 하였다. 이후 죽었던 설공찬이 사촌 아우 공침에 들어와 저승의 이야기를 전하게 된다.

 

귀신 공찬이 공침의 입을 빌려 “이승에서 어진 사람은 죽어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 이승에서 왕이었어도 주전충처럼 반역해서 집권하면 지옥으로 떨어지며, 신의를 지켜 간언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죽어서도 높은 벼슬을 하고 여자도 글만 할 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는 말을 하였다.

 

<설공찬전> 이 금서로 지정되고 나아가 불태워지기도 했던 것은 당대의 정치와 사회, 유교 이념의 한계를 적극적으로 비판한 내용 때문이었다. 반역자는 임금이라도 지옥에 간다거나, 여성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쌓은 덕에 따라 저승에서 보답을 받는다는 내용은 당시로써는 굉장히 도전적이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큰 문제가 된 구절은 “주전충과 같은 사람은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라는 말이었다. 비록 주전충은 중국 사람이었지만 절도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를 멸망시킨 인물이었던 만큼, 당시 왕이었던 중종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한 일을 연상시켜 왕의 정통성을 직접 공격한 셈이었다. 중종을 왕위로 세우는 데 일조한 공신이었기에 중종의 배려로 교수형에 처해질 위기에서 겨우 극형을 피하고 파직이 되었지만, 당시 그에 대한 성토 분위기는 뜨거웠다.

 

사실 채수가 그와 같은 글을 통해 조정을 비판했던 것은 이유가 있었다. 연산군의 폭정 이후 중종이 즉위했어도 많은 반정공신이 선정을 베풀기보다는 자신들의 재산 증식에만 몰두했고, 중종은 즉위 초 무기력한 존재로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백성들 입장에서는 연산군이 쥐어짜나 중종이 쥐어짜나 별다를 게 없었다. 채수는 이런 현실에 절망했고 그런 결과로 중종반정의 정통성에도 회의를 느끼며 귀신 이야기를 빌어 시대 상황의 비판이 담긴 <설공찬전> 을 지었던 것이다.

역사를 살펴볼수록 상황은 되풀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이후 오백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교훈을 건네는 작품인 <설공찬전> 은 그저 ‘전설의 고향’에 소재로만 기억될 귀신 이야기가 아니다. 시대 상황을 빗댄 이야기는 백성들에겐 통쾌함으로 속이 시원하게 하고, 부정과 불의를 일삼은 자들에겐 두려운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책이 모두 불 태워졌음은 물론이고, 책을 숨기고 내놓지 않은 자들은 ‘요서은장률(妖書隱藏律, 요망한 내용이 담겨있는 책을 숨긴 죄를 다스리는 법)’로 죄를 다스린다 했다. 그런 까닭에 <설공찬전> 은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으로만 남겨져있다가 1997년 이문건(1494-1567년)이 쓴 《묵재일기(默齋日記)》 3책의 합지 이면에 숨겨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하지만, 온전한 이야기가 아니라 떨어져 나간 채 13쪽으로만 세상에 알려지게 되어 후반부의 전개를 더욱 궁금하게 한다.

▲ 순창 금과면에 조성중인 설공찬문학관 투시도.

그 시절 누군가에게 숨겨져 읽혀온 온전한 <설공찬전> 을 찾아보고 싶다. 시절이 달라도 금서는 은밀하게 읽히며 내밀하게 보관되었을 것이다. 마저 우리 앞에 나타나지 못한 뒷부분의 이야기도 궁금하니 힘써 찾아보고, 그 배경이 된 순창을 살펴보는 것은 어떨까. 현재 순창 금과면에선 설공찬문학관 조성이 추진 중이다. 지역의 자산이 되는 <설공찬전> 의 의미를 잘 담아 역사의 교훈을 살펴볼 수 있는 고전소설의 성지로 순창이 알려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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