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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의 궤도: 전라선 철길 답사기 ⑫ 주생역·옹정역] 자물쇠 채운 간이역, 가을도 떠나가네

배치간이역으로 시작한 주생역, 산업화 후 쇠퇴 / 이정표 하나 없는 옹정역, 시설물 있던 흔적만

어쩜 저렇게도 물이 곱게 들었을까, 감탄사를 숨길 수 없었다.

광한루원 담장 너머로 뻗어 나온 나뭇가지, 그 가지마다 피어있는 노랗고 빨간 이파리들이 무척 매혹적이었다.

그 아래로는 색이 바랜 낙엽들이 모여 일종의 카펫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남원의 가을도 절정을 지나던 11월 17일.

취재팀은 요천을 따라 남서쪽으로 달렸다.

 

▲ 지난 11월 17일, KTX-산천 열차가 주생역을 지나고 있다. 권혁일 기자

△ 녹슨 레버와 풀벌레의 시간, 주생역

첫 대면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둘러보니 왠지 모를 기시감이 느껴졌다.

남원시 주생면 제천리 주생역.

언덕 위에 앉은, 붉은 벽돌을 둘러 입은 밋밋한 한 일(一)자 건물이, 앞서 찾았던 서도역과 매우 닮은꼴이었다. 비어있는 역사를 철도 궤도 공사 관련 업체가 사무실로 활용하고 있는 것도 닮았다.

역 건물에서 굳이 다른 점을 찾아본다면, 건물 정면에 붙어 있는 역명판의 모양이 다르다는 정도일까? 서도역은 반달 모양, 주생역은 직사각형.

‘외부인’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은 없었다. 맞이방과 매표소 입구는 퍼즐 맞추듯 여러 판을 이어 붙여 못질해둔 탓에 깔끔하게 막혀 있었다.

 

▲ 주생역 전경. 권혁일 기자

 

▲ 주생역사로 들어가는 문은 판자로 막혀 있다. 권혁일 기자

주생역은 1933년 10월, 남원~곡성 구간이 개통될 때 배치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금지역과 전남의 곡성역이 ‘동기’다.

개업 7년 뒤인 1940년에는 보통역으로 승격됐는데, ‘개업 동기’들과 비교하면 곡성역은 처음부터 보통역이었고 금지역은 1980년에야 보통역이 되므로 딱 중간 정도 갔다고 보면 되겠다.

수송 실적도 특출난 편은 아니었다. 제대로 된 건물조차 없던 옹정역에도 한때 밀릴 때가 있었고, 화물 취급 실적도 남원역이나 곡성역과 비교하면 대단치는 않았다. 그 사이 남원역과의 사이에 상동역이라는 간이역이 하나 잠깐 생겼다 사라졌다.(1966년~1977년)

 

▲ 주생역 승강장에서 역사를 바라본 모습. 권혁일 기자

도시와 가까운 곳에 있는 농어촌 역들이 다들 그렇듯이, 주생역 또한 산업화 이후 쇠퇴의 길을 걸었다.

결국 2004년 7월 15일, 여객 취급 중단의 칼을 맞았다. 전라선 복선화에 따라 선로가 이설되면서 역사가 다시 지어진 것이 2004년 8월 5일인데, 그러니까 역사의 맞이방과 매표소는 열리기도 전에 그 용도를 잃은 셈이다. 봉천역이나 산성역과 비슷한 운명이다.

여객 취급 중단 직전인 2003년 한 해 이용객은 모두 487명. 하루 평균 두 명도 되지 않는 실적이었다.

주생역은 이후 2007년 1월 1일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돼 현재에 이른다.

 

▲ 주생역의 굳게 잠긴 ‘나가는 곳’. 권혁일 기자

승강장에서 북동쪽으로 시선을 옮기면, 과거 철도 차량들이 밟았을 측선들이 몇 가닥 얽혀 있는 모습이 보인다. 동행한 코레일 관계자는 ‘통운 적하장선’이라고 불렀다.

“여기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있다”며 관계자가 취재팀을 이끌었다. 바로 사람 손으로 직접 움직이는 수동식 선로전환기(전철기)였다.

사람이 레버를 조작하면 그 힘으로 선로가 움직여 열차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데, 주생역의 수동식 선로전환기는 레버 하나에 분기기 두 개가 맞물려 움직이게 돼 있었다. 그 사이를 기다란 금속 축이 잇는다.

 

“이제는 다 기계식을 쓰지, 수동식은 안 쓰죠. 수동식은 저기 경기도 의왕 철도박물관에나 있을랑가.”

 

▲ 이것은 기계로 움직이는 선로전환기다. 권혁일 기자

 

▲ 이것은 수동식 선로전환기다. 권혁일 기자

 

▲ 수동식 선로전환기를 조작하는 레버. 이것을 조작하면 선로를 움직일 수 있다. 김태경 기자

 

▲ 분기기 두 개가 이렇게 막대 같은 것으로 연결돼 있다. 레버를 조작하면 두 곳이 함께 움직이는 구조다. 권혁일 기자

 

▲ 움직여 본 지 얼마나 됐을까? 분기되는 선로에 풀이 자라고 있었다. 권혁일 기자

 

▲ 철도 관계자가 수동식 선로전환기 레버를 조작해보고 있다. 권혁일 기자

 

▲ 지난 11월 17일, 주생역 구내의 녹슨 수동식 선로전환기 위에 풀벌레가 앉아 있다. 김태경 기자

 

그가 체중을 실어 레버를 잡아당기자 레일이 들썩거렸다. 선로 끝 편에 앉아 멀뚱거리고 있던 초록색 풀벌레 하나가 이에 박자를 맞추듯 수풀 쪽으로 풀썩 뛰어 사라졌다.

 

“녹슬어서 잘 움직이지도 않네. 허허. 그래도 옛날엔 다 이렇게 인력으로 했다고.”

그러는 동안, 저쪽 본선으로 KTX 한 편성이 쌩하고 지나갔다.

 

▲ 지난 11월 17일, 주생역 구내에 남아 있는 수동식 선로전환기 너머로 KTX-산천 열차가 지나고 있다. 권혁일 기자

 

△ 뼛속까지 간이역, 옹정역

‘역’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건물은 물론이고, 그 흔한 이정표나 간판 하나 찾아볼 수 없었다.

주생역에서 남서쪽으로 3km, 그냥 봐선 단순한 철길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옹정역이 있었다.

굳게 잠긴 문을 열고 콘크리트 구조물을 밟아 올라가면 곧바로 승강장이 나온다. 건물이 없으니 매표소도 맞이방도 없고, 역무원실도 없다. 정말로 ‘간이’역, 그 자체다.

 

▲ 지난 11월 17일 찾은 옹정역. 저 잠긴 문을 열고 올라가면 나오는 승강장이 이 역의 전부다. 권혁일 기자

 

▲ 어딜 봐도 보통 떠올리는 '역전' 풍경은 없다. 권혁일 기자

시꺼멓게 때가 탄 보도블록은 군데군데 이가 나가 있다. 역명판이나 벤치는 물론 찾아볼 수 없고, 다만 과거에 어떤 구조물이 있었던 흔적만 남아 있다. 옛날에는 이 자리에 시내버스 정류장을 닮은 승객 대기 공간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남아있는 흔적을 보고 그 모습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승강장은 측선 하나 없이 상하행 본선에 직접 닿아 있다. 본선 가운데에는 기둥의 밑동 비슷한 것이 보인다. 선로를 넘어 다니는 것을 막기 위해 설치한, ‘중앙분리대 비슷한 것’이 있던 흔적이다.

 

▲ 옹정역에는 역사도, 승객 대기 공간도 이젠 남아 있지 않다. 버스정류장을 닮은 승객 대기 시설이 있던 흔적만 이렇게 하행 승강장에 남아 있다. 권혁일 기자

 

▲ 옹정역 플랫폼 가장자리에 남아있는, 과거 울타리가 있었던 흔적. 권혁일 기자

승강장의 바깥쪽에도 울타리가 있었던 흔적이 있다. 출입을 막기 위해 쳐놓았던 것일 터다. 사람뿐 아니라 고라니와 같은 동물들을 막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로드 킬’은, 물론 인간 때문에 제 터전을 잃고 배회하다가 치여 목숨을 잃는 동물들에게도 슬픈 일이지만, 고속으로 달리는 열차들에게도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란다.

동행한 철도 관계자는 “열차가 지나갈 때 풍압이 매우 강하기 때문에 안전을 위해 구조물들을 모두 철거했다”고 말했다. KTX가 시속 170km로 통과하는 구간이어서 승강장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 옹정역 플랫폼 모습. 권혁일 기자

위로 주생역, 아래로 금지역을 끼고 있는 옹정역은 지난 1959년에 역무원 무배치 간이역으로 문을 열었다. 남쪽에 금지역이 따로 있지만, 따지고 보면 오히려 금지면사무소와 파출소, 보건지소를 모두 끼고 있는 옹정역 인근이 금지면의 중심지에 더 가깝다.

옹정역 이용객이 금지역 이용객보다 많은 시절도 있었다. 철도통계연보에 따르면 1978년 한 해 옹정역을 이용한 승객이 15만3109명이었는데, 그해 금지역 이용객 수는 10만819명이었다.

그러나 이 황금기는 얼마 못 가 끝난다. 불과 5년 뒤인 1983년, 옹정역 이용객 수는 3분의 1도 안 되는 4만4001명으로 주저앉는다. 같은 해 금지역은 5만4954명이 이용했다.

1975년 8956명이었던 금지면의 인구는 1980년 7344명, 1985년 6087명으로 빠르게 줄어들었다. 자동차가 늘어나고 버스가 편리해졌으며 빨라진 열차는 사이사이 작은 역들을 건너뛰었다.

 

▲ 지난 11월 17일, 옹정역의 빈 플랫폼을 KTX 한 편성이 스쳐 지나가고 있다. 권혁일 기자

 

▲ 지난 11월 17일, KTX 열차 한 편성이 옹정역을 지나 북쪽으로 달리고 있다. 권혁일 기자

이 모든 현상이 합쳐져, 앞서 주생역이 그랬던 것처럼 옹정역 또한 2004년 7월 15일에 여객업무를 손에서 놓는다.

복선화로 훨씬 빨라진 전라선 선로 곁에, 아무도 이용하지 못할 승강장만 8월 5일에 새로 깔렸다.

/권혁일·김태경 기자

● 4·19 혁명의 불꽃은 여기에…김주열 열사의 고향 옹정리

 

▲ 옹정역 플랫폼에서 바라본 금지동초등학교. 권혁일 기자

옹정역 플랫폼에 올라서서 동네를 내려다보면, 가을걷이가 끝나 한적한 들녘과 비닐하우스 무리 너머로 금지동초등학교가 한눈에 오롯이 담긴다.

옹정역에서 무척이나 가까운 이 학교는 1960년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항거하다 숨진, 그리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모교이기도 하다.

김주열 열사는 남원 금지면 옹정리에서 태어나 금지동초를 졸업(6회)하고 1956년 금지중학교에 진학한다. 3년 뒤 중학교를 졸업, 1년 재수 끝에 경남 마산상업고등학교의 합격 소식을 안고 정든 고향집을 떠났다.

그렇게 뜨거운 꿈을 찾아 나선 열일곱 고등학생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나갔다가 이승만 정권이 쏜 최루탄에 맞아 싸늘하게 식은 주검이 되어 고향 땅에 돌아왔다.

 

▲ 금지동초등학교로 들어가는 길목에 세워진 "김주열 열사 모교" 비석. 권혁일 기자

금지동초등학교로 가는 길목에는 학교명과 함께 ‘김주열 열사 모교’라고 큼지막하게 적힌 비석이 서 있다. 어른 키만 한 비석 양 옆면에는 열사의 생애와 업적이 기록돼있다. 운동장 한편에서는 모교 후배들이 ‘우리 선배 김주열’을 그리며 하늘에 올리는 절절한 추모곡도 볼 수 있다.

 

▲ 금지동초등학교 교문 옆에 마련된 김주열 열사 추모 공간. 권혁일 기자

옹정삼거리로 나와서 ‘김주열로’로 명명된 도로를 타고 북쪽으로 잠깐 달리면, 열사가 잠들어 있는 묘와 그 묘 아래에 조성된 추모공원이 나온다. 추모공원은 남원시가 2006년부터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것으로, 지난해 12월 완공됐다.

 

▲ '김주열로'로 명명된 도로. 지도 상 이름은 '요천로'다. 권혁일 기자

 

▲ 남원시 금지면 고 김주열 열사 추모공원. 권혁일 기자

 

▲ 지난 11월 17일,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김주열 열사 묘역. 김태경 기자

추모각과 기념관 문은 평소에는 잠겨 있다. 들어가 보려면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남원시청 주민복지과나 금지면사무소에 연락하면 된다.

/김태경 기자

 

▲ 일러스트=이권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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