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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늙음에 대하여

늙음은 공평하고 누구에게나 같다 부끄러움 아니다

▲ 객원논설위원

12월 중순의 추위가 맵다. 눈도 몇 차례 내렸다. 한 해를 돌아보며 옷깃을 여미는 계절이다.

 

흔히 노년은 이맘때 같은 겨울에 비유된다. 춥고 쓸쓸하고 어둡다. 하지만 겨울은 여름날 우거진 숲에서 보이지 않던 게 드러나 보이는 때이기도 하다. 산등성이와 허리, 계곡의 구분이 뚜렷하고 나무의 거친 피부까지 눈에 들어온다. 인생의 겨울인 노년은 어떨까. 먼저 간 선현들이 늙음을 어떻게 보았는지 살펴보는 것도 흥미 있을 듯하다.

 

200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로마의 웅변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는 노년이 비참해 보이는 이유로 4가지를 들었다. 첫째 노년은 우리를 활동할 수 없게 만들고, 둘째 노년은 우리 몸을 허약하게 하며, 셋째 노년은 우리에게서 거의 모든 쾌락을 앗아가며, 넷째 노년은 죽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키케로는 이런 이유들이 과연 타당한가고 묻는다. 결론은 포도주가 오래 되었다고 모두 시어지지 않듯, 늙는다고 모든 사람이 비참해지거나 황량해지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이 땅, 한반도에서 살았던 선조들은 어떨까. 실학의 2조(二祖)였던 성호(星湖) 이익과 3조(三祖)였던 다산(茶山) 정약용의 시문을 보자. 성호는 300여 년 전 신체적 노화가 한 순간에 닥침을 깨달았다. “흰머리와 어두운 눈이 순식간에 도래(頭白眼暗須臾到)한다”고 했다. 출셋길을 포기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던 성호는 고질병에다 말년에 귀까지 들리지 않았다. 그는 노인의 열 가지 좌절(老人十拗)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낮에는 꾸벅꾸벅 졸음이 오고 밤에는 잠이 오지 않으며, 곡(哭)할 때는 눈물이 없고 웃을 때는 눈물이 흐르며, 30년 전 일은 모두 기억되어도 눈앞의 일은 문득 잊어버리며,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 들어가는 것 없이 모두 이 사이(牙縫)에 끼며, 흰 얼굴은 도리어 검어지고 검은 머리는 도리어 희어진다”고 했다. 성호의 제자 안정복은 갑자기 찾아오는 노화를 “형세가 비탈을 내려가는 것과 같아서 돌이키기 어렵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선현들에게 늙음이 꼭 슬프고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압권이 조선 500년 최고의 학자로 꼽히는 다산의 ‘노인일쾌사(老人一快事)’다.(박혜숙, 다산 정약용의 노년시) ‘노인에게 한 가지 유쾌한 일’이라는 이 시는 갑작스럽게 닥치는 노화에 대해 통쾌하게 반격을 가한다. 다산은 18년 간의 강진 유배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 71세에 이 시를 지었다. 그리고 4년 후에 작고했다. 앞서 다산은 58세에 수염과 머리가 서리처럼 희었다고 고백한다. 71세에는 거의 대머리가 되었고 치아도 남김없이 빠졌다. 외모만 변한 게 아니라 병도 잦아졌다. 근력이 약해져 발을 다치기도 하고 60대 후반에는 120일간이나 아파 누웠다. 그런 그가 6수로 이루어진 연작시를 통해 노인에게 유쾌한 일 6가지를 제시했다.

 

노인이 되어 대머리가 된 것, 이가 모두 빠진 것, 눈이 어두운 것, 귀가 먹은 것, 마음 내키는 대로 미친 듯 시를 쓰는 것, 때로 벗들과 바둑을 두는 것이 그것이다. 대머리가 돼 머리를 감거나 빗질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고, 이가 모두 빠져 치통이 사라졌고, 눈이 어두워 책을 보거나 학문연구를 하지 않아도 되고, 귀먹어 세상의 온갖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늙음은 도둑처럼 갑자기 찾아온다. 실제는 천천히 진행되는 것이지만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 이때 충격으로 우울감에 빠지기도 한다. 당나라 시인 두목(杜牧)의 말처럼 늙음은 공평하다(白髮公道). 살아 있는 자 누구에게나 똑같이 온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젊음을 예찬하지만 늙음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영국시인 셀리의 서풍부(西風賦)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를 실없이 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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