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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민화박물관 윤열수 관장 "민화는 한국인 심성에서 태어나 서민정서와 흐름 같이 해"

미술사에서 외면 당하고 학문 연구서 무시됐지만 외국서 민화로 학위받고 국내 들어온 사람 많아져 / 전주출신 작가 장산파 솜씨 매우 뛰어났지만 기록이나 자료가 없어…연구자로서 해결 과제

▲ 윤열수 가회민화박물관장이 한국인의 정서적인 측면과 생활예술적 측면에서 민화의 가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안봉주 기자

조선시대 그림을 가장 잘 이해한 미술사학자로 평가받는 고 오주석씨는 생전의 강연을 통해 “우리 옛 그림 안에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사는 이유, 그리고 우리인 까닭이 들어있는데, 우리는 여전히 내가 사랑하는 우리 그림 하나 대기가 힘들다”고 말하곤 했었다. 옛 그림이 지닌 아름다움과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환경을 안타까워한 말일 터다. 그가 펴낸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역시 그림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그 속의 작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진정한 그림읽기라는 것을 일러주지만 언감생심, 오늘날의 교육으로는 미술, 특히 우리의 미술을 제대로 만나고 이해할 수 있기란 여전히 요원하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급격히 불고 있는 바람이 있다. 옛 그림, 특히 민화에 대한 관심이다. 정통회화와 배치되는 민화는 생활공간이나 민속적인 관습에 따라 제작된 실용화를 이른다. 조선 후기 서민층에서 유행하여 발전한 민화는 대부분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이름 없는 화가나 떠돌이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지만 민중들의 일상 속에서 활용된 특성으로 한국적인 정서가 짙게 배어 있다. 민중의 심성을 가장 쉽고 솔직하게 표현했지만 정통회화에 비해 완성도나 격조가 떨어진다 하여 한국미술사 연구의 본류에서조차 소외되어 왔던 민화가 21세기를 지나면서 다시 각광받게 된 상황은 흥미롭다.

 

가회민화박물관 윤열수 관장(70)을 만났다. 남원이 고향인 윤 관장은 오랫동안 한국미술사에서조차 소외되어왔던 민화를 주목해 그 가치와 의미를 널리 알려온 민화전문가다. 1970년대 초, 민화 전문 박물관인 에밀레박물관 학예사로 들어가면서 민화연구를 시작한 그는 40여년 세월을 온전히 민화의 밭에서 보냈다.

 

제 1세대 민화전문가로 꼽히는 조자용 선생으로부터 지식뿐 아니라 옛것과 대화하는 즐거움과 의미를 배웠다는 그는 민화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민족화’라고 단언한다.

 

“민화는 한국인의 심성 속에서 태어난 그림입니다. 서민들의 생활정서와 흐름을 같이하지요. 그런 점에서 근래 들어 민화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높아진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에요.”

 

-박물관 찾기가 어렵더군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민화전문박물관이 이렇게 낡은 건물 비좁은 지하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당황스러웠습니다.

 

“부끄럽습니다. 사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죠. 공간의 크기가 중요한 것은 아지만 시설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지하에 전시실이 있으니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가회동 한옥에 자리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2002년에 그곳에서 문을 열었어요. 저기 위쪽으로 한옥 지붕이 보이지요? 저곳이 민화박물관이었습니다. 서울시가 북촌의 가회동 일대 작은 한옥을 구입해서 작은 박물관을 만들겠다 해서 들어갔는데 이후 조례가 만들어지고 사용할 수 있는 기한이 정해지면서 우여곡절이 있었어요. 그러다가 쫓겨 나온 셈인데 좋게 말하자면 양보하고 나왔다고 할 수 있어요.(웃음) 2014년의 일입니다.”

 

-작은 박물관의 전형으로 소개되면서 해외 문화전문가들의 관심이 집중되기도 했었는데요.

 

“2004년 세계의 무형유산전문가들이 모이는 세계박물관대회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그때 우리 박물관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어요. 당시 한국을 방문한 전문가들이 유명한 박물관 말고 작은 박물관을 가보자고 했대요. 그래서 우리 박물관을 오게 되었는데 둘러보고는 ‘바로 이것’이라고 호감을 보였어요. 덕분에 해외 전시 의뢰가 이어졌지요. 돌아보면 그동안 세계 각국에서 초청을 받아 진행한 민화 전시가 아주 많았습니다. 내년 2월에도 모스크바 국립 동양박물관 초대전이 예정되어 있고 코스타리카 전시도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현재의 박물관은 아무리 개인 박물관이라고는 하지만 비좁고 수장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이곳을 찾아주시는 분들께는 참으로 죄송한 마음이죠. 더 중요한 문제는 자료 보관이 한계에 이르러 조만간 공간을 마련해야할 처지입니다. 당장 해결해야하는 절박한 과제이기도 합니다.”

 

-지금 당장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니겠군요. 개인박물관은 아무래도 운영이 어려우실 텐데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에밀레박물관이 첫 직장이었는데 박물관 운영에 경험이 있다 보니 삼성출판박물관과 인천 길병원 가천박물관을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어요. 그곳에 각각 몇 년씩 근무를 했었는데, 늘 내 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꿈을 실현한 것이죠.”

 

-한국 미술사에서 소외되어왔던 민화를 주목한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사실 1960~70년대 지식인들은 민화에 대한 이해와 지식이 깊었습니다. 한국 미술의 정체성을 민화로 보는 분들이 많았죠. 한국적인 민중 서민문화는 영·정조 시대, 18~19세기 들어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데, 민화 또한 그때 발전했습니다. 민족문화를 이야기할 때 민화를 빼놓을 수 없어요. 안타깝게도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민화의 존재가 묻혀버렸지만 야나기 무네요시 같은 사람은 한국의 민화를 불가사의한 최고의 그림이라고까지 칭송했어요. 그만큼 의미나 가치가 컸다는 이야기지요. 후에 조자용 선생을 비롯한 지식인들이 한국문화의 원형을 찾자는데 의기투합을 하게 되는데 그 통로가 민화였어요. 사라져가던 민화를 그때부터 수집하기 시작했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입니까.”

 

-관장님은 언제부터 민화를 수집하셨습니까.

 

“1973년에 에밀레박물관에 들어갔지만 처음에는 민화를 알지 못했어요. 그럴만한 계기도 없었고 지식도 부족했죠. 민화는 조자용 선생님을 모시면서 자연스럽게 눈을 뜨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민화를 구해오시는 날이면 특별한 의식(?)을 치렀는데 막걸리통과 그림을 앞에 두고 밤새도록 대화를 나누셨어요. 민화 속에 그려진 새와 꽃, 나무와의 대화였지요. 처음에는 이해하기도 어려웠고 옆에서 빈 술잔을 채워드리는 것이 제 역할이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시간이 귀한 배움의 시간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민화의 세계에 자연스럽게 빠질 수 있었겠습니다.

 

“감사한 일이죠. 그러면서 수집에도 마음을 두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아현동에 골동품 가게까지 열고 민화를 모았습니다. 그때 그 가게가 민학회의 아지트였어요.”

 

-민화가 해외로 알려진 것도 그즈음부터인가요.

 

“해외전시를 이끌어낸 분이 바로 조자용 선생님인데 74년부터 미국에서 전시를 시작했고, 76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순회 전시를 했었어요. 당시만 해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민화가 ‘엿장수그림’으로 폄훼되었지만 외국에서는 한국문화를 읽을 수 있는 진정한 통로가 되었던 겁니다.”

 

-근래 들어 민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민화인구도 많이 늘었죠.

 

“제가 동국대 대학원에서 민화로 석사과정을 마치고 강의를 시작한 것이 81년이거든요. 50명쯤 석사과정을 마쳤는데 그중 30여명이 민화전공자들입니다. 본격적인 연구 작업이 활발해졌다는 증거지요. 민화 인구만도 15만 명에 이른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다른 전통문화유산과 비교할 때 민화의 가치는 어떻게 보십니까.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도자기나 불상, 혹은 건축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민화는 설득력이 있어요.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온전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 민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민화는 오랫동안 미술사에서 외면당해왔고, 학문 연구 대상으로서도 무시되어 왔어요. 지금은 외국에서 우리 민화를 연구해 학위를 받고 들어온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반가운 일이죠.”

 

-민화의 가치와 의미는 어떤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까요. 예술적 완성도가 우선인지 생활 속에서 쓰인 실용화로서의 의미가 우선인지 궁금합니다.

 

“민화는 예술성으로도 생활예술로서도 뛰어난 회화입니다. 궁중작가와는 또 다른 예술성과 창의성이 있어요. 추상적인 민화를 보면 그 경계가 더 넓어집니다. 민화는 대부분이 일상에서 사용하기 위해 이름 없는 화가들이 그린 것들인데 그래서 그림의 내용이나 형식이 자유롭습니다. 어떤 경우는 표현의 파격이 놀랍습니다. 한국인의 심성과 한국인의 기층문화 정신이 가장 긴밀하게 담겨진 그림이랄 수 있지요.”

 

-민화도 지역에 따라 특성이 있습니까.

 

“민화는 이제 대부분이 발굴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데, 이름 없는 작가들이 남긴 작품이 대부분이니 뚜렷하게 지역적 특성을 분류하기는 아직 어렵지만 지역에 따라 민화를 즐겼던 정도는 확실하게 차이가 납니다. 강원도나 제주도의 민화는 많이 나오거든요. 그런데 아쉽게도 전라도 민화는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제 고향이 남원이어서 전라도 민화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되는데 우선 수적으로 적으니 연구에 한계가 있습니다.”

 

-전주에도 대단한 민화작가가 있었다고 하던데요.

 

“민화는 대부분 정식 미술교육을 받지 못한 화가들이 그린 그림이었지만 계보와 유파는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민화는 그 경향이 더 강했을 수도 있어요. 전주 민화작가로는 장산파라는 사람이 알려져 있는데 그 솜씨가 빼어납니다. 전라도 천재라고 불릴 정도인데 제가 보기에는 민화의 천재라고 할 만큼 수준이 뛰어나요. 그런데 아쉽게도 그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없습니다. 한때 연고가 있다고 전해지는 삼례 지역을 찾아다녔었는데 흔적을 얻지 못했어요. 연구자로서 꼭 찾아내고 싶은데 전라도 민화를 정리하는 일과 함께 제가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습니다.”

 

2002년 서울의 북촌 가회동 한옥을 얻어 가회민화박물관을 열어 3년 전 지금의 북촌로 낡은 건물 지하로 이사해 간신히 전시실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지금까지 민화에 바쳐온 그의 시간은 곳곳에서 빛났다. 누군가의 말처럼 ‘우리 민화의 족적을 따라 걷다보면 그 길목에서 어김없이 그를 만나게 될’ 뿐 아니라 발로 뛰며 발굴하고 수집해온 2000여 점 민화가 그 통로에 놓여있다.

 

● 윤열수 관장은 40여년 민화 수집 외길

윤열수 관장은 남원 아영면이 고향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수집에 취미가 있었다. 한 때 유행처럼 번졌던 우표수집이 시작이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우표집이 제법 두툼해질 정도로 모아졌는데, 2학년 때인가 우표집을 통째로 도둑 맞았다. 수집에 바친 열정만큼 허망함이 컸으니 더 이상 수집에 마음을 두지 않았을 법도 하지만 그는 사람들이 관심 갖지 않을 물건을 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적 수집은 그렇게 시작됐다. 사람들이 미신으로 치부해 가치 있는 물건이라고 여기지 않은 덕분에 부적을 모으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단순한 취미로 시작했던 부적 수집은 그에게 우리 문화의 소중함과 가치에 눈을 뜨게 했다.

 

대학(원광대 영문과)에 들어갔지만 1학년 때부터 학교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전공보다는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를 전역한 그해 곧바로 민화를 전문으로 연구하고 전시하는 에밀레박물관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민화의 중요성을 깨달아 사라져가는 민화를 수집하고 연구해 그 의의를 널리 알리는데 앞장서온 조자용 선생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 또한 민화의 가치와 소중함에 눈을 뜨게 되어 전통문화유산을 지키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게 된 것이다. 75년 동국대 대학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민화 연구 활동을 시작했다. 에밀레박물관에서 만난 아내(최진옥 전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인생 뿐 아니라 학문의 동반자가 되어 그가 민화를 수집하고 연구하는 고단한 일에 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민화 수집에 열정을 쏟았던 그는 전국 각 지역을 찾아다니는 일은 물론이고, 고물상까지 열어 민화를 모았다. 삼성출판박물관과 인천 길병원 가천박물관 설립에도 큰 역할을 했던 그는 2002년 서울 북촌 가회동의 작은 한옥을 얻어 ‘가회민화박물관’을 열었다. 2004년 최초의 민화 이론 전문교육기관인 가회민화아카데미를 설립해 민화 전공자들을 배출하기 시작했으며 ‘전국어린이민화그리기대회’와 같은 행사를 만들어 민화를 대중화하는 통로를 열었다. 〈문자도〉 〈무속화〉 〈산수화〉 등 박물관의 상설·기획전은 물론 국내외 박물관의 초대를 받아 〈청계천으로 돌아온 물고기전〉 〈모란꽃 그림전〉 〈오방색 눈썰미, 호랑이도 꽃도 웃는 민화〉과 같은 흥미로운 주제전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였다. 민화를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일에도 열정을 쏟아 민화의 지역적 양식과 작가에 주목한 연구 성과로 민화 연구의 지평을 열었으며 〈민화이야기〉 〈민화〉 〈산신도〉 〈용, 불멸의 신화〉를 비롯해 20여권의 저서를 냈다.

 

2006년부터 시작된 해외전시는 해마다 이어지면서 한국의 전통문화, 특히 민화를 세계에 널리 알리는 보고가 되었다. 2008년 창립한 한국민화학회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월간 〈민화〉 초대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가회민화박물관은 2014년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 소유였던 가회동 한옥 공간을 떠나 북촌로의 오래된 건물 지하로 옮겨졌다. 제대로 된 수장고와 전시 공간을 갖춘 박물관을 마련하는 것이 그의 절박한 과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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