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진행중 누교 유구 확인…백제 돌가공 기술 흔적 간직 / 견우 직녀 전설 담긴 오작교…춘향과 몽룡 얘기도 더해져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취객이 다리를 더 잘 건넌다”, “다리 아래서 원을 꾸짖는다”, “십 리에 다리 놓았다”, “언다리에 빠진다” 등 예로부터 다리에 대한 속담은 많은 의미를 지닌 채 전해지고 있다.
그 중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란 말은 매사에 신중하고 안전하게 행동하라는 교훈을 담고 있지만, 한편으로 돌다리(石橋)가 그만큼 튼튼하고 안전하다는 이면의 의미를 품고 있기도 하다. 다리는 인류 역사의 시작부터 다양한 재질과 형태로 발전해왔지만, 우리 선조들은 단단한 돌다리를 가장 바람직한 다리의 재질로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반영구적으로 오랫동안 남아있기를 원하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동네 냇가를 건너기 위해 디딤돌을 듬성듬성 놓았던 징검다리에서부터 석재를 길게 걸쳐 놓은 듯한 널다리나 교각이 반원형을 이루게 하여 구름다리처럼 만드는 등 돌다리는 석재의 특성과 축재기술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모양이 어떻든지 간에 대부분 돌다리를 만들기 위한 석재는 주변에서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돌이 재료가 되기 마련인데, 익산의 황등을 비롯하여 석재가 풍부했던 우리 지역은 돌다리의 가설 여건이 좋아 돌다리의 옛 흔적은 물론이고 관련된 이야기가 진하게 남겨져 있는 곳이다.
삼국시대 뛰어난 석공 기술을 지녀 신라로 뽑혀가 불국사 석가탑을 건설했다던 백제인 아사달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추고천황 20년(612년)에 백제의 토목기술자인 노자공이 일본에 건너가 현재 일본의 3대 기물의 하나인 오교(吳橋)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인의 석공기술과 다리 축조기술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에는 현존하는 백제 다리가 없는 것으로 오랫동안 알려져 왔으나 발굴 진행 중인 익산 미륵사지에서 다리 유구가 조사되면서 백제시대에 남겨진 다리에 대한 귀한 흔적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다리 유구는 익산 미륵사지의 강당터(講堂址) 중심축 사상에서 북측 승방터(僧房址)와 금당 사이를 잇던 것으로, 석조 다리 위는 목로 회랑으로 추정되며 교각은 4개소인 누교(樓橋)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누교는 옛날에 존재했던 다리 형식으로 다리 위에 누각이 있거나 다리 전체가 회랑식 건물로 되어 있어 다리를 덮고 있는 형태를 띠었다고 한다. 미륵사 누교는 백제시대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할 때 함께 가설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리의 연결과 정자 역할을 함께 하며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월랑의 누교로 보인다. 아직은 그 모습을 추측만 할 뿐이지만, 백제의 우월한 아름다움과 기막힌 기술을 미륵사지의 바른 복원과 함께 재현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듯 백제인의 돌 가공에 대한 우월한 기술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 있는 익산의 백제 다리가 있는가 하면, 남원에는 조선시대 세조 때 가설된 오작교(烏鵲橋)가 이야기를 품고 지역과 역사를 이어주고 있다. 오작교라고 하면 음력 7월 7일 칠석날에 견우와 직녀의 상봉을 위해 까마귀와 까치가 모여 만들어준다는 은하수 다리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작교는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인용한 다리가 전라북도 남원에 석재 다리로 실존하고 있다. 남원 광한루원에 있는 오작교가 주인공으로 춘향전(春香傳)에서 춘향과 이도령이 사랑을 속삭인 바로 그 장소이기도 하다.
오작교가 놓인 남원 광한루원의 역사는 조선시대 황희(黃喜)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온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원에 온 황희는 주변을 거닐다가 풍광이 아름다운 곳을 발견하고 조그마한 누각을 지어 이름을 광통루(廣通樓)라고 하였고, 이후 1444년(세종 26)에 하동부원군 정인지가 이곳 누각에 올라 “호남의 승경이로다. 달나라에 있는 궁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가 바로 이곳이 아닌가?”라며 감탄한 데서 그 이름을 광한루(廣寒樓)라고 바꿔 부르며 오늘에 이르렀다. 광한루 탄생 이후 오작교는 남원부사 장의국이 광한루를 수리하면서 주변에 물을 끌어다가 누 앞에 은하수를 상징하는 큰 연못을 만들고 견우와 직녀의 전설이 담긴 석교를 가설하면서 생겨났다. 오작교는 화강암을 가공하여 4개의 홍예(무지개 모양의 아치)를 석축으로 길게 쌓아 연결하였는데 그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1872년(고종 9)에 전라도 남원부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채색지도 《남원부지도》에는 화려한 색상과 정교한 표현으로 당시 남원 주변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는데 지도 정중앙 읍성의 남문(우측 방향) 밖에 광한루와 오작교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어 아름다운 모습을 전하고 있기도 하다.
남원부(南原府)에 광한루(廣寒樓)가 있고, 그 밑에 오작교(烏鵲橋)가 있는데, 그 고을의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다. - 강희맹, 『해동잡록』(1670년)
교룡성 북쪽 산은 창 모양 같고 / 蛟龍城北山如戟
오작교 남쪽 강은 비단 같구나 / 烏鵲橋南水似羅
- 이덕무, 『청장관전서(1795년)』
광한루와 오작교는 이곳을 거쳐 간 선조들이 그 풍광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옛글로 앞다투듯 남겨 놓았다. 광한루는 정유재란 때 불타 1626년에 복원되었지만, 돌을 주재료로 쓴 오작교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아름다운 모습에 더해 오작교가 더 귀한 것은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는 덕분일 것이다. 은하수를 건널 수 없어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연인들이 일 년에 오직 하루, 까마귀와 까치가 만들어주는 다리를 건너 만나게 되는 재회의 희망과 기쁨, 그리고 다시 헤어져야만 하는 슬픔. 하늘길을 이어주는 견우와 직녀 사이의 다리는 신분의 도랑을 뛰어넘어 두 사람을 이어주는 이도령과 성춘향의 사랑과 흡사하기도 하다. 오작교는 이제 견우와 직녀, 춘향과 이도령의 사연이 덧대어져 부부가 같이 건너면 금슬이 좋아진다는 전설이 되어 과거와 현재를 이어준다.
이처럼 다리는 필요에 의해 공간을 잇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져 사람과 사람을, 시간과 시간을 연결하는 이야기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 지금은 옛날 선조들이 생각하지도 못했던 고군산의 바다에도 섬과 섬 그리고 지역과 사람을 잇는 해상교량들이 세워지고 있다. 그 일대를 누비었던 최치원 선생과 이순신 장군과 석재 기술자인 아사달도 지금의 고군산도를 이어주는 다리를 보면 세상이 개벽한 일이라 여겼을 것이다. 시간을 내어 다리로 건널 수 있는 고군산도도 찾아가 보고, 덜 복원되어 상상 속에 존재하는 익산 백제 다리와 현존하는 남원 조선 다리가 남긴 흔적을 찾아보면 어떨까. 아직도 건재하게 남아 아름다움을 이어주는 오작교에 대한 문헌 속 이야기를 찾아 선비들의 마음과 사랑 이야기도 살펴보고, 옳게 복원되기 위해 천천히 시간을 되돌리는 과정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거기에 상상 속에서만 맴도는 미륵사지의 아름다운 다리에 대한 이미지를 지금의 정보통신기술을 빌어 재현하여 백제시대의 선조들이 전하는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빨리 체험할 수 있으면 한다. 그리고, 돌다리에 대한 속담을 되새기며 여유가 있는 이들에게는 조심조심 돌다리를 두드려 가며 행보하는 것이 당연한 세상살이 처신이겠지만 두드려볼 틈도 없이 급히 다리를 건너야 하는 이들에게 튼튼한 다리가 되어주는 것 또한 여유 있는 사람들의 책임이 아닌가 싶다. 최명희 작가의 혼불에 나오는 징검다리처럼 디딤돌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며 한 해를 소중한 마음으로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머무는 곳을 소중하게 알아야 한다. 고을이건 사람이건 바로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내가 만난 이 순간의 사람이 내 생애의 징검다리가 되는 것인즉.”·- 최명희 『혼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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