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인사동은 한때 대한민국의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골동품과 화랑과 표구점과 필방, 전통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집중되어 있었던 덕분이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인사동은 변하기 시작했다. 1988년 ‘전통문화의 거리’로 인사동이 지정되면서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한 탓이다. 인사동을 지키고 있던 고서점, 필방 표구점 등 전통문화 상품을 다루던 가게들이 하나둘씩 밀려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이후 20여년, 오늘의 인사동은 값싼 기념품과 온갖 먹거리와 프랜차이즈 업종 가게들이 뒤섞인 정체불명의 거리가 됐다.
그러나 인사동은 여전히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공간의 명맥을 지키고 있다. 자본의 힘에 밀리면서도 끝내 자리를 지키고 있는 토박이(?) 가게들이 아직 적지 않기 때문이다.
‘동양한지’도 그 중 하나다.
1974년에 문을 열었으니 올해로 43년째. 동양한지는 인사동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지업사, 그것도 한지만을 다룬다.
이 가게를 열고 오늘까지 지키고 있는 박성만 사장(68)은 전주가 고향. 아버지 대부터 전주 한지로 인연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로지 한지 판매로만 살아왔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한지 전문가다. 수십 년 한지를 보고 만지고 느끼는 경험의 시간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여주 연구소로 가는 첫째 주와 셋째 주 주말만 빼고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가게에 나오는 박 사장을 그의 오래된 가게에서 만났다. 깊어가는 가을, 평일이었지만 인사동은 젊은이들과 관광객들로 붐볐다. 종로 쪽에서 인사동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있는 그의 가게는 마음먹고 둘러보아야만 찾을 수 있는 작은 공간이다. 인사동에서 밀려나고 있는 토박이 가게들의 현실이 보였다. 그런 마음을 읽었을까. 그가 말했다. “가게는 좁지만 이 안에 대한민국 각지에서 만들어지는 한지는 다 모여 있어요. 그럼 됐지 뭐.”
인터뷰를 하는 동안 서너 명 손님들이 들고 났다. 가게를 함께 운영해온 그의 아내는 일일이 용도를 묻고 짧은 설명을 더한 후에야 종이를 건넸다. 진귀한 풍경이었다.
-가게가 꽤 오래되었나봅니다. 여기서 창업을 하신건가요.
“건물이 낡았지만 장사하는데 특별히 불편함은 없어요. 종이 사고파는데 특별한 시설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요.”
-아버님께서 한지 도매상을 하셨다면 한지를 취급하는 지물포가 꽤 많았다는 이야기겠습니다.
“그렇죠. 당시는 벽지도 그렇고 한지를 많이 썼잖아요. 더구나 전주한지는 이름이 높아 인기가 있었으니 아마 전국적으로도 많이 찾았을 겁니다. 1960~70년대에는 서울의 중앙시장이나 영등포시장에 지물포가 몰려 있었어요. 전주 한지가 많이 올라갔죠.”
-판매는 어땠습니까.
“그때 전주한지라고 하면 화선지 보다는 창호지라고 불렀던 초배지를 알아주었어요. 전주 쪽에서는 포지라고 해서 면 메리야스를 갈아서 만든 초배지를 만들었거든요. 전주에 가면 교동에 천이 있었죠. 옛날에는 그 곳에서 빨래를 많이 했는데, 많이 헤진 것은 버리잖아요. 그것을 ‘넝마주이’들이 주워서 종이를 만드는 공장으로 가져갔어요. 그것을 갈아서 초배지를 만들었죠. 당시는 흙으로 집을 많이 지었는데 그 종이로 초배를 해야 벽지가 뜨지 않았어요.”
-지역별로 만들어진 종이의 특성이 달랐군요.
“초배지로는 전라도는 포지, 경상도는 영덕지를 알아주었고, 일반적으로 쓰이는 초지도 전라도는 소지, 경상도는 살래지, 장판도 전주에서는 전주장판, 경상도에서는 경각장판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져 올라왔어요.”
-이런 종이들을 모두 취급하셨나요.
“그때만 해도 초배지나 장판지가 많이 팔렸어요.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부터 서예 붐이 서서히 일기 시작하더니 화선지를 찾는 사람이 늘더군요. 전주에서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의 화선지가 올라온 것도 그즈음입니다.”
-70년대 중반, 한지 생산이 번성한 것도 그러한 분위기와 연관이 있군요.
“인사동에 지업사가 문을 본격적으로 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니까요. 서울에서도 70년대 초반까지 지물포는 왕십리에 있는 중앙시장이 거점이었어요. 그곳에서 한지 상권도 이루어졌죠. 그러던 것이 70년대 중반부터 인사동으로 한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서예, 동양화 붐이 일어나면서 표구사도 성업을 맞았잖아요. 인사동에 표구사가 들어오니 자연히 한지를 다루는 지물포도 들어오게 된 것이죠.”
-동양한지도 그때 문을 열었습니까.
“1974년에 열었는데, 그때는 가게 이름이 동양지업사였어요. 80년대 들어와 동양한지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한지로 특정하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까.
“이전에는 아무래도 장판이 많이 팔려나가니 장판 위주였어요. 그런데 아파트 문화로 바뀌면서 장판의 수요가 줄고 서예 서화 붐이 일면서 화선지 수요가 급증했거든요. 게다가 한지를 인테리어 용도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아예 한지 쪽으로만 특성화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죠.”
-지업사에서 한지로 특화시킨 것은 잘된 선택이었습니까.
“그때 생각으로는 잘한 일이었는데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라졌죠.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아요. 한지를 특화한 덕분에 한지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되고, 그것이 제 삶의 즐거움이 되었으니까요.“
-한지 수요도 부침이 심할 것 같습니다.
“물론이에요. 70년대와 80년대까지는 전주에도 한옥이 많이 남아 있었잖아요. 그때 당연히 전주에 한지공장이 많았었고, 서예 붐이 일어나 서예학원과 표구사가 성업을 누릴 때 또한 전주의 한지 공장도 전성기를 맞았었죠. 그런데 지금은 서예인구도 줄고 아파트 문화로 한옥이 거의 자취를 감추었으니 한지의 수요가 그만큼 줄어든 것이죠.”
-그런데도 한지로만 가게를 지속 운영해오셨는데요.
“사실 어려운 시기가 있었어요. 학교에서조차 서예 교육이 없어지면서 화선지는 아예 수요가 거의 없어졌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런데 90년대부터 한지로 만드는 공예가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했어요. 2000년대까지는 거의 한지공예로 연명했다 고해도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역시 한계가 왔어요. 지금은 민화 분야에서 한지 수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5~6년 정도 된 것 같은데, 앞으로도 민화에 대한 관심은 10년 정도 더 이어질 것 같아요.”
-그런 흐름이 이제는 다 보이시나 봐요.(웃음)
“50년 가깝게 이 분야에서 놀다보니까 그럴 수밖에요. 더구나 내가 하는 일이란 것이 판매잖아요. 그 흐름이 훤히 보일 수밖에 없어요.”
-여주에 한지공장을 만드신 것도 이러한 흐름을 예견한 결과겠습니다.
“그렇죠. 지금 제 눈에는 앞으로 한지가 어디로 갈 것인가가 보여요. 그러다보니 내가 직접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만들고 싶은 종이를 만들려면 연구소부터 내자고 생각했지요.”
-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한지 수요의 흐름이 그려집니다.
“70~80년대는 서예, 90년대~2000년대는 한지공예, 2000년도가 넘어 가면서 민화, 그 다음은 어떤 것이 올까 생각해보니 한지가 미술의 영역에서 매우 좋은 재료로 활용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어요. 여주연구소에서도 그런 바탕으로 종이를 연구하고 있죠. 최근의 한지 수요, 특히 작가들의 소비성을 보면 그런 예상이 맞는 것 같거든요.”
-회화 등의 미술 재료로 한지 수요가 확대될 것이란 예상은 흥미롭습니다.
“실제로 국내작가들의 한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지만 소비면에서 보면 유럽이나 미국 등 외국의 작가들이 한지를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미술 분야의 경계도 그렇지만 재료의 개념도 없어졌잖아요. 한지는 이러한 과정에서 매우 좋은 재료로 주목받고 있어요. 지금 저희가 연구하고 개발하는 것은 외국의 작가들이 필요로 하는 재료로서의 한지예요.“
-주문이 들어옵니까.
“얼마 전에도 프랑스 작가가 찾아왔어요. 종이 일곱 장을 사러 왔더군요. 원하는 종이가 특수한 것이어서 주문에 맞추어 제작해야하는 것이었어요. 일주일 정도 걸리겠다고 했더니 기다려서 일곱 장을 만들어 가겨갔어요.”
-특별한 주문, 이를테면 맞춤형식의 한지인 셈인데 작가와 장인의 협업으로 종이 한 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니 그 자체로 작품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우리나라의 작가들에 비해 그들은 일반 한지가 아니라 비구상적인 조형성을 갖춘 종이를 원합니다. 우리의 닥으로 만든 종이를 원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겠지요.”
-대량생산을 기대할 수는 없겠지만 한지의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계기로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문제는 이런 종이를 우리 기술자들이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대부분의 기술자들은 거의 60세를 넘은 노인들입니다. 전주의 공장들도 예외가 아닐 것 같은데 이 분들이 대개 종이를 하루에 몇 장 뜨느냐에 따라 임금을 받거든요. 월급이 보장되어 있지 않으니 연구는 그만두고 종이만 떠내는 통꾼이 되는 겁니다.”
-지금 처한 현실로 보자면 숙련된 기술 경험 노하우를 전수하는 일이 중요하겠군요. 여주연구소에서는 종이 장인들이 어떻게 일합니까.
“자기만이 갖고 있는 장점을 살려낼 수 있는 종이를 만들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 공장에서는 일반 한지는 생산하지 않고 고급지 특수지 같은 것을 만듭니다.”
-어떤 종이들인가요.
“일단 맞춤형 종이가 그렇고요. 지금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아주 얇은 특수지 제작입니다. 우리의 귀한 유물을 보존하는데 꼭 필요한 종이가 있어요. 예를 들면 옛 그림을 잘 보존하고 싶은데 그것이 오래되어 바스러진단 말이죠. 찢어지기도 하고요. 표구 작품이라도 그것을 다시 표구 기술만으로 복원하고 보존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그런데 원화가 그대로 드러나 보일 정도로 얇은 한지가 있다면 그 위에 배접을 할 수 있으니 보존성이 높아지겠지요. 이런 한지를 기록이나 문서 보존에 활용한다면 몇 백 년 지나도 훼손될 염려가 없을 겁니다.”
-한지의 값도 수요를 늘리는데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까. 특히 수입지가 아닌 국산한지는 가격이 높은데요.
“우선 닥의 가격이 천지차이거든요. 놀라시겠지만 국내산 닥은 톤당 1억 원이 넘습니다. 지구상에 종이를 만드는 원료가 이렇게 비싼 경우는 없을 겁니다. 모조지나 이런 것은 펄프가 100만원도 안 될 거예요.”
-그럼에도 국산 닥으로 만든 종이를 찾는 것은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 아닌가요.
“물론입니다. 그만큼 종이의 품질이 좋다는 것이죠. 사실 국내산 닥으로 만든 한지는 보존성, 광택성, 강도와 미세함 등 모든 면에서 현저하게 다릅니다. 토질과 기후가 다르니 조건이 다른 곳에서 자란 닥나무의 성질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이런 특성이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겠느냐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기후의 온난화를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실제로 우리나라도 기후 온난화로 닥섬유질의 특성이 북상하고 있거든요. 섬유질이 굵어진다는 이야기인데 이제는 경기도 양주 포천 쪽으로 닥나무 재배가 옮겨져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연구가 좀 더 긴밀하게 이루어질 필요가 있겠습니다.
“사실 한지 산업을 살리기 위해서는 정책적으로 이런 기본적인 문제들이 연구되고 대안이 마련되어야 합니다. 한지 생산은 결국 닥의 문제인데 한지 관련 정책 대부분이 근본적인 문제보다는 피상적인 문제에만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연구자들도 자료에 의존해 연구하다보니 현실과는 동떨어진 결과를 내놓기도 하고. 안타까운 일들이 참 많습니다.”
-전주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전주한지의 우수성은 다들 인정하는데 산업으로 발전시키는데는 아직 한계가 적지 않은 것 같은데요.
“전주한지의 우수성을 지키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수성을 내세우는 것만으로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전주 한지의 환경과 현실을 냉정하게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주에는 아직도 한지를 만드는 공장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공장들이 대부분 비슷한 종이를 뜹니다. 고급지나 특수지에 대한 관심이 적은 것이죠. 같은 종이로 경쟁하는 일은 가격 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어려운 환경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지금 닥나무 원료는 물론이고 한지까지도 태국이나 중국에서 어마어마한 물동량이 한국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한지는 한통을 떠도 팔 곳이 없다는데 이러한 현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결국은 차별화를 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소비자는 다른 곳에 있는데 아직도 일반적인 한지 생산에 몰두하고 있다면 그 끝은 뻔 한 것 아니겠어요.”
전주한지 이야기가 나오자 박 사장의 얼굴은 굳어졌다. 그는 ‘전주한지’의 브랜드를 살리려면 해결해야할 과제가 적지 않다고 지적하면서도 끝내 말을 아꼈다. 50년 가까운 세월, 한지 수요의 최전선 현장을 지켜온 그의 눈에 비친 전주한지의 현실이 더 궁금해졌으나 여전히 일상에서 멀어져 있는 한지의 현실을 보면 답이 따로 없겠다 싶었다.
누구나가 한지를 만들 수 있는 체험공간을 늘리고 맞춤형 한지를 만드는 일에 나선 그의 작업은 그래서 더 기대가 된다.
● 박성만 사장은
- 종이 장인들과 옛 기록 보존할 탁월한 한지 개발 시작
박성만 사장은 전주가 고향이다. 완산동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주에서 살았다. 위로 형이 있었지만 6.25때 세상을 떠나 장남이 됐다. 한지 위탁 판매를 업으로 삼았던 그의 아버지는 전주한지를 비롯해 전라도의 종이를 생산자로부터 가져다 지물포에 넘겨주는 이른바 도매상이었다. 별도의 가게를 열지 않고도 서울의 중앙시장과 영등포시장에 한지를 넘겨주는 아버지의 사업 덕분에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지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를 다녀온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한지는 유행을 타지 않는다. 혹시 한지가 제때 팔리지 않아 오래 묵혀둔다 해도 도침의 효과가 있으니 더 좋은 종이가 된다’며 재고가 없는 한지 판매업을 권했다. 당시 아버지의 사업은 순조로웠다. 아버지의 거래처를 파악하고 인수하는 일부터 나섰다. 정작 거래처를 돌아다녀보니 아버지가 남겨놓은 빚이 적지 않았다. 그 빚을 정리하는 데만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처음에는 혼자서 서울을 오르내리다가 자리가 잡힐 즈음 가족들을 모두 서울로 올라오게 했다. 아버지의 영향이 컸지만 짧은 시간에 적지 않은 지물포와 신뢰를 쌓게 됐다. 1974년 인사동에 동양지업사란 이름으로 가게를 냈다. 당시 골동품상 화랑 표구사 지업사 등이 물려있던 인사동은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가게 운영은 금세 자리를 잡았다. 80년대에는 아예 가게 이름을 동양한지로 바꾸었다. 한지만 판매하는 가게로 특화시키고 싶었다. 서예 대중화로 전주의 한지 공장들이 번성기를 맞았을 때였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점차 서예인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자연히 판매 규모가 위축됐다.
한지의 앞날이 훤히 보였다. 생활환경이 바뀐 다해도 한지의 쓰임은 건재 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지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한지를 만드는 일에 나선 것은 그 때문이었다. 여주에 공간을 마련해 연구소를 열었다. 한지를 만드는 장인들을 불러 종이를 연구하는 일이 시작됐다. 사라져가는 진짜 장인들의 기술을 살려 그들의 기술로 좋은 종이를 만들어내는 일이 그의 목표가 됐다. 그중에서도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제작에 나선 종이가 있다. 옛 기록들을 보존할 수 있는 얇고 탁월한 한지다. 이제 시작단계지만 그는 충분한 가능성을 확신한다.
한지를 판매하는 일로만 45년, 온갖 종이를 다뤄온 그는 굳이 만져보지 않아도 한눈에 좋고 나쁜 종이를 가려내고 누가 어떻게 만든 종이인가를 분별해낸다.
맞춤형 한지의 미래를 기대하고 있는 그는 첫째 주와 셋째 주 주말이면 여주의 공장을 찾아 직접 특수지를 실험하고 제작도 한다.
큰아들이 기꺼이 동행에 나선 덕분에 그의 한지업은 3대로 이어지는 가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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