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4-12-11 20:36 (Wed)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기획 chevron_right 이 사람의 풍경
일반기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윤명로 서울대 명예교수 "자연을 상실한 시대, 본질 찾고 지키는 정신성이 예술의 힘"

기술적 재료·방식 지나친 의존땐
전통적 가치 소홀히 다뤄져 경계
내게 있어 그림 그리는 과정은
곧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
예술, 방법론 빠지면 그대로 ‘끝’
독창성 고수 어렵지만 지향해야

▲ 윤명로 교수가 서울 평창동 자택에 있는 작업실에서 작품을 구상하고 있다

제 2차 세계대전의 참상이 휩쓸고 지나간 유럽에서 한창 부상하고 있던 미술운동이 있었다. 엥포르멜(Informel). 미술가의 즉흥적이고 격정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비정형의 추상미술을 지향하는 운동이었다. 1950년대 후반부터 시작됐던 우리나라의 추상주의 미술운동도 이러한 흐름에 힘입어 동력을 얻었다. 60년대 초반, 한국미술의 진보적 세대들이 주도했던 모던아트협회, 현대미술가협회, 60년 미술가협회, 악튀엘(Actuel) 등 젊은 작가들이 의기투합했던 그룹들이 주도하는 도도한 물결은 한국화단에 변혁의 시대를 열었다.

그 중심에서 활동하면서 한국화단의 불필요한 권위를 없애고 미술의 본질에 천착하며 추상미술과 판화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오늘에 이르게 한 작가가 있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인 윤명로 서울대 명예교수(82)다.

정읍에서 태어나 전주시 동산동에서 성장기를 보낸 윤 교수는 팔십이 넘은 지금도 새로움을 향한 창작정신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구축해나가는 화가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가장 한국적인 정신, 전통적인 정서를 독창성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에 몰두해온 그를 만났다.

융합의 시대, 디지털과 미디어가 홍수를 이루고 온갖 언어와 다양한 소재들이 예술의 옷을 입고 쏟아지는 이 시대에 여전히 미술의 본질에 천착하며 추상화 한길로 60년을 걸어온 그의 작업과 삶이 궁금했다.

작업실이 함께 있는 그의 자택은 서울시 종로구 평창동에 있다. 1976년, 오직 아름다운 전경에 마음을 빼앗겨 지었다는 이 집은 200년쯤 된 소나무 한그루를 중심에 두고 ㅁ자 형식으로 자리 잡은 주택이다. 덕분에 이 집에 들어서면 회랑 형식의 마루를 따라 걷는 어느 공간에서나 이 오래된 소나무를 바라볼 수 있는데, 그 장중함과 아름다움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느끼게 한다.

소나무와 벗해온 까닭일까. 굽은 선까지도 도도한 소나무처럼 윤 교수가 걸어온 길 또한 도도하고 아름다웠다.

-집이 참 아름답습니다. 평창동에서도 꽤 위쪽에 자리 잡은 이유가 있겠지요.

“그때는 평창동이 주거단지로 막 개발되기 시작한 때였어요. 오가는 것조차 불편하기 짝이 없을 때였는데, 소나무며 아름다운 산경이 마음을 붙잡았어요. 벌써 40년이 넘었습니다.”

-정읍에서 태어나셨지만, 전주에서 성장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을 하셨는데 이사를 참 많이 다녔어요. 오형제 모두 태어난 곳이 다를 정도였으니까요. 함경도와 평안도 쪽에 살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다시 전주로 이사를 와서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았어요. 고향인 셈이죠.”

-동산동에 대한 기억이 많으시겠군요.

“좋은 기억도 많지만 격변기에 겪었던 이념의 갈등이 제게는 아주 깊은 상처로 남아 있어요.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었을 만큼…….”

-교수님의 정신에 깊은 흔적으로 남아 있는 대상이 궁금합니다.

“초등학교 5학년으로 기억하는데, 마을에 있던 밤나무 옆 분뇨통에 빠져 있는 죽은 사람을 보았어요. 인민군이 몰려오자 동네 청년 몇몇이 완장을 차고 돌아다녔는데 사람을 죽인 것도 그들이 한 짓이라는 것을 알게 됐죠. 더 기가 막힌 것은 그 뒤 수복이 되어 유엔군이 들어오자 완장 찬 사람들이 반대로 바뀌더라고요. ‘이념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내 그림에는 절대 이념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화가의 길을 가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었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그림 잘 그린다는 칭찬을 받았어요. 사범학교를 다녔는데 미술선생님이 미술대를 가라고 권하셨죠. 부모님이 반대하셨지만 서울로 올라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서울대 시험을 봤어요.”

-대학시절에 국전에 특선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는 국전이 화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등단 통로였지요.

“맞아요. 그래서 기성작가들이 몰렸어요. 대학생은 출품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학 3학년 되던 해에 자격이 확대되어 출품했는데 특선을 한거예요. 갑자기 유명해졌지요.(웃음)”

-국전 특선으로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셨는데, 그즈음 왜 반국전 운동을 시작하셨습니까.

“교수님도 특선에 머물면 안 된다며 계속 출품하라고 강권하셨는데, 국전의 권위와 잘못된 질서가 저함심을 갖게 했어요. 당시 홍익대 미대가 막 문을 열었었는데 그 덕분에(?) 미술계에 두 개의 파벌이 생겼어요. 심사를 어느 쪽이 맡느냐에 따라 심사결과도 한쪽으로 쏠리는 겁니다. 수상의 등급에 따라 그림과 작가의 서열이 정해진다는 것도 너무 싫었고요. 그래서 만든 것이 ‘60년 미술가협회’입니다. 홍익대와 서울대 졸업생들을 규합해서 반국전 운동에 나선 것이죠. 시청 앞 돌 다방에 모여 선언서를 만들고 덕수궁 담에 전시를 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야외전시였죠.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때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던 선생님들이 대부분 오신 거예요. 어찌 보면 자신들을 향한 반발과 저항이었는데 오히려 격려하고 새로운 흐름을 지지해주신겁니다.”

-힘이 낫겠습니다.

“화단의 주목을 받게 되면서 우리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자성이 일었어요. 정작 그림이 퇴행하고 있다는 반성이었죠. 그래서 스스로 해산하자 했어요. 당시 현대미협이란 단체가 있었는데 우리 윗세대 화가들이 참여하는 진보적인 그룹이었어요. 세계적인 현대미술 흐름을 들여다보면서 앞서가는 작업을 하던 분들이었는데, 저희와 지향이 맞아 ‘악튀엘’이라는 단체를 결성해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국전 특선으로 이름을 알렸지만 어떻게 보면 화가로서의 본격적인 등단은 ‘벽전’이나 ‘악튀엘전’이라고 봐야할 것 같군요.

“맞습니다. 한국 추상미술을 일으키는데 이 두 단체의 역할이 적지 않았거든요. 우리 미술사에서도 꽤 의미 있는 운동이었습니다.”

-교수님의 판화 작업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습니까.

“60년대 중반 즈음입니다. 63년 5인 판화전을 처음 가진 이후 국제비엔날레에 참여하기 시작했으니까요. 국제성을 깨닫게 된 것도 그즈음인데 당시 한국에서는 판화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던 때예요. 인구도 아주 미미했고요. 다양한 기법을 섭렵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죠.”

-판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실 기회가 있었습니까.

“이화여고에 있을 때 판화가협회를 만들었어요. 68년이죠. 당시 해외 명작을 볼 수 있는 기회가 거의 판화를 통해 이루어졌어요. 그래서 판화를 시작했는데, 기법이 실크스크린에만 거의 의존할 수 밖에 없었죠. 자연히 다양한 기법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는데 기회가 찾아왔어요. 록펠러 재단 지원으로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에서 판화를 공부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에칭(동판화) 리도(석판화) 기법을 모두 섭렵해 한국에 돌아와서는 판화를 대중화하는데 나설 수 있었어요.”

-대학에 판화과가 생기고 국제공모전도 만들어진 것도 교수님의 판화운동이 큰 역할을 했겠습니다.

“69년에 이화여고를 그만두고 서울대 판화교수로 자리를 옮기면서 더 열심히 판화운동을 했어요. 돌아보면 그즈음 판화가 전성기를 맞았던 것 같아요. 70년 국제동아판화비엔날레를 만든 것도 판화 발전에 큰 힘이 되었고요. 아쉽게도 중간에 문을 닫았지만 동아판화비엔날레 덕분에 중국이나 일본의 판화가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갖게 되었죠.”

-국제공모전은 그 뒤 이어지지 않았습니까.

“동아는 그렇게 끝나버리고 그 뒤에 공간사를 운영하던 건축가 김수근씨에게 미니어처 판화비엔날레를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캐치플레이스를 내세웠죠. 10센티의 소품이 중심이 되는 형식이었는데 ‘텐바이텐’의 판화를 공모한 겁니다. 그렇게 시작을 했는데 세계 각국에서 응모작이 몰려왔어요. 간편하게 참여할 수 있었으니까요. 공간사의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도 그 덕분이었습니다.(웃음) 작은 것에 주목했던 80년대였어요. 그 이후 미니어처 판화전이 열리기 시작하더군요. 지금 판화의 위상을 들여다보면 오랜 시간을 낭비한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우리 화단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주고 우리 화단이 성장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었다는 자긍심도 갖게 됩니다.”

-화제를 좀 바꾸겠습니다. 교수님은 ‘전통’을 작가들이 외면해서는 안 되는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꼽으시던데요. 이즈음의 환경은 어떻게 보십니까.

“안타까운 현실이지요. 창작의 영역에서 전통적인 방법은 귀하게 지켜져야 할 대상입니다. 지나치게 기술적 재료들이나 방식에 의존하면서 전통적인 것의 가치들이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이 있어요. 저는 지금도 캔버스에 작업을 합니다. 물론 한지나 다른 재료도 활용하지만 기본은 늘 캔버스예요. 그런데 그 캔버스를 구하기 쉽지 않습니다. 요즘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 않기 때문이에요.”

-작년 가나아트에서 열린 회고전도 그렇고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에 소개됐던 작품들이 화단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방식을 외면했던 젊은 세대들에게도 자극이 되지 않았을까요.

“디지털과 미디어에 지나치게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 그림을 그리는 것의 의미, 그 과정의 가치를 전할 수 있었다면 좋겠어요. 시간이 나면 여행을 떠나는데 세계의 변화하는 환경을 보고 오면 우리만의 독창성에 대해 더 강한 의지를 갖게 됩니다. 요즈음은 그림을 너무 손쉽게 그리는 것 같아요. 이른바 현대를 디지털 노마드 시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 해도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몽고의 유목민들이 사막을 헤치고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서였거든요. 현대의 디지털 노마드도 그런 정신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전통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요즈음 새롭게 시작하신 작업에 빗자루가 등장했던데요.

“아주 재미있는 작업이에요.(웃음) 쓸림의 형태가 매우 흥미롭지요. 화폭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표현해나가는 과정이 새로운 즐거움을 줍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만나고 발견하시는군요. 그러한 형식에 궁극적으로 무엇을 담고 싶으신지요.

“나는 전부터 구체적인 형상이 아닌 추상의 세계를 담아 왔어요. 산속에 부는 바람소리를 그리고 싶고 바람을 타고 흐르는 향기를 그리고 싶었죠.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이랄 수 있습니다.”

-사고의 폭을 넓혀야만 그런 대상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젊은 세대들에게는 쉽지 않은 과제일 것 같습니다. 미술 환경의 변화도 그렇고요. “지금은 비엔날레가 아니고 옥션과 아트페어의 시대죠. 미술시장의 경계가 정해져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돈을 목적으로 하는 것들이죠. 민낯으로 드러나는 것만이 우리 앞에 놓여있습니다. 저는 이런 환경을 현대미술의 정점이자 최고의 약점으로 봅니다. 그래서 ‘크리에이티브란 것은 무엇인가’를 더 고민하게 됩니다.”

-교수님에게 그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림은 예나 지금이나 내 정신의 흔적이에요. 실재하거나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것이 삶과 자연의 본질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양인들은 장점이 있어요. 서양 사람은 개구리를 보면 잡아다가 해부부터 하지만 우리는 연잎을 생각하거든요. 단순한 비교지만 그런 정신성이 우리가 지켜야할 가치입니다.”

윤 교수가 인터뷰 말미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얼마 전 그의 작업실을 찾은 시카고 대학의 큐레이터가 그가 새롭게 만난 작업 도구인 빗자루를 가져가겠다고 했단다. 그가 관심을 보인 이유를 생각해보니 ‘빗자루’가 그들에게는 특별한, 우리만의 도구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지향해야 할 것은 독창성입니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물론 그것을 지키고 또한 그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떤 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신성으로 지킬 수 있어요. 예술은 방법론에 빠지면 끝납니다.”

원로화가가 젊은 세대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다는 이야기다.

● 윤명로 교수는 - 한국 판화 성장시키고 대중화한 추상미술의 대가

 

윤명로 교수는 1936년 정읍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함경북도 길주로 이사를 갔지만 해방이 되어 남북이 갈라지자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전주의 동산동(당시는 완주군 조촌면)에 정착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조촌초등학교와 전주사범병설중학교를 거쳐 전주사범을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동산동은 그에게 고향이 되었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6.25가 터졌다. 이웃끼리 적이 되어 죽이고 죽음을 당했던 동족상잔의 비극 현장은 그의 삶과 정신을 큰 힘으로 지배하며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림 잘 그리는’ 그를 자랑으로 여겼던 담임선생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담임선생님의 칭찬덕분이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줄곧 미술반장을 도맡아 할 정도로 그림에 빠져있었던 그는 취직이 보장되어 있던 사범학교를 졸업했지만 취업 대신 미술대 진학으로 길을 바꾸었다. 서울대 회화과에 입학한 그는 대학 3학년 때 서양화를 전공으로 택했다. 같은 해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하면서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스승은 당시 화가들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던 국전에 지속적으로 출품할 것을 권했으나 국전의 수상 등급에 따라 작품과 작가를 서열화하는 화단 풍토에 저항심이 생겼다. 1960년 같은 생각을 가진 동료들과 반국전운동을 내세운 미술가협회를 만들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해 덕수궁 담벼락에 작품을 걸어 전시했던 ‘60년미술가협회 창립전’은 화단의 굳건한 권위와 질서에 문제를 제기하는 젊은 세대의 의미 있는 도전이었다.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우리의 전통적인 정신을 담아내는 형식을 고민해온 그는 그즈음 판화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국제전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도 판화비엔날레가 계기가 되었다. 63년 제 3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면서 국제성에 눈을 뜨게 됐다. 올해 50주년을 맞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를 68년에 창립했다.

1970년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유학을 떠났다. 1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판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뉴욕 프랫 그래픽센터에서 판화를 전공한 그는 한국 판화의 오늘을 있게 한 선구자가 되었다.

회화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며 늘 새롭고 다양한 형식을 만나온 그는 여백으로부터 형태와 색을 찾아내는 자신만의 독창적 세계로 국제 화단이 주목하는 한국의 대표적인 작가가 됐다.

장욱진 김환기 백남준 유영국 등 당대의 화가들과 교류하며 한국 미술의 오늘을 이끌어온 그는 제 7회 서울 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했으며 2000년대 이후부터는 거의 한해도 거르지 않고 개인전을 열어왔다.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정신의 흔적> 과 2017년 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린 회고전 <그때와 지금> 은 개인적 삶의 궤적으로서 뿐 아니라 한국 현대추상화의 단면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전시로 화제를 모았다.

국립현대미술관, 런던 대영박물관, 덴마크 헤어닝 현대미술관, 미국 오하이오 신시네티미술관, 일본 도쿄예술대학, 베이징 중국미술관, 리움 삼성미술관 등이 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서울대 미대학장을 역임했으며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다.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기획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