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낭산 최고 명당에 묻혀 / 해방후까지 묘 훼손 이어져 / 후손들 유골 화장하고 폐묘 / 군산 익산 곳곳 일본식 건물 / 일제 강점 입증하는 흔적지 / 뼈아팠던 역사 잊지 말아야
적(敵), 싸움의 상대를 말한다. 그리고 해를 끼치는 요소를 일컫는다. 요즘 들어 적폐청산이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지만,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 보아도 우리에겐 청산해야 할 적, 을사오적이 있었다. 일제는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주권을 빼앗으며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군인들을 대동한 이토 히로부미가 어전회의에 들어와, 참석한 각료들을 압박하여 조약에 찬성할 것을 강요했다. 고종은 조약에 반대했지만, 건강 문제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다. 총 8명의 대신 중 일부가 찬성했는데 당시 서명한 5명을 매국노라고 하여 ‘을사오적’이라고 칭하였다.
전국 곳곳에서는 을사오적을 규탄하고 일제와 맞서 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언론인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이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을 써서 조약 체결의 부당함을 알리고 을사오적을 규탄했다.
울분을 참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부당함을 알리는 우국지사들이 줄을 이었다. 통분한 국민들은 을사오적에 대해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민들의 분노와는 반대로 을사오적은 이후 일제강점기 시기 승승장구했는데, 그중 대표 매국노 이완용의 흔적이 전북 익산에 있다.
적(敵), 이완용의 본관은 우봉(牛峰)으로 경기도 광주 낙생면 백현리(현 성남시 분당구 백현동) 출신이다. 1858년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10살 때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가며 형편이 달라졌다. 이후 1882년(고종 19년)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맡으며 전라북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특히 육영공원에서 영어와 신학문을 배운 뒤 미국을 오가며 외교관 생활을 했고, 친러파였다가 친일파로 돌아섰다. 조선의 중앙정부 조직이었던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고, 1907년에는 헤이그 밀사에 관련하여 고종의 책임을 추궁하면서 퇴위를 강요해 순종이 즉위하게 했다.
이로 인해 전국에서 의거가 일어났고 성난 민중에 의해 이완용의 집이 불에 탔다. 그럼에도 1910년 총리대신으로서 한·일 강제병합 체결을 주도했다. 그 대가로 을사오적 중 가장 높은 후작 작위를 받아 자손들까지도 그 혜택을 누리며 살았다.
이완용은 1909년 이재명(李在明, 1890~1910년) 의사에게 칼에 찔리는 테러를 당한 뒤 후유증을 앓으며 암살을 두려워하는 불안한 삶을 살았다. 자신의 무덤이 훼손될까봐 전국에 가묘를 몇 개씩 두었으며 최고의 명당을 익산에 찾아 놓고 1926년 2월 11일 종로구 옥인동 자신의 집에서 병사했다.
당시 《경성일보》에 따르면 그의 장례는 일황이 내린 장례 깃발을 앞세워 성대하게 치러졌고, 일제는 이완용의 업적을 높게 사 그의 장례식을 기록영화로 만들었다 한다. 그의 죽음을 두고 ‘무슨 낫츠로(낯으로) 이 길을 떠나가나’라는 제목의 사설이 1926년 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다가 조선총독부의 발행금지 처분으로 삭제된 채 호외로 발행되었다.
장례 후 이완용의 시신은 용산역에서 기차에 실려 내려가 전라북도 익산시 낭산면 낭산리 산 154-3번지 자신이 명당으로 지목한 터에 묻혔다. 묘소를 훼손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하자 일본 순사가 묘를 지켰고, 해방 이후에도 식칼이 묘에 꽂아 있거나 봉분이 파헤쳐지는 등 훼손이 이어지자 1979년 그가 죽은 지 53년 만에 후손에 의해 유골은 화장되어서 뿌려지고 묘는 폐묘되었다. 당시, 남겨진 이완용의 관 뚜껑은 원광대학교 박물관에서 5만 원에 구입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적폐청산의 의미로 태워졌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완용이 남긴 흔적으로 남아있던 명당인 그곳엔 컨테이너와 돌무더기들이 자리 잡고 있다.
적의 또 다른 대표 흔적으로 ‘적산가옥(敵産家屋)’이 있다. ‘적산(敵産)’은 ‘적의 재산’을 뜻하는 말로 적으로서 머물러 있었던 이들의 집을 일컫는 말이다. 전라북도는 이 땅의 양곡을 노리는 적들에 의해 늘 수탈의 대상이 되었으며 만경강과 동진강, 그리고 서해의 물길과 군산항은 수탈의 통로가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제로 침탈했던 시기 전후로부터 일제강점기에는 많은 일본인이 수탈을 목적으로 전라북도에 살았다.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배하자 철수하면서 그들이 살던 집들은 정부에 귀속되었다. 당시 38선 이남을 통치한 미군정청은 남한 내 모든 일인 소유재산을 인수하였고, 이후 1949년 대한민국 정부가 제정한 귀속재산법 및 1950년 시행령에 의해 수많은 적산에 대한 매각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에 따라 오늘날 적산은 단순한 ‘적의 재산’이라는 의미보다 ‘적에게 수탈당했다가 되찾은 재산’이라는 의미로 일제강점을 입증하는 역사의 흔적으로 가치를 남기고 있다.
근대문화유산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군산에는 대표적인 적산가옥인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구 히로쓰가옥)’이 있다. 군산 신흥동 일본식 가옥은 과거 군산유지들이 거주하던 신흥동 일대에 위치한 주택으로, 포목점을 운영하던 히로쓰 게이사브로가 지은 집이다. 목조 2층 형태로 근세 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으며, 일본식 정원과 건물의 모습 등이 건립 당시 모습을 지니고 있어 건축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이 가옥은 2005년에 국가등록문화재 제183호로 지정되었으며 영화 《장군의 아들》, 《타짜》, 《범죄와의 전쟁》 등 우리나라 근대사를 소재로 다룬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지로 활용되었고 군산의 근대문화유산 탐방의 메인 코스의 거점으로 인기장소가 되었다.
익산에는 ‘익산 춘포리 구 일본인 농장가옥’(구 호소카와 농장가옥)이 있다. 일본식으로 지어진 목조 2층 건물로 등록문화재 제211호로 지정돼 있다. 곡창지대였던 호남평야 농장 중 가장 대표적이었던 호소카와(細川) 농장 안에 있었던 주택이자, 전 일본 총리였던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의 할아버지 소유였던 농장의 일본인 농업기술자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봄나루, 춘포(春浦)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면서도 호소카와 농장으로 인해 대장촌(大場村)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이곳에서 수탈해간 돈으로 일본의 총리가 탄생했다 하니 참으로 기막힐 노릇이다. 이 일원은 당시의 원형을 간직한 곳으로 호소카와의 도정공장과 춘포역 그리고 수탈의 통로였던 만경강과 이어지는 근대사의 흔적지로 남아 역사의 의미를 전해주고 있다.
지난 8월 15일 익산역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되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들이 끌려갔던 출발지이자 이완용 시신이 실렸던 용산역에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세워져 있다. 아픈 기억도, 적(敵)과 ‘적산(敵産)’의 흔적까지도 잊지 말아야 할 우리의 역사이다. 그 역사의 흔적 따라 사람의 발길이 이어지는 것도 땅이 지닌 힘이다. 청산해야 할 적폐도 있지만 아픔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교훈을 깊이 새기며 그 흔적을 따라 가봐야 할 팔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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