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창고 등 유휴공간 활용 작가들에 ‘레지던시’로 제공…거주기간·참가인원 등 확대
마을사업-예술장르 연계해 주민 커뮤니티 추진 활성화…문화귀향인 정착 지원 고민
완주군 전역, 마을 곳곳에서 진행될 ‘예술가 완주 한 달 살기’가 5월부터 본격 가동된다. 지난해 완주형 레지던시로 주목받았던 파일럿 사업을 수정·보완해 올해는 더 많은 예술가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규모를 키웠다. 거주기간을 한 달뿐 아니라 백 일, 열 달로 다양화하고 참가 자격도 크게 완화해 나이 제한을 없애고 인원도 12명에서 올해는 22명 내외로 대폭 확대했다.
지난해 참여했던 작가 대부분은 태어나 완주를 처음 방문했거나, 심지어 완주라는 지명을 들어본 적 없는, 완도가 완주인 줄 아는 작가도 있었다. 그만큼 예술가들에게 완주라는 곳은 관심 밖의 지역이었을 터.
그러나 올해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졌다. 작년의 성과가 입소문 나면서 참여 작가들의 층위가 다양해졌고 미리 거주하고 싶은 마을을 조사해 신청하는 열혈 지원자들도 생겼다. 대한민국 예술지도 안에서 변방 중의 변방인 완주로 예술가들의 눈길과 발길을 이끌고 있는 건 무엇일까?
‘충전과 영감’ 두 개의 키워드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참여 작가들의 지원 신청서에는 힐링, 쉼, 영감, 창작, 자극, 집중 등의 단어가 중첩되어 나타난다. 이는 오랜 창작활동과 생업활동으로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시켜줄 ‘충전’과 낯선 곳에 나를 던짐으로써 새롭게 자극받는 ‘예술적 영감’을 위해 ‘완주 한 달 살기’를 선택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1990년대 후반 들어 시작된 국내 레지던시 프로그램은 예술가들이 특정 공간에 거주하며 초청기관 및 단체로부터 일정 부분 창작 비용을 지원받고, 창작활동과 예술가 교류, 오픈 스튜디오, 비평가 매칭 등의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며 거주기간 동안 작업의 결과물을 전시하는 방식으로 대부분 진행되어 왔다. 그에 비해 ‘완주 한 달 살기’는 기존의 레지던시와는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완주군 마을 내 빈 집, 빈 방, 빈 창고 등 유휴공간을 주민들로부터 확보해 작가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완주는 농촌형과 도시형 주거양식이 혼재된 도농복합지역이다. 인구의 50%가 완주군의 면적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촌형 마을에 넓게 분포되어 있고, 또 다른 인구 50%는 이서혁신도시 및 봉동읍 둔산리 등 일부 도시형 주거지역에 밀집해 있다. 군 단위 지자체로는 드물게 인구가 줄지 않고 있는, 아니 되려 인구가 조금씩 증가하고 있는 지역이기는 하지만, 급격한 고령화와 저출산의 여파는 완주군 역시 피해 갈 수 없는 직격탄일 수밖에 없다. 농촌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면 비어있는 집들과 기능을 멈춘 공동 작업장들, 노인 1인 가구 증가로 늘어나는 빈 방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볼 수 있다. 도시는 원도심 공동화가 고민이듯 농촌은 마을의 공동화가 점점 큰 숙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완주 한 달 살기’는 레지던시 사업을 위해 새로운 건물을 짓지 않고 농촌마을에 넘쳐나는 빈 집과 빈 방, 빈 창고들을 활용해 예술가의 방과 예술가의 작업실로 제공함으로써 주민은 예술을 통한 마을활력과 마을재생의 불씨를 키우고, 예술가는 아름다운 완주의 자연환경과 마을 읽기를 통해 충전과 창작의 영감을 얻는 것을 사업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제 2년째에 불과하지만, 그 목적은 충실하게 달성해가고 있는 것 같다. 지난해 처음 이 사업을 경험한 마을들이 올해도 참여 신청을 하고 있고, 한걸음 더 나가 마을사업과 연계할 수 있는 예술 장르를 적극적으로 요청하고 있다. 참여 작가들도 회화, 사진, 음악, 연극, 무용, 문학, 영상, 공예, 설치미술, 문화기획 등 10개 분야로 다양해짐에 따라 지난해 용진, 봉동을 포함해 8개 읍면(13곳)으로 시작한 마을 거주 공간을 올해는 14개 읍면으로 확대하고, 입주기간이 한 달, 백 일, 열 달로 다양해진 만큼 주민들과의 커뮤니티 프로그램도 마을별 실정에 맞게 세심하게 추진할 계획이다.
무엇보다도 ‘완주 한 달 살기’에 참여한 작가들이 사업 중 또는 사업 이후 지역과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활동으로 연결되고 그렇게 축적된 역량이 지역 예술계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될 수 있도록 구조화하는데 집중할 예정이다. 지역 예술인들과의 교류와 비평가 매칭 프로그램 등을 보완하고 복합문화지구 누에와 연계해 열 달 살기 참여 작가들은 창작 결과물을 올 10월 예정된 ‘누에홀’ 개관전에 전시할 수 있도록 기획 중이다. 또한 완주로 문화귀향하는 예술인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 지원정책과 조례 등을 제정해 지속성을 확보하는 일도 관련 분야 전문가들과 협의해 추진할 계획이다.
"마을 주민들 앞 연주…따뜻한 박수 기억해"
- 운주면 용계원마을 음악인 임자연 씨
곡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고 공연을 만들기도 한다. 지난해 벌려놓은 이런저런 작업들로 지쳐가고 있을 때, 완주 한 달 살기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다. 당시 미술관에서 기획 일까지 함께 하고 있을 때라 참여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완주에서의 한 달이 누구보다도 절실했던 터라 양해를 구하고 신청하게 되었다.
운 좋게 아름다운 고산면 안남마을 빨간 대문 집에 머무르게 되었고 마을 입구 가득 서있는 느티나무들, 설레는 공기 내음, 집 외벽에 붙어있는 마을 주민들의 사진까지 그림같이 다정한 동네였다.
마을 주민들 앞에서 연주했을 때의 따뜻하고 누구보다도 큰 박수의 힘으로 남은 시간을 달려갈 수 있는 힘을 얻었고 그 따뜻한 기억을 가지고 올해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 새로운 마을에서 또 다른 예술적 에너지를 주고받는 멋진 경험을 기대하고 있다.
"숨어있는 세계를 끄집어내는 아지트 기대"
- 동상면 황조리마을 시인 송과니 씨
예술은 현장 속에 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낯선 곳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예술이란 것, 창작이란 행위는 숨어있는 세계를 끄집어내는 작업이고, 완주가 그런 아지트가 되어 줄 것이라 기대하고 이렇게 승차했다.
내가 머무는 마을의 풍경과 주민들 삶의 모습들이 창작활동에 좋은 영감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 얼마 전 마을 주민들이 마을에 예술가가 들어왔다며 환영의 자리를 마련해주셨다. 나를 포함해 8명이 함께했다. 푸짐한 안주와 막걸리, 색소폰 연주까지 곁들인 부러울 것 없는 자리였다. 근자에 이렇게 많은, 8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모인건 오랜만이라며 다들 고무되어 있었다.
입주한지 2주 남짓한 시간이 흘렀고 3편의 시를 썼다. 편안한 어느 때쯤, 마을 어르신들에게 농사만 짓지 마시고 인자 시(詩)도 함께 지어보자고 청해 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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