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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출판 역사 다시 세운 신아출판사 서정환 대표 "그래도 책은 살아남는다는 믿음…그것이 희망이죠"

정기간행물만 11종 발행 돈 되지않아도 의미 있어…25년 맞은'수필과 비평' 문학장르 정착·발전 통로 / 완판본은 위대한 유산 봉건시대 서민 일깨워 / 그 역사, 신아가 이어가

▲ 서정환 신아출판사 대표가 사무실에서 직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안봉주 기자

‘먼지를 털어내지 않고 포장해 옮겨내는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 씨트박스로 360개, 4.5톤 화물차 두 대를 가득 채운 엄청난 양이었다. 햇빛 제대로 들지 않은 20여 평 비좁은 공간 안에서 숨죽이고 있던 조선시대의 책판 목판의 외출은 특별했다.’(2004년 10월 11일자 전북일보 기사 중)

 

전주 향교 장판각에 보관되어 있던 목판본이 정리 작업을 위해 전북대 박물관으로 옮겨지던 날의 현장을 소개한 기사다.

 

장판각에 보관되어온 ‘완판본’은 1800년대 전라감영에서 책 출판을 위해 제작한 목판 책판이다. 조선시대 전라감영 이외의 다른 지역 감영에서도 책을 출판하기 위한 목판본이 제작되었지만 완판본처럼 대량 판본이 보존되고 있는 예가 없으니 사료적 가치로서도 완판본의 존재는 특별하다.

 

‘완판본’은 조선시대 출판문화를 이끌었던 전주의 역사를 일깨우는 살아 있는 ‘기억’이다. 오늘에 이르러 우리가 만나는 ‘완판본’은 전라감영에서 제작된 목판이지만, 감영본이 아니고도 전주지역 민간에서는 또 다른 목판본으로 책을 만들어냈다. 출판문화의 융성을 일궜던 전주의 풍요로운 문화사를 일깨워주는 증거다.

 

그러나 아쉽게도 전주의 출판문화는 근대에 들어서면서 위축되거나 중단됐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혼란기를 건너는 동안 한두 개 출판사들의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 이어졌지만 현실의 무게는 지역 출판의 위기를 부추기고 짓눌렀다. 지역출판의 명맥이 단절되거나 묻히게 된 이유일 터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있다. 이 열악한 환경을 딛고 전주의 출판 역사를 지켜온 〈신아출판사〉의 존재다. 어느 사이에 전주 사람들에게 낯설지 않은 이름이 된 〈신아〉의 존재는 반갑다. 1970년 인쇄업으로 시작해 올해까지 47년. 만만치 않았을 역경의 노정에서 끝내 살아남아 지역 출판사의 모범이 된 신아출판사 서정환 대표(77)를 만났다.

 

“돌아보면 스무 살에 시작한 신문배달이 지역출판을 부흥시키겠다는 꿈을 갖게 한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는 그의 삶은 시작부터 지금까지 온전히 출판의 길에서만 존재한다. 〈신아〉의 존재가 곧 그의 삶이 된 셈이다.

 

인터뷰는 전주시 진북동 신아출판사 사무실에서 있었다. 신아문예사와 신아출판사는 한해 수십억 매출을 올리는 적지 않은 기업이 되었지만 그의 공간은 건물 입구, 낡은 책상과 고객들을 맞는 몇 개 의자가 놓인 탁자가 전부다. 보여지는 것보다는 내용을 채우는 일에 마음을 써온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다.

 

-출판사 규모가 커진 것 같습니다. 식구들이 많이 늘었나봅니다.

 

“오히려 잘 될 때보다 줄었어요. 지금은 인쇄 출판, 전주와 서울사무실까지 30여명이 근무합니다.”

 

-출판 상황이 어려워진 탓이겠군요. 2000년대 들어서면서 많은 출판사들이 문을 닫는 사례가 많아졌지요.

 

“맞아요. 90년대는 출판 부흥기라고 할 정도로 형편이 좋았었는데 2000년대 들어서면서 출판시장이 위축되니 경영 악화로 출판사들의 부침현상이 이어졌습니다. 인터넷 환경이 확대되면서 종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불안과 회의가 깊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판을 이어오셨잖습니까.

 

“시작을 해놓았는데 다른 탈출구가 없잖아요. 언젠가부터 그래도 종이책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아무리 컴퓨터가 우리 일상을 지배한다고 해도 종이책의 역할은 따로 있다는 생각이었죠.”

 

-종이책이 필요하긴 한데 출판 환경은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현실이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지탱해온 비결(?)이 궁금합니다.

 

“물론이죠. 그래도 책은 살아남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요. 결국은 자본주의가 융성해질수록 책을 찾게 된다는 믿음. 그것이 희망이라고 할 수 있겠죠. 비결이 있다면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바로 그 믿음일 수 있겠네요.”

 

-둘러보니 한 해 동안 발간하는 책의 규모가 엄청나더군요. 그 책이 좀 팔려나가야 할 텐데요.

 

“책을 팔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늘 고민하지만 답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주가 출판의 중앙이 되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아주 먼 이야기죠. 현실은 예상보다도 훨씬 더 팍팍해서 출혈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 정기간행물만 11종을 발간한다고 들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 아닌가요. 질적 성장도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모든 문예지나 잡지를 출혈 없이 만들어내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내는 것 중에서는 〈수필과 비평〉이 비교적 성공한 예인데, 나머지 문예지나 잡지는 돈이 되지 않아도 역할과 의미를 살려 만들어내는 것들이 대부분이지요.”

 

-〈수필과 비평〉은 신아의 상징적인 존재가 되었죠.

 

“90년 〈소년문학〉을 처음으로 문예지로 창간했고 2년 뒤 창간한 것이 〈수필과 비평〉이죠. 처음에는 격월간으로 출발했는데 월간으로 바꾸었어요. 올해로 25년을 맞았는데 그 자체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어요. 수필의 영역을 새롭게 확장시키면서 문학의 한 장르로 정착시키고 발전시키는 통로가 되었다고 자신합니다.”

 

-사실 수필과 비평이 창간한 당시만 해도 수필은 문학의 본격적인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던 상황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처음에는 수필에 대한 평론을 받기도 어려웠어요. 수필은 누구나가 쓰는 잡문쯤으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 평론하는 분들도 참여를 꺼렸거든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원고를 청탁하고 문학인들을 초청해 세미나를 열어 수필에 대한 편견을 깨고 문학 장르로서의 위상을 찾는 일을 했더니 서서히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특별히 수필에 주목하셨던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누구나가 글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시나 소설과 달리 수필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지요. 물론 수필에 대한 편협된 인식도 바로 잡고 싶었고요. 사실 수필이 근대에 와서 위축되었지, 그 이전에는 내로라하는 작가들이 수필을 즐겨 썼지 않습니까. 그러다보니 본격적인 장르로 정착하는데 한계가 있었지만 문학적으로도 완성도 있는 수필작품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보니 수필이란 장르가 글을 쓰고자하는 많은 분들에게 용기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문예지 말고도 신아에서 발간하는 정기간행물이 적지 않지요.

 

“꽤 됩니다. 〈소년문학〉과 〈수필과 비평〉 이외에 〈좋은 수필〉 〈여행 작가〉 〈계간문예〉 〈인간과 문학〉 등 월간 격월간 계간으로 11종이 나옵니다. 가장 최근에 창간 한 것이 〈K스토리〉인데 이 책은 문학의 탈장르를 예상하고 기획한 것입니다. ‘미래 한국 스토리의 지평을 여는 신개념 문예지’를 부제로 달았는데 이를테면 좋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을 만들어내는 콘텐츠로서의 이야기를 모아내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응은 어떻습니까.

 

“앞으로는 괜찮을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공모를 통해 영화와 드라마 희곡 등을 발굴하는데 반응이 꽤 괜찮거든요. 이렇게 콘텐츠를 구축해나가면 좋은 작품들이 발굴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더라도 이런 간행물들은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 같습니다.

 

“당장 경제적 측면을 생각하면 무모한 일이죠. 사실 두려움도 있습니다. 신아의 경우, 인쇄업이 비교적 잘 되고 있는 편인데, 인쇄에서 번 돈을 출판 쪽으로 쏟고 있으니 그 과정이 정상적이진 않지요. 회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뒤죽박죽 이예요. 체계적으로 얼마가 적자 나는지 잘 파악도 안 되는…….매달 월급만 제대로 주면 된다는 생각으로 이 무모한 도전을 해온 것 같아요.(웃음)”

 

-말씀하신대로 인쇄업은 괜찮습니까.

 

“인쇄업이 아니었으면 출판 쪽 사업은 엄두도 못 냈을 겁니다. 털어놓자면 인쇄업이 괜찮다해도 투자는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이에요. 인쇄는 신아문예사, 출판은 신아출판사가 맡고 있는데 지금은 출판물이 적지 않아 나름대로 유지해나가는 수준은 됩니다.”

 

-지역에서 출판으로 살아남기 어렵다고 하는데 신아는 잘 버티어 온 셈인데요. 그것이 모두 인쇄업 덕분이었다는 이야기군요.

 

“그런 셈이죠. 수필과 비평도 처음에는 지방에서 만드는 책이어서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런데 92년부터 7년 동안을 수필가는 물론이고 이름 있는(?) 시인 작가들에게 지속적으로 보냈어요. 점점 관심을 갖는 분들이 늘어나고 또 직접 참여도 해주셔서 오늘의 수필과 비평이 있게 되었지요. 사실 수필과 비평은 다른 출판물을 이어내는 효자예요.”

 

-화제를 좀 돌리겠습니다. 신아의 역사에서 사모님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지역의 문인들 뿐 아니라 신아를 알고 있는 많은 분들 중에는 사모님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많지요.

 

“집사람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신아도 없었을 겁니다. 제가 인쇄업을 시작한 뒤 10년 쯤 지났을 때 스트레스로 심장병을 얻었는데, 그것이 공황장애까지 이어졌어요. 그래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요. 그 틈을 집사람이 모두 해냈습니다. 2004년 암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회사 관리와 운영은 물론 인쇄물 배달까지 다 했어요. 그래서 저보다 집사람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더 많을 겁니다.”

 

- 두 분 모두 등단하셨죠. 글에 대한 관심이 오늘의 신아를 있게 한 힘일 수도 있겠습니다.

 

“집사람은 글쓰기도 그렇지만 문화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문화답사도 즐겼지요. 제가 심장병에 공황장애까지 얻으면서 평생 제대로 여행 한번 가지 못했습니다. 아내와 동백꽃 피면 함께 보러가자는 약속을 했었는데 그 약속도 끝내 지키지 못했어요. 지금껏 일에 파묻혀 사느라 휴가 한번 얻은 적도 없거든요.”

 

-사장님이 걸어오신 길을 돌아보니 온전히 지역 출판을 지키는 일로만 살아오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길을 고집해 오신 이유가 있습니까. 어려움을 만났을 때는 다른 길을 걷고 싶으셨을 텐데요.

 

“걸어오다 보니 돌아갈 수 없어서 인 것 같은데…….(웃음) 제가 80년대 초반에 알게 된 전주의 완판본 역사가 가장 큰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지금껏 완판본의 맥을 잇는다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거든요. 완판본은 정말 위대한 유산입니다. 자산으로도 그렇고 그 의미와 가치로도 비교할 수 없는 자랑스러운 문화지요.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가 위대하지만, 실제로 신분사회였던 봉건시대에 서민들을 일깨운 것은 완판본이란 생각이 들어요. 언젠가 책의 역사를 들여다보니 조선시대 조정에서 실제로는 책을 보급하지 못하게 했더군요. 역관들이 책을 사와 서점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들 중 두 명을 처형을 했다는 기록을 보았어요. 먹물이 들어가면 안 되는 상황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겠죠. 그런 질서를 변화시킨 것이 완판본 아니겠습니까. 오일장에 나가면 완판본으로 제작된 책을 바닥에 펴놓고 팔았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그래서 완판본이 정말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완판본의 역사를 신아가 이어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은 충분 할 것 같아요. 앞으로도 지역 출판을 지켜가야겠다는 힘도 생기고요.”

 

신아는 지역에서는 유례없는 출판사로 꼽힌다. 지금까지 낸 단행본만 4천여 종, 여기에 4개의 문학상과 11종의 정기간행물을 이어가고 있는 신아의 존재는 전주 출판문화의 자존심이 되었다.

 

그가 써온 지역출판의 역사가 이제 더 빛나게 될 것 같다.

 

● 서정환 대표는

 

- 수천종 단행본·정기간행물로 지역출판문화 선도

서정환 대표는 순창 구림면에서 태어났다. 1940년생이니 올해로 일흔 일곱. 물리적(?)으로는 은퇴할 나이지만 그는 지금도 인쇄사와 출판사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현역’이다.

 

그의 아버지는 특별한 직업이 없었지만 할아버지 대에 일군 재산 덕분에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 5남매 중 맏이였던 그는 스스로 알아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덕분에 부모님은 큰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 남아 있던 논과 밭을 팔아 온가족을 이끌고 전주로 나온 것도 큰아들을 제대로 공부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세상 물정에 밝지 못했던 아버지는 집을 사고도 등기를 하지 않아 집값만 날린 채 온 가족을 거리로 나앉게 했다.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신세가 된 가족들을 지키고 먹여 살리는 일은 온전히 큰아들인 그의 몫이 되었다. 나이 스물, 청년가장이 되었다. 방한 칸 없는 형편에 거리를 전전하다 전주역 관사 옆에 땅을 파고 움막을 만들어 일곱 명 가족들이 간신히 정착했다.

 

신문배달부터 돈이 되는 일은 가리지 않고 했다. 성실한 그를 눈여겨 본 민국일보 지사장이 그에게 총무일을 맡겼다. 그즈음 민국일보가 발행하는 사보에 글도 썼다. 1965년 신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총무로 ‘스카우트’ 되어 직장을 옮겼다. 글 쓰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는 신아일보의 주재기자가 됐다. 2년 정도 기자 생활을 했지만 월급 없는 기자보다는 월급 있는 총무가 그에게 우선이었다. 한국일보 지사 총무를 거쳐 다시 신아일보 지사장이 되었다. 지사 운영을 책임 짓고 보니 신문 파는 일만으로는 매월 지대를 챙겨 보내기에도 빠듯해 그만두고 기자들의 권유로 ‘프린트’를 부업으로 삼았지만 곧 작파하고 사진관을 열었다.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로비’를 잘해야 기관이나 단체 일을 맡을 수 있는데 그런 쪽으로는 영 재주가 없었던 까닭이다. 다시 신문사 지사를 맡으면서 ‘프린트’일을 부업으로 삼았다. 내친김에 인쇄소를 본격적으로 차린 것이 1970년, 〈신아문예사〉의 시작이었다. 직접 ‘가리방’을 긁어 등사하는 원시적(?) 인쇄업이었지만 주위의 도움으로 일이 몰렸다. 워낙 맨손으로 시작한 일이라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성실함으로 탄탄히 기반을 다지면서 출판업의 꿈을 키웠다. 그즈음 조선시대 책을 제작했던 전주의 역사적 위상과 의미를 알게 됐다. 1984년 〈신아문예사〉로 출판 등록을 낸 것은 전주를 다시 출판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하는데 역할을 하고 싶어서였다. 이후 5~6년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조금씩 나아져 90년대는 부흥기랄 수 있을 만큼 사업이 번창했다. 〈소년문학〉 〈수필과 비평〉을 비롯한 문예지를 창간하고 단행본을 내기 시작했다. 올해 25년을 맞은 〈수필과 비평〉은 문학의 본격적인 장르로 인정받지 못했던 수필을 독자적 영역으로 자리 잡게 하는 통로가 됐다. 2000년대 인터넷이 일상으로 들어오면서 출판업은 위축되기 시작했다. 지역 출판 상황은 말할 것도 없었다. 경영은 어려워졌으나 기왕 창간한 문예지에 오히려 종합문예지와 다양한 장르의 문예지 창간을 더하고 연구자들의 활동을 북돋는 학술지 출판 지원에도 앞장섰다. 지금 신아의 이름으로 세상에 나오고 있는 정기간행물은 11종. 월간 격월간 계간까지 해마다 신아의 이름으로 나온 수십 권의 문예지와 잡지, 수백 권의 단행본이 독자를 만난다. 지역 출판 역사에 유례없는 궤적이다.

 

47년 〈신아〉의 역사는 2004년 세상을 떠난 아내 황의순씨와 그가 한눈팔지 않고 일궈온 열정의 결실이다. 출판문화의 본고장이었던 전주의 문화사가 〈신아〉의 노정으로 다시 새로운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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