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원호 / 그림 권휘원
“그대의 사위 김품석이 싸우다 죽었다고 들었다. 사위를 죽인 적장의 이름을 아는가?”
“예, 압니다.”
계백은 김품석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았다. 바로 세걸음 거리에 김춘추가 앉아있는 것이다. 그때 김춘추가 어깨를 펴고 대답했다.
“백제 나솔 관등의 계백이라고 들었습니다.”
“허, 그런가? 이름도 알고 있구만.”
“예, 제 사위를 죽이고 대야성을 공취한 일등공(功)으로 한솔로 관등이 올랐다고도 들었습니다.”
“신라는 첩자를 많이 보낸다고 들었는데 과연 그렇구나.”
“황송합니다.”
“그럼 그대가 목숨을 걸고 나를 찾아온 이유를 듣자.”
“예, 대막리지 전하.”
어깨를 편 김춘추가 똑바로 연개소문을 올려다 보았다.
“먼저 신라국 여왕께서 보내신 밀서를 올리겠습니다.”
“밀서?”
되물은 연개소문이 보료에 팔을 기대면서 웃었다.
“그대가 펴서 읽으라. 내가 고구려 고관들과 함께 듣겠다.”
그때 계백은 김춘추가 어깨를 잠깐 올렸다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뒤쪽 부사(副使)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밀서를 내놓으라는 표시다. 빠르다. 그리고 행동에 강단이 있다. 부사가 서둘러 붉은 두루마리 밀서를 건네자 김춘추가 매듭을 풀고 펼쳤다. 붉은색 비단에 금박을 입힌 글씨다. 곧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신라 여왕 덕만이 고구려 대막리지 전하께 글로써 인사와 함께 약조를 드리옵니다.”
김춘추가 잠깐 숨을 고르더니 계속했다.
“신(臣) 덕만은 백제의 공격을 받아 사직을 보존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진 터라 다음과 같은 약조를 드리니 살피시어 신라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계백은 김춘추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것은 신하국(臣下國)으로 고구려를 왕국(王國)으로 모신다는 말이다. 그런데 김춘추의 목소리는 낭랑했고 어깨는 펴졌다. 옆모습만 보였으나 흰 얼굴은 상기되어 있다. 계백이 소리 줄여 숨을 뱉었다. 문득 의자대왕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의자대왕은 절대로 이렇게 못한다.
그때 김춘추가 다시 밀서를 읽는다.
“백제에 사신을 보내시어 출병을 거두도록 해주시면 한수 유역의 신주(新州)를 당항성 한곳만 빼고 고구려에 반환토록 하겠습니다.”
계백도 연개소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옮겨져 있는 것을 보았다. 얼굴에 옅은 웃음기까지 떠올라 있다. 계백에게 고구려의 4품 관등인 대부사자 관복을 입히고 청에 앉아 김춘추를 살펴보라고 권한 것이 연개소문이다. 백제에 대한 배려였지만 짓궂다. 김춘추의 목소리가 청을 울렸다.
“고구려가 당과 싸울 적에 백제가 등을 치지 못하도록 신라는 후위 역할을 맡겠습니다. 그 증거로 김춘추의 아들 김인문을 고구려에 인질로 두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김춘추가 밀서를 내려놓았을 때 청 안이 조금 술렁거렸다. 인질이 있단 말인가? 연개소문도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내려다 본다. 계백의 시선이 김춘추 뒤쪽 부사(副使) 두 명에게 옮겨졌다. 하나는 젊다. 이자가 김춘추의 아들인가? 아들까지 데려왔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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