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기 문신이자 학자인 퇴계 이황(1051~1570) 선생이 전북 부안 실상사와 직연폭포(현 직소폭포), 마천대를 제목으로 지은 시가 공개됐다. 이는 <퇴계선생문집 별집> 에 수록된 시로 도산서원 이동구 별유사가 전북향토문화연구회 이치백 회장에게 내용을 전달하면서 공개하게 됐다. 조선시대 대유학자인 퇴계 이황이 부안에 관해 남긴 귀중한 자료다. 퇴계선생문집>
이치백 회장은 “ <부안군지> 에도 이규보(1168~1241), 이매창(1573~ 1610), 신석정(1907~1974) 등의 시는 실려있으나 퇴계 이황의 시는 찾아볼 수 없다”며 “약 450년 만에 빛을 보게 된 소중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부안군지>
이 시는 퇴계 선생이 부안 변산을 직접 유람하고 지은 시는 아니다. 이동구 별유사는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광산(光山, 현 광주시 광산구)에 살았던 칠계 김언거(1503~1584) 선생이 변산을 유람하고 시를 지어 퇴계 선생에게 보내니, 그 운자를 사용해 답시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아쉽게도 칠계 선생의 원운시는 찾지 못했다.
퇴계 선생과 칠계 선생에 관한 기록은 1544년 7월 22일 칠계 선생이 금산부사로 부임해 송별하는 시가 처음이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며칠 후 칠계 선생이 풍기에 찾아와 하루를 묵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칠계 선생은 퇴계 선생보다 나이는 3살이 적고, 문과 급제는 3년 먼저 했다.
이동구 별유사는 “ <퇴계선생 문집> 에 칠계 선생과 관련된 시가 20제이고, <칠계유집> 에 퇴계 선생의 시 22제와 간찰 1편, 칠계 선생이 퇴계 선생에게 드린 시 2제가 실려 있다”며 “따로 두 분의 관계와 당시 영호남의 교류에 대해 추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칠계유집> 퇴계선생>
경북 안동 출신인 퇴계 이황(1051~1570) 선생은 조선시대 중기 문신이자 학자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 등을 지냈다. 퇴계 선생은 풍기군수로 부임한 후 나라에 건의해 우리나라 최초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을 만들기도 했다.
實相寺南溪韻(실상사 남계 운)
千古名山斷俗埃 천고의 명산이 속세의 티끌을 끊었으니
得君街償寄山隈 그대의 칭찬은 산모퉁이에 붙여두네
水經寶地全然潔 물은 사찰 있는 곳을 지나니 더없이 깨끗하고
雲向叢林別樣堆 구름은 총림을 향해 다른 모양으로 뭉쳤구려
瘦竹微吟閒遶石 파리한 대는 낮게 읊조리며 돌을 막아 둘러있고
淸尊高興晩登臺 맑은 술에 흥이 돋아 늦게야 대에 오른다
從來造物嫌多取 원래 조물주는 많이 갖는 것을 싫어하니
莫把風烟騁逸才 세상을 쥐고 뛰어난 재주를 펼치지 마소
直淵瀑布韻(직연폭포 운)
白練橫飛翠障圍 흰 명주가 가로 날려 푸른 장벽을 둘렀고
劈開山骨滅雲肥 산 바위가 쪼개져서 구름이 살찌는 것을 덜었구나
漲時河落深春地 넘칠 땐 은하수가 깊은 학으로 떨어진 듯하고
急處雷奔下激磯 빠른 곳은 번개같이 물가 돌을 내려치네
何許靈源連海窟 어디쯤에서 靈源이 바다 굴로 연했을까?
幾多餘沫散林霏 수두룩한 남은 거품 林 로 흩어진다
雄觀未遂罏峯勝 웅장한 향로봉의 승경을 아직 구경 못했으나
且向玆山欲拂衣 또 이 산을 향해 옷소매를 털고 싶어라
摩天臺韻(마천대의 운)
但警海闊與山崇 다만 바다 넓고 산 높음에 놀랐으니
誰識元初辦結融 누가 원초의 신비로움을 깨달았을까
日月低垂氛翳絶 해와 달 낮게 드리워 가 끊어졌고
靈仙遊集瑞光叢 신선이 모여노니 瑞光이 결집한 곳
胷襟浩氣三杯後 가슴 속의 호기는 三杯 후에 떠오르고
羽翼培風六月中 깃날개로 바람타고 유월 중에 오르네
矯首西雲無計往 머리 들어 서쪽을 봐도 갈 계책이 없는데
因君豪句喜披蒙 그대의 좋은 글귀 때문에 어둠을 깨우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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