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박하고 친근한 모습에 마을 안내판·이정표 활용…재앙 막는 수호신 되기도…지역마다 형태·역할 다양 / 시간 흐르고 시대 변하며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조상들 품은 믿음과 가치 장승의 모습으로 전해져
“아이고 이것이 웬일인가, 나무하러 간다더니 장승 빼어 왔네 그려. 나무가 암만 귀하다 하되 장승 패어 땐단 말은 언문책(諺文冊) 잔주(注)에도 듣도 보도 못한 말. 만일 패어 땠으면 목신동증(木神動症), 조왕동증(竈王動症) 목숨 보전 못 할 테니 어서 급히 지고 가서 선 자리에 도로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眞言)치고 다른 길로 돌아옵쇼.”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여섯 마당 중 한 작품이기도 하고, 남원 출신의 명창 송흥록이 특별히 잘 불렀다고 전해지는 판소리 《변강쇠가》 속 한 대목이다. 가루지기타령, 횡부가라고도 불리는 이 사설은, 주인공 변강쇠가 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나무 대신 장승을 빼어온 것을 보고 부인 옹녀가 놀라 내뱉는 말이다. ‘목신동증’은 나무 신이 노해서 얻는다는 병이고, ‘조왕동증’은 부엌 신이 노해서 얻는다는 병인데, 벌을 받기 전에 장승을 어서 되돌려 놓으라는 부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장승을 패어 불을 피웠던 변강쇠는 결국 전국 장승들의 저주를 받아 온갖 병을 얻고 장승처럼 서서 죽게 된다. 장승 설화를 일부 근원설화로 하는 변강쇠가는 지리산에 있는 남원시 산내면이 그 배경으로 알려져 있다. 변강쇠가에 등장한 나무 장승뿐만 아니라 우리 지역에는 특별한 장승들이 남아 있다.
주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졌던 장승들은 마을이나 절 입구, 고개 등지와 길가에 세워져 도로 위 이정표나 마을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했다. 어찌 보면 무섭고 근엄하기도 하고, 한없이 천진하고 인자해 보이기도 하는 장승은 세밀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에 의해 툭툭 쳐내듯 만들어져 투박하고 친근한 모습이다. 이 같은 장승은 마을의 안팎을 구분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마을 밖에서 들어오는 재앙을 막아주는 신령한 수호신이었다.
지금에야 장승이라는 말로 통일해 부르지만 조선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 長承)’ 등으로 썼고, 지역에 따라 장성·장싱·장신, 벅수·벅슈·벅시·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수살막이·수살목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렀다.
장승이라는 말의 어원은 1527년 최세진이 한글로 해석한 한자 사전 『훈몽자회』에서 ‘후(堠)’를 설명하면서 ‘‘댱승 후’라 기록하였으며, 이 ‘댱승’이 ‘쟝승’에서 ‘장승’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벅수 등의 말은 호남과 영남지방에서 불리었던 것으로, ‘바보’나 ‘눈치 없는 사람’의 뜻으로 쓰여지기도 했다. ‘멍하니 장승처럼 그저 눈치 없이 서 있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으로 ‘벅수 이빨을 세면 벅수가 된다’란 속담이 있고 ‘벅수같이 서 있다’란 말이 남아있다. 또한, 수살 등의 이름은 장승을 세워서 마을 안으로 들어오는 살(煞)인 나쁜 재액을 막아 준다 하여 붙인 말로, 민속문화 형태로 천하대장군, 지하대장군이 남성, 여성 형태의 장승과 벅수로 오늘날 일부 전해지고 있다.
최초의 장승은 선인의 얼굴을 새긴 원시 신앙물로서 유목 생활과 농경문화의 소산으로 파악되지만, 실제 역사적 유래는 몇 가지 설이 존재한다. 분명하게 추측되는 것은 일종의 수호 신상으로서 공통적 염원을 담은 상징이 되어오다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들어 불교의 영향으로 사찰의 장생표(長生標)로 사용되었다 한다. 전해지는 기원 중 신라시대 소지왕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신라 21대 왕인 소지왕이 역참(驛站) 제도의 일환으로 나라의 땅과 길을 과학적으로 관리하며 안전한 길을 안내하고 알려주기 위한 푯말로서 장승을 5리 또는 10리마다 세웠다는 것이다. 그 밖에 조선시대에는 『경국대전』에 의하여 중국에서 길을 통해 들어오는 좋지 못한 귀신을 막고자 십 리마다 세운 이정표에 무서운 얼굴을 새기고 장생이라 한 것 등 장승의 기원에 대한 여러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양한 역할을 담당한 장승은, 그 역할 구분에 따라 다르게 불리었는데 마을의 이정표나 안내판 구실을 했던 장승은 노표장승이라고 하였고, 농경과 수렵 및 땔감을 얻는 땅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세운 장승은 경계표 장승이라고 했다. 방위신 역할을 했던 방위 수호 장승이 있으며, 성문 앞에 세워 성문을 지키는 역할을 했던 성문 수호 장승도 있다. 마을 입구에 세워 역병과 재앙을 막았던 장승, 고을과 마을의 지맥이나 수구가 허한 곳을 다스리기 위해 세웠던 읍락 비보 장승이 있으며, 신령한 기운을 품고 제사를 지내거나 소원을 비는 신앙의 대상이었던 장승과 사찰 입구에 세워 경내의 청정과 존엄을 지켰던 불법 수호의 장승도 있다. 산천 비보라고 하여 풍수도참설에 의한 국기의 연장과 군왕의 장생을 기원하기 위해 사찰 주위에 세웠던 장승은 얼굴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장승은 그 역할이나 지역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어찌 보면 못생기고 투박한 모습이지만 우직하고 나름의 멋을 지닌 장승들은 당시 민중의 모습을 표현한 듯하다. 제주도의 돌하르방의 얼굴과 비슷한 모습이 여러 돌장승에서 언뜻 보이기도 하는데, 지리산 기슭 남원 운봉 서천리에 자리한 돌장승은 마을의 수호신으로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중요 민속자료 제20호)이라 새겨져 있는데, 세모꼴 벙거지 형상에 둥근 눈망울, 주먹코와 합죽이 모양의 다문 입 등 그 표정이 천진하다.
진서대장군은 1989년 도난을 당했다가 되찾았다 하는데, 목이 부러져 연결해 놓은 자국으로 인해 부부싸움을 했다는 설과 두 장군이 싸우다 목이 부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산내면 실상사의 석장승(중요 민속자료 제15호)도 남원을 대표하는 장승이다. 조선시대 영조 1년인 1725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장승으로 높이 250㎝~290㎝가량에 통방울눈에 주먹코를 하고 커다란 귀에 벙거지를 쓴 익살스러운 모습의 장승이다. 원래는 실상사를 지키는 상징적인 장승으로 절로 가는 냇가에 세워진 두 쌍의 돌장승으로 네 개가 있었으나 한 개가 1936년 홍수에 유실되는 바람에 현재 세 개만 남아있다.
장승촌과 장승축제가 이어져 오는 순창에는 특별한 장승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순창 충신리 장승(중요 민속 문화재 제101호)은 높이 180㎝로 한 면만 다듬어 장승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머리는 왼쪽으로 경사지듯 깎여 있고 다른 장승에 비해 작은 눈을 하고 턱 아래에 가슴의 흔적인 듯한 조각이 특이하다.
순창의 북쪽을 지켜주던 남계리의 장승(중요 민속 문화재 제102호)은 높이 175㎝로 연지 곤지를 찍은 듯한 둥근 점이 볼에 있고, 양미간에는 불상의 눈썹 사이에 있는 백호를 조각하였고, 메롱 하듯 혀를 내밀고 웃는 모습이 해학적이다. 장승의 콧날이 뭉툭하게 잘려져 있는 것은 장승의 코가 아들을 낳는 데 효험이 있다고 믿은 까닭에 떼어진 흔적으로 보인다. 충신리와 남계리에 있던 두 장승은 2004년도에 순창문화회관으로 옮겨져 전해지고 있다.
장승은 여러 가지 역할과 모습으로 조상들의 삶과 정서를 다양하게 표현하였다. 그러나 장승은 역참제도가 폐지된 이후부터 점차 소멸되었는데,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개화의 바람이 불면서 그저 미신과 구습의 하나로 치부되면서 생명력을 잃어갔다. 하지만, 장승이 예전처럼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신이자 신앙의 대상이 아닐지는 몰라도, 민속문화의 상징으로 서민을 대변하는 조상의 얼굴인 것은 변함없다. 장승의 역할과 상징은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점차 사라져가고 있지만, 과거 조상들이 품었던 믿음과 가치는 선조들의 손길이 스민 장승의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절절한 기원의 마음이 담긴 채 우리를 너그럽게 바라보며 지켜주는 장승을 지역의 자원으로 잘 전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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