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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악기 제작 50년 외길 고수환 명장 "새로운 악기 요구 커질수록 전통 원형 지키는 일 절실해"

세월 지나도 음색 안 변하는 생명력 긴 악기 제작이 소망
명성 얻어 한때 서울 진출도 고향 빛내고 싶어 전주 귀환
악기 변화는 시대 요구지만 기본 제대로 지켜져야 가치

▲ 지난달 30일 고수환 악기장이 전미동의 작업실에서 가야금을 조율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공후’는 우리나라 고대 현악기 중 하나다. 지금은 묻혀버렸지만 고구려와 백제, 신라의 공후가 모두 문헌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오랜 세월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우리 악기임에 틀림없다. 공후 연주가로는 고조선의 음악가 여옥이 이름을 알렸는데, 그가 남편으로부터 들은 백수광부와 그의 아내 이야기를 듣고 작곡했다는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를 연주한 공후가 문헌상으로는 가장 오래된 현악기로 꼽힌다.

그러나 공후는 오늘에 이르러 살아남지 못했으니 잊혀진 악기다.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시대에 편찬된 음악서적 ‘악학궤범’에도 더 이상 그 이름은 없다. 미루어 짐작컨대 공후는 조선시대부터 연주에 사용되지 않은 악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시대를 함께 건너지 못하고 잊혀진 악기 ‘공후’를 현대에 복원하겠다고 나섰던 악기장이 있다. 실제로 그는 문헌과 국립국악원에 전시된 공후를 연구해 그 실체를 살려내는데 성공했었다. 덕분에 ‘잊혀진 악기 공후 복원’에 국악계의 관심이 모아졌다. 당시 공후 제작으로 특허까지 냈던 악기장은 공후를 오늘의 무대에 살려내는 악기로 완성하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의 표현대로라면 ‘10% 부족한 악기’로 다시 묻히고 말았다.

악기장 고수환 명장(69)의 이야기다. 열여섯 살에 악기를 만들기 시작해 50년 넘는 세월을 현악기 제작으로만 살아온 그를 만났다. 갈수록 자리가 좁아지는 국악기 제작의 현장을 지키며 다음세대에까지 남을 수 있는 악기를 만드는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온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연주자가 내고자 하는 음색을 제대로 내주는 악기가 좋은 악기입니다. 악기장은 어떤 음색이라도 그 빛깔을 연주자가 쉽게 낼 수 있도록 악기를 만들어야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아요. 좋은 악기를 만들기 위해 가야금을 배우기도 했는데 50년이 지난 지금도 부족함이 많습니다.”

나무를 고르는 일부터 시작해 악기를 만드는 모든 과정을 직접 해내는 그는 전주시 덕진구 호성동, 온전히 작업만을 위해 마련한 공간에서 하루 여덟 시간 이상 나무를 깎고 줄을 꼬고 걸어내는 악기 제작으로 수십 년을 보내왔지만 아직도 ‘이것’이라고 스스로 만족할만한 악기를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의 악기는 음색이 맑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특성으로 연주자들에게 명기로 꼽힌다. 악기 제작 방식의 원형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음색이 빗겨가는 일을 절대 놓치지 않는 그의 철저한 태도가 바탕이 된 덕분이다.

많은 악기를 만들어내는 일보다 생명력 긴 악기를 만들어내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연주자들이 ‘고수환 가야금’ ‘고수환 거문고’를 찾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쉬운 길 보다는 어려운 길을 스스로 택한 이 악기장의 선택이 빛나보였다.

-작업실에는 날마다 출근하십니까.

“직장이니까요.(웃음) 지켜보는 사람은 없어도 아침 9시쯤 나와 오후 6시쯤 퇴근합니다.”

-전수자는 없나요.

“이수자도 있고 전수조교도 있는데 덕진동에 있는 작업장에서 일합니다. 전시공간이 함께 있거든요. 여기에서는 주로 저 혼자 작업합니다. 전수자 중에는 제 둘째 아들도 있습니다.”

-아드님이 같은 길을 가고 있으니 든든하시겠습니다.

“저는 사실 왈칵 반갑지 않았어요. 공부를 웬만큼 하는 편이어서 새로운 분야로 나갔으면 했습니다. 그런데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대학을 그만두더니 얼마 되지 않아 바로 이 일을 시작하더라고요. 예전에 애 엄마가 결혼하기 전에 사주를 봤는데 둘째아들이 가야금을 들고 나오더래요. 타고난 운이구나 싶어서 받아들였습니다. 제법 잘 따라주고 있어서 지금은 마음이 편합니다.”

-악기 제작은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대를 물려온 일인가요.

“저의 집안은 대대로 농사를 지었어요. 형제가 5남 3녀인데 먹고 살만큼은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환갑에 낳은 늦둥이여서 부모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어요. 그런데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형들이 사업에 실패하면서 집안이 몰락했죠. 중학교 가는 것을 포기하고 서당에 다니면서 한문공부를 했어요. 어릴 때는 총명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천자문이나 사자소학 등을 남들보다 빨리 뗐어요. 그럭저럭 지내다가 누나가 전주에 일할 자리를 소개했는데 가야금 거문고를 만드는 곳이었어요. 남갑진 조정삼씨라고 악기장들이 함께 일하는 곳에서 심부름을 하기 시작했죠.”

-첫 스승들이군요.

“그렇죠. 그런데 당시 참 어렵게 살았어요. 그때 저까지 세 사람이 일하면 한 달 내내 일해도 다섯 대 정도 만들었거든요. 구멍 하나까지도 손바닥으로 뚫어야 했으니 참 고단한 일이었어요. 지금은 드릴이라도 있지만 60년대에는 대패 칼 끌 조선톱, 이런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악기가 팔려나가기는 했지만 주문을 해놓고 악기만 갖고 도망가는 사람도 있고, 고정적인 주문이 이어지지 않으니 먹고 살기도 빠듯했던 시절이죠.”

-그래도 악기 만드는 일만은 탄탄하게 배우셨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것 같아요. 제 위로 한두 명 더 있었는데 일단은 악기를 만드는 사람 숫자가 적었어요. 제게 일을 가르쳐주신 분들은 20대였고, 저는 10대였는데, 제가 일을 그만둘까봐 군대 가면 제게 공장을 인계해주겠다는 약속을 했었지요. 월급이랄 것도 없이 명절 때면 약주 한 병 들고 부모님 찾아뵌 것이 전부였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몇 년 동안 일하셨습니까.

“열아홉 살까지 3년을 배웠어요. 손재주가 있었던지 금세 기술을 익힐 수 있었죠. 그즈음 형편이 좀 나아져 전주 시내로 나오게 되었는데 그때 기술이 쑥쑥 늘었던 것 같아요. 70년대 들어서면서 박정희대통령이 국민교육헌장을 발표했잖아요. 거기에 ‘조상의 얼을 오늘에 되살려’라는 부분이 있죠. 그때부터 갑작스럽게 우리 것을 찾기 시작했어요. 우리 악기 만드는 일도 덩달아 바빠지게 되었죠.”

-좋은 시절이었겠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죠. 그때가 70년대 초반이었는데, 5급 공무원 월급이 2만 5천원, 그런데 저는 4만 5천원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부자가 된 겁니다.(웃음) 게다가 여기저기서 저를 빼가려는(?) 사람들이 월급을 배로 주겠다고 꼬셨어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가 그래도 서당 공부를 했잖아요. 공자 말씀을 새기며 살아왔는데 배신은 못하겠더라고요. 제가 나가면 문을 닫아야 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래서 제 밑에 기술자를 붙여 일하면서 가르치고 저는 세 곳을 다니며 일을 했어요. 한 곳에서 4만 5천 원씩 받았으니 벌이가 컸죠. 그 시절 투자란 것을 알았으면 변두리 땅이라도 사놓아서 지금쯤 갑부가 되지 않았을까요.(웃음)”

-결국은 그렇게 벌었어도 부자가 되지 못했다는 말씀이군요.

“집안이 워낙 어려워서 제가 식구들을 건사해야 했거든요. 공자님 말씀에 ‘충효’가 들어가 있잖아요. 공자님 말씀이 제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어요.(웃음) 많이 벌었지만 가족이 워낙 많은데다 형들도 하는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조카들까지 껴안게 되었죠.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어려움에 처해있는 가족들을 외면할 수 없더라고요. 어차피 콩나물시루인데 콩하나 더 넣어 같이 물주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덕분에 평생 큰 짐을 지고 살아왔지만 지금 생각하면 좋은 일을 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도 일하셨지 않습니까.

“군대 제대하고 전주에 와보니 제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웬만큼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다보니 제가 오히려 부담이 되겠더라고요. 그때 중요무형문화재였던 이영수선생님이 올라오라고 권유하셨어요. 지금 생각하면 악기장 기능의 계보가 이어지는 좋은 기회였죠. 이 선생님 밑에서 일하면서 기술을 거의 완벽하게 익혔어요. 그런데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서울에서 지내는 것보다는 내 고향을 빛내고 싶다는……. 좋은 악기를 만드는 명장이 되겠다는 생각을 그때부터 한 것 같아요.”

-서울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훨씬 많았을 텐데요.

“물론 그랬죠. 그런데 이상하게 전주로 돌아오고 싶었어요. 스물일곱 살에 다시 왔는데, 그때부터 제 악기를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어요. 고수환이 만든 악기를 가지려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고마웠어요. 자긍심을 갖게 되었죠.”

-그때의 선택에 후회가 없으신 건가요.

“솔직히 말하면 약간의 회한은 있습니다. 지금 상황이 워낙 열악하니 그런 생각이 더 드는 것 같아요. 제 뒤로 일을 배웠던 후배들은 서울에 살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거든요. 그래도 제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제가 하는 일로 전주라는 도시가 조금 더 빛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바람이 클 뿐이죠.”

-아무래도 서울과 지방은 물량으로도 비교가 되지 않겠네요.

“사실 악기 제작 같은 분야는 전주 같은 지방에서 전통을 갖고 이어지는 것이 좋습니다. 악기로 이름을 알리는 도시가 되면 더 좋겠죠.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좋은 악기를 제작해도 시장성에 제약이 있으니 환경이 갈수록 나빠집니다. 모든 것이 서울로 몰리고 있지만 악기 같은 경우는 시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런데도 굳이 서울에서 악기를 구하는 환경이 안타깝습니다.”

-유통의 문제도 있겠습니다.

“물론이죠. 좋은 악기를 제 값 주고 살 수 있는 통로가 얼마든지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유통과정 때문에 좋은 악기가 양산되지 못하는 환경을 만들기도 하지요. 그렇다고 악기를 만드는 사람이 영업에 매달리는 일도 바람직하지 않고요.”

-연주자들은 좋은 악기가 생명일 텐데 유통과정이 잘못되어 있으면 가격 면에서도 그렇고 좋은 악기를 갖는 일도 한계가 있겠군요.

“국악계를 들여다보면 웃지 못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악기는 연주자마다 잘 맞는 악기가 있기 마련이지요. 각자 연주의 특성이 있으니까요. 특히 공부하는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악기가 중요해요. 그런데 국악 관련 학교의 경우 악기를 단체로 구입하는 경우가 많아요. 예전부터 행해져 온 관행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런 관행에서 오는 문제점은 그동안 수없이 불거졌었죠.”

-화제를 좀 돌려보겠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조금은 쉽게 악기를 제작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요. 이를테면 분업이라든가 기계를 활용한다던가…….

“그렇게는 할 수 없지요. 저는 악기를 만들 때 지금 당장이 아니라 얼마나 오랫동안 변하지 않고 처음의 음색을 유지하느냐를 생각합니다. 그러려면 악기 제작의 과정을 원형으로 지켜내야 해요. 요즘은 분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제가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자존심이죠. 우리는 실도 사다가 직접 꼬아 씁니다. 오동나무와 밤나무도 직접 사다가 건조과정과 숙성과정을 모두 거치지요. 시작부터 완성까지를 내 손으로 직접 하지 않으면 그것은 내가 만든 악기라고 볼 수 없습니다.”

-선생님 말씀 들으면서 악기장이 앞으로 살아남는 직업이 될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특히 음악이 변하는 시대에서 개량악기나 새로운 악기가 계속 만들어지다 보면 손으로만이 아니라 기계가 악기를 만드는 시기가 올 것도 같은데요.

“실제로 서울 쪽에서는 기계가 악기를 만듭니다. 악기는 원판을 깎아 만들어야 하는데 프레스로 눌러서 대량 양산을 하지요. 그런 악기는 소리부터 다릅니다. 금세 변하죠. 처음에는 모르지만 1년을 못갑니다. 값이 싼 악기를 선호하니 이제는 중국에서 만들어온다고 하더군요. 전통악기만큼은 이런 상황을 막아줬으면 좋겠어요.”

-개량악기 쪽은 관심이 없나요.

“국악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악기의 변화가 요구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전통악기로는 연주가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시대에 따라 악기가 변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매력을 갖지 못하는 악기는 창고에 묻히게 될 테니까요. 그러나 그런 새로운 악기에 대한 요구가 높아질수록 전통악기의 원형을 지키는 일은 더 절실해집니다. 변화는 기본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 의미와 가치가 있으니까요.”

인터뷰는 예상보다 길었다. 갈수록 인간의 손을 대체할 수 있는 기계와 첨단 과학의 기능이 앞세워지고 있는 시대. 우리 음악의 온전한 음의 빛깔을 지키는 악기를 만들기 위해 아직도 어느 한 부분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손으로 모든 공정으로 수행해내는 그의 철학은 변하지 않았다. 손의 가치를 다시 깨닫게 하는 명장의 삶이 반갑다.

● 고수환 명장은

- 분업·기계 힘 빌리지 않고 전 과정 스스로 만드는 원칙 고수

악기장 고수환 명장은 정읍이 고향이다. 5남 3녀 중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 대신 서당을 다니며 학문을 익혔다. 어린 시절, 총명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그는 천자문과 사자소학, 동문선습, 격몽요결 등을 떼면서 자연 이치에 눈을 떴다. 그때 익힌 고전은 그의 반듯한 삶을 지키는 결이 되었다.

갑자기 몰락한 집안형편으로 열여섯 살 어린 나이에 전주로 나와 악기 제작을 하는 공방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전주가 제 2의 고향이 된 것은 그 덕분이다. 그때부터 군대 입대로 떠나있던 시절을 빼고는 온전히 악기 제작하는 일로만 살아왔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에 이르는 동안 그의 이름은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악기를 만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어서이기도 했지만 그의 손재주가 남달랐던 덕분이다. 전주에서 활동했던 남갑진 조정삼씨가 그의 첫 스승들이라면 기술을 완성하고 기능의 계보를 잇게 해준 스승은 중요무형문화재인 이영수 명장이다.

이영수 명장은 그를 서울로 불러 올려 현악기 제작 기능을 완성하게 해주었다. 스물아홉 살 되던 해, 그는 전주로 다시 돌아왔다. 같은 일을 해도 ‘전주를 빛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싶었다. ‘시대를 건너는 명기를 만드는 명장이 되겠다’는 꿈이 귀향을 부추겼다.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를 건너 90년대까지 그의 삶은 남부럽지 않았다. 이른바 전성기였다.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전국 각지에서 ‘고수환의 악기’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던 까닭이다. 그때 안았던 경제적 풍요로움은 그 이후 이어진 재정적 결핍을 메워주는 기반이 되었다.

일을 배우기 시작해 지금까지 그는 악기 만드는 전 과정을 자신의 손안에서 해낸다. 분업이나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 원칙을 지켜온 덕분에 그의 악기는 좋은 음색과 쉽게 변하지 않는 생명력을 갖게 되었다. 내로라하는 연주자들이 ‘고수환의 악기’를 하나쯤은 꼭 갖고 있는 이유다.

90년대 말, 가장 오래된 우리의 현악기인 ‘공후’복원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완성시키지 못한 ‘공후 복원’은 그에게 상처로 남았다.

마흔 일곱 살에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야금 악기장)로 지정되었으며 ‘전승공예연구회’를 만들어 전통 기능 분야에 몸담고 있는 장인들의 기능을 잇기 위한 활동을 주도해왔다. 전라북도무형문화재기능보존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전주국악기전수관을 운영, 후대에도 남을 수 있는 악기 제작을 위해 연구하는 일상을 보내고 있다. ·

김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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