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돌아가시고 읽은 편지들 아프지만 아름답다고 생각했죠 / 아빠의 부재, 엄마의 부재로 연결…아이들 기억 남기는 것 의미있어 / 민청련 2세·가족사 정리 기록해 역사로 남게하는 일 꼭 해내고파
영원한 민주주의자 고 김근태의원(1947~2011)이 부인 인재근씨(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와 주고받은 옥중편지를 모은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 (알마)가 출간됐다. 김근태 의원의 6주기를 맞아 그의 딸 병민씨가 기획하고 직접 글을 써 엮은 책이다. 젠장>
책이 출간된 지난 연말엔 추모전 <따뜻한 밥상>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도 열렸다. 김근태를 기리는 전시와 출판은 한 사람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사람들이 끈끈한 연대로 되살려내는 또 하나의 기록이자 역사였다. 따뜻한>
전시 마감을 하루 앞둔 12월 28일, 맹렬한 추위는 시간을 더하며 더 치열해졌으나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 전시장이 된 낡은 공간은 <따뜻한 밥상> 으로 관객들의 추위를 덜어주었다. 따뜻한>
전시를 기획하고 편지를 책으로 펴낸 김병민씨(37)를 전시실에서 만났다.
두 시간 남짓, 감옥에서 스스로를 치유하며 힘을 얻어 다시 일어섰던 ‘민주주의자 김근태’를 편지로 만나는 일은 다시 새로웠다.
-전시장 분위기가 따뜻합니다. 추모전 주제가 ‘따뜻한 밥상’이어서인가요. 겨울의 냉기를 온기로 바꾸어주는 특별한 감흥이 있군요.
“주제도 그렇지만 공간이 갖고 있는 특별한 역사와 분위기가 추모전의 의미를 더해준 덕분인 것 같아요. 전시장이 된 <보안여관> 은 1936년 시 동인지 <시인부락> 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고 1942년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는 여관으로 기능을 했었던 곳입니다. 이 공간의 역사나 담고 있는 이야기가 기억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갖고 있죠. 그런 점에서 전시회의 의미와도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시인부락> 보안여관>
-이번 추모전에 참여한 작가들은 어떤 인연이 있습니까.
“이전 추모전부터 참여해 오신 분도 있고 새롭게 합류하신 분들도 있는데 <근태생각회> 에 참여하고 계신 기획자 박계리 선생님이 전시에 맞게 작가를 섭외하셨어요. 제가 직접 나서서 섭외하는 일은 쉽지 않거든요. 이를테면 유족인 저에게는 거절하고 싶어도 쉽게 못하게 되는……. 그래서 박 선생님이 먼저 전시의 취지를 설명하시고 승낙을 하시면 제가 그때부터는 진행하는 형식이었어요.” 근태생각회>
-업무 분담을 아주 잘하셨군요. 작가들도 부담스럽지 않았겠구요.(웃음) 추모전을 해마다 해온 것은 아니죠.
“2014년에 처음 연 이후 두해 연속 전시를 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2016년에는 못했어요. 모든 공력을 전시기획에 다 쏟아 부어야 하니까 여러 가지로 버거웠어요. 그래서 전시를 격년으로 하는 것으로 정하고 대신 공연과 번갈아서 추모행사를 하기로 했죠.”
-이번 주제는 여러 가지로 그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오던데요. 김 의원님이 주창하셨던 ‘따뜻한 시장경제’와도 맞닿아 있고요.
“ ‘따뜻한 밥상 ‘은 어느 한사람을 추모하는 것만이 아니라 김근태가 가고자 했던 정신을 보여주고자 기획한 전시였습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의 길을 끝내 지켰던 운동가들 뿐 아니라 자신들의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지켜온 수많은 분들을 초대해 함께 위로 받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준비한 자리였어요.”
-말씀 하신 것처럼 특별한 역사를 가진 이 공간을 전시장으로 선택한 것도 궁금했었습니다. 일반인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곳은 아닌데요.
“전시장으로서는 그렇지만 공간의 역사성으로 해외에서도 주목받는 공간이어서인지 많은 분들이 다녀가셨어요. 사실 추모전은 이번이 세 번째인데 전 정권에서는 전시장을 얻기 쉽지 않았어요. <김근태 추모전> 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을 텐데, <보안여관> 은 그런 점에서 감사하죠. 전시장 대관은 지난 정권 때 이미 이루어졌는데 오히려 관심을 보이고 받아들여 좋은 전시로 이어질 수 있게 됐어요.” 보안여관> 김근태>
-이 기사가 전시가 끝난 뒤 나가게 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이제 시한의 경계가 없는 책이야기를 해보죠. 이번에 낸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 ‘란 책 제목이 우선 흥미로웠습니다. 직접 기획하고 글도 쓰셨더군요.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른이 되어 편지를 읽으니 어릴 때와는 그 느낌이 달랐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다시 읽게 된 편지는 더 고통스럽고 아팠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 편지들이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감옥 안에서 스스로를 치유하면서 가족과 사회를 걱정하는 마음이 주는 울림이랄까. 그래서 편지를 공유하고 싶었어요. 이전에 옥중서간집이 나오긴 했는데 절판 됐거든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책도 함께 펴내자 싶었죠. 아버지의 편지 중에는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 뿐 아니라 동지들에게 보낸 편지나 자신의 철학과 신념을 담아낸 편지도 많아요. 그중에 제가 다룰 수 있는 편지만을 추렸어요. 가족적이었던 아버지와 남편으로서의 김근태는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거든요.”
-편지의 대부분이 일정한 시기에 집중되어 있더군요. 옥중편지가 중심이어서 그렇겠지요?
“85년과 86년, 그리고 91년. 그 시기가 옥중에 계셨던 시기예요. 85년에 위기를 느끼던 전두환 정권이 학생운동이 거세지니까 그 주범을 민청련으로 지목해 의장을 맡고 있던 아버지를 구속한 것이거든요. 그때 남영동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하시고 감옥으로 옮겼는데 바로 그 다음부터 접견 금지 처분을 받아 3개월 동안 아무도 만날 수 없었어요. 몸도 정신도 망가진 상태에서 편지만 오간 것이죠. 85년 말부터 86년까지의 그 겨울이 가장 힘드셨을 거예요. 엄마랑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스스로 치유하려는 의지가 특히 많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거예요.
- <엄마 인재근> 은 그동안 편지를 안보여 주셨다면서요. 엄마>
“처음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기획을 하다 보니 편지란 오고 가는 것인데 왜 엄마 편지는 없을까 궁금했어요. 엄마를 설득해 침대 뒤에 숨겨두었던(?) 편지다발을 받았죠. 두분이 주고받은 편지를 읽으면서 이것이 ‘김근태 인재근의 문제만이 아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민주화 운동을 하고 감옥에 가셨던 분들의 가족을 그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힌 ‘남편과 아빠의 삶’ 못지않게 ‘아내와 자식들의 삶’도 기다림의 고통과 고난에 놓여있는데 왜 그들의 이야기는 잊혀야 하는가, 뭔가 억울한 생각이 들었어요. 아버지와 엄마의 편지를 함께 엮은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들여다보면 역사의 중심에 섰던 분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조명 받지만 가족들의 이야기는 묻히는 경우가 많죠.
“그래서 ‘이건 엄마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시대를 함께 살아낸,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던졌던 분들을 옥바라지 했던 아내와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엄마를 설득했어요. 감옥살이를 해야 했던 분들의 삶 뿐 아니라 밖에서 옥바라지하는 가족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더 치열하고 고통스러운 경우가 많거든요. 저만해도 아버지의 편지가 굉장히 고통스럽고 안쓰럽다는 마음이 들지만 엄마 편지는 제가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그런지 고통과 연민이 더 깊은 공감으로 와 닿더라고요.”
-어머니의 편지는 소소한 일상을 통해 남편 대신 가장이 된 아내, 엄마로 살아가는 치열함이 묻어나더군요. 그래서 울림이 더 컸습니다.
“제가 엄마와 주고받은 편지를 함께 엮은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어려운 시절,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내던졌던 분들의 뒤에는 가족들이 있었다는 것, 그들의 삶도 기록되고 기억되어야 한다는 것, 그런 생각이 절실하게 와 닿았거든요.”
-김 의원님과 함께 활동했던 민청련 인사들의 가족들과는 교류가 있습니까.
“물론이지요. 민청련 활동을 함께 했던 분들의 자녀들과 꾸준히 만나고 있어요. 저희는 우리 스스로를 민청련 2세라고 부릅니다.(웃음) 대부분이 비슷한 기억을 공유한 친구들이예요. 어린 시절, 감옥에 있는 아빠를 면회 가고 농성장에서 머리띠 두르고 피켓 들고 있었다거나 하는 경험의 공유죠.”
-동질감 같은 정서가 있겠습니다.
“그렇죠. 저도 그렇지만 말로는 쉽게 설명하지 못할 ‘트라우마’ 같은 것이 있어요. 엄마와 아빠가 부재했던 그 시간들에 대한…….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은 어떻게 살았는가를 제 이야기를 통해 전하고 싶었습니다.”
- ‘따뜻한 밥상’에 초대하고 싶었던 분들이기도 했겠습니다.
“맞아요. 연결되는 지점이 있죠. 사실 글을 쓰는 과정을 통해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것이 주는 위안이 있잖아요. 이런 것들을 계기로 엄마들의 이야기라든지 본인의 이야기든지 전시가 되었든 책이 되었든 어떤 매체가 되었든 뭔가 하나씩 풀어내는 것이 앞으로 살아갈 날에 있어서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거대한 영웅적 서사가 아니더라도 그 시간을 함께 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기억되는 그런 사회가 좋은 사회가 아닐까요. 그래서 그 친구들에게 우리가 뭐라도 해보자고 북돋고 있어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아빠 엄마의 부재’란 표현이 각별한 의미로 읽혀집니다. 편지에도 그런 시간들에 대한 절절함이 담겨 있더군요.
“ ‘아빠의 부재’는 곧 ‘엄마의 부재’로 이어지죠. 엄마는 남편 대신 가족을 돌봐야하는 가장이 되어야 하니까요. 제 경우는 큰집 사촌 언니와 오빠들이 부모님 부재의 시간을 채워주었어요. 사랑도 많이 받아 충분히 충족되었죠. 다른 친구들 중에는 아예 한동네에 모여 살면서 공동육아처럼 자란 경우도 많아요. 여러 사람의 손을 빌어 다양한 방식으로 자란 셈이죠. 그 시절, 아이들의 기억을 기록하는 것도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가족들의 생계가 아니라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자신을 내던진 아빠와 엄마의 부재를 받아들여야 했던 그 시간들이 억울하진 않나요.
“이제 철이 들어서…….(웃음). 어렸을 때는 세상의 주류가 운동권인줄 알았어요. 누구나 전두환 독재 투쟁을 하며 사는 줄 알았죠. 학교에 가서도 당당했어요. 우리 아빠가 지금은 감옥에 있지만 옳은 일을 하다가 들어갔다고 친구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다닐 정도였으니까요.”
-김 의원님은 독재정권의 핍박을 받은 대표적인 운동권 인사였지만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들어섰고, 보사부장관으로 일했습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민주화 투쟁의 시간이 이어낸 결과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버지의 부재가 길었던 어린 시절 경험으로 저는 제가 비주류 약자라고 생각하고 자라왔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언젠가 ‘아빠는 다른 사람에 비해 보상을 많이 받았다’고 말씀하셨어요. 당시에는 그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민청련 2세 친구들을 만나면서 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게 되었어요. 제가 누리고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깨닫기를 바라셨던 마음을 이제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민청련 가족들의 기록을 기획하는 것도 그 때문이겠군요.
“그 시절의 시간이 민청련 출신 인사들의 것만이 아니고 가족들의 것이기도 한데 왜 그들의 이야기는 묻히거나 숨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인 것이죠. 이번 전시부터 기획의 단초를 열고 싶었어요. 이부록씨의 <필사적 필사> 가 대표적인 예인데, 민청련 가족들의 ‘옥중 편지’를 모아 관람객들이 그 중 마음에 담은 글을 쪽지로 보내면 작가가 그것을 나무에 인두로 새기는 작품이었어요. ‘사라지지 않는 역사’로 기록하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죠.“ 필사적>
-앞으로 하실 일이 더 많아졌겠습니다.
“12월이 가까워지면 아버지가 그리워 울기도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추모의 방식으로 아버지를 기억하고 많은 분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합니다. 그 시절 자료를 정리하고 추모 사업을 진행하면서 해야 할 일이 늘어나 무겁기도 하지만 민청련 2세들과 가족사를 정리하고 기록을 만들어 역사로 남게 하는 일은 꼭 해내고 싶습니다.”
전시회를 돌아보고 책을 읽으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신념으로 지켜내고자 했던 <김근태의 정신> 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 80년대 엄혹한 시절, 자신을 내던져 민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없었어도 대한민국의 오늘이 왔을까. 치열했던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시간을 소환해낸 김근태의 옥중편지가 그 답을 준다. 김근태의>
옥중에서 주고 받은 가족사랑의 편지
●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 내용
김근태 의원 6주기를 맞아 펴낸 <젠장 좀 서러워합시다> (알마)는 1978~1991년 김 의원이 아내 인재근씨, 그리고 아들 병준 병민과 주고받았던 편지를 묶은 책이다. 젠장>
김근태와 아내 인재근의 연애시절부터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아빠에게 편지를 쓸 수 있을 만큼 자랄 때까지의 시간을 담은 이 책은 모두 김근태가 옥중에 있을 때 가족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이다.
“생각해보면 당시 민주화운동의 대부라 해서 우린 아빠 나이가 아주 많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고작 서른아홉이었어요. 지금 우리와 같은 나이였죠. 이미 가정을 이뤄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안정적인 삶에 대한 고민이 많았겠지요. 매 순간마다 망설였을 거예요. 아내와 아들, 딸을 챙기고 사랑해주었던……. 그래서 더 두려웠을 거예요.”
어린 시절 ‘아빠와 엄마의 부재’를 경험했던 병민씨는 이제 아이의 엄마가 되어보니 아이들 곁에 있어주지 못했던 부모님이 얼마나 안타깝고 고통스러웠을까를 알게 됐다고 말한다.
부부가 주고받은 편지는 ‘힘들 때마다 위로 받을 수 있는 보물 같은 유산’이 된 것이다.
사실 김근태의 편지는 90년대 초 발간된 서간집으로 공개된 적이 있지만 인재근의 편지가 알려지는 것은 처음이다.
병민씨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편지들 중에서 아내와 아이들을 향한 애절한 사랑을 담은 편지만을 가려 책을 엮으면서 편지는 주고받는 것인데 왜 ‘엄마의 편지’는 없는지 궁금했다. 꽁꽁 숨겨놓았던 엄마의 편지를 읽고 나서는 이 편지들이 김근태 인재근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민주화 인사들의 가족들을 위해서도 주고받은 편지를 엮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빠의 것은 감옥에 갇혀 고통의 상처를 치유하고 사색하며 보낸 편지라면, 엄마는 밖에서 육아 전쟁, 군부 독재와의 전쟁, 옥바라지라는 전쟁을 치루는 내용의 편지’였다는 병민씨는 ‘두 분의 편지 내용은 우리들이 자라나는 역사이기도 하다’는 생각으로 엄마를 설득해 책을 엮었다.
영원한 민주주주의자이자 남녀평등주의자였던 그의 철학과 정신을 그대로 보여주는 김근태의 편지 속 언어들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그를 다시 만나게 하는 새로운 통로다.
병민씨는 이 책을 엮어내며 이렇게 썼다.
‘지난 겨울 100만 촛불은 광화문에 모여 있었다. 광장의 공기는 따뜻했다. 감동이었다. 그러나 먼저 간 등대지기의 불빛은 여전히 서울구치소 차가운 감방 안에서 쏘아 올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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