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서 성장 후백제 표명…전주 이르러 왕으로 자처
도읍지 정하고 영토 확장
경북 유적 잘 보존된 반면 전북은 도로명밖에 없어 사당건립·역사교육 시급
△신라 혼란 극복 위해 일어서다
“신라가 말년에 쇠미하여지자 정치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흩어졌다.”( ‘삼국사기’ 궁예전)
“기강은 문란해지고 게다가 기근이 곁들어 백성들이 유리하고 도적들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 ‘삼국유사’후백제 견훤)
신라는 하대(780~935)에 이르러 국가적 혼란의 누적으로 통제력이 급속히 약화되었다. 특히, 진성여왕때 군대를 파견해 세금을 독촉하자 나라는 전면적인 내란상태로 들어갔다. 이 같은 난세를 타개하기 위한 영웅 견훤의 출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견훤(甄萱)의 출생지역에 대해 2가지 기록이 전한다. ‘삼국사기’에는 견훤은 상주지방 출신으로 농사일로 어머니가 숲에 잠시 놓아두면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다고 하였다. 또 ‘제왕운기’에는 새가 내려와 감싸주고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였고 성품은 용맹한 호랑이(雄虎)같다고 하여 신비로움과 용맹함을 표하였다. 또 군인이 되어 창을 베고 자면서 적을 대비하였고, 용기는 항상 군사들 중 첫째였다고 전해져 견훤출생의 신성함과 용맹스런 기상을 표현했다.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견훤이 광주 북촌 부자집의 딸과 자색옷을 입은 남자로 변한 지렁이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전한다. 이는 견훤이 처음 무진주(광주)를 장악해 토호의 딸과 혼인한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특히, 지렁이란 표현은 원래는 백제 무왕처럼 ‘용(龍)의 자식’으로 전하다가 후백제가 망한 이후 용 대신 지렁이로 비하되었다고 추정된다.
이같이 견훤은 892년 무진주(광주)에서 성장하여 후백제를 자칭하였고 효공왕 4년(900)에 완산주(전주)에 이르자 주민이 환영하므로 후백제왕을 자처하며 본격적인 후백제 역사를 전개하였다. 당시 국가명칭은 ‘백제’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삼국사기’등 우리 역사서에 ‘후백제’라 표현하여 ‘후백제’ 명칭을 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다.
△고조선-마한-백제 정통성 천명
견훤은 전주에 이르러 다음과 같은 고조선-마한-백제로 이어지는 역사정통성 계승의식을 표명하였다.
“우리 역사를 상고하니 마한(馬韓)이 먼저 일어난 뒤에 혁거세가 발흥하여 진한(신라), 변한이 이에 따라 일어났다. 이에 백제(百濟)가 금마산(金馬山)에 건국하여 600년이 되었던 바 ... 당나라 고종이 신라의 청에 따라 ..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 이제 내가 어찌 완산(完山)에 도읍을 세워 의자왕의 분함을 풀지 아니하랴?”하고 드디어 후백제왕(後百濟王)을 칭하였다.” ( ‘삼국사기’견훤)
사료에서 ‘마한이 먼저 일어났고 혁거세가 후에 일어났다’는 말은 조선시대 실학자들이 우리 역사의 정통은 고조선-마한으로 연결되었다는 마한정통론 인식의 원형으로서 이미 견훤이 고조선 준왕의 익산(금마)지역 망명과 이를 이은 마한과 백제 계승이라는 역사인식을 피력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자신이 부활시킨 ‘백제’가 우리 역사의 정통 즉, 고조선-마한을 계승하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후삼국시기 후백제가 신라보다 역사 정통성이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전주에 나라의 수도를 정한 역사명분을 제시하여 익산-전주를 하나의 권역으로 파악한 지역인식을 제시하였다.
△후삼국 통일 의지 천명
견훤왕은 전주 천도 이후부터 본격적인 영토확장을 하였다. 후백제의 영역은 크게 세 방향으로 나뉘어 확장되었다. 그 하나는 후백제의 배후지역인 서남해 일대이고, 두번째는 고려와 접경지역인 한강 상류의 충청도 내륙지역이며, 세번째는 신라와 인접한 낙동강 이동의 경상도 지역이다. 후백제의 판도는 한 때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의 대부분을 점유하고 경상도의 서부까지 손을 뻗쳤었다. 대체로 충청남도의 중부선에서는 태봉(泰封)과 대치하고 남쪽에서는 전라남도의 서남부에서 왕건의 수군과 다투고 있었으며, 동쪽에서는 상주(尙州) 합천(陜川) 진주(晉州)를 잇는 선을 전선으로 하여 한 때는 안동(安東) 영천(永川) 경주(慶州) 등지까지 깊숙히 진출하기도 하였다.
한편, 918년 6월 자신보다 10살 연하인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공작선(부채)과 지리산 죽전(화살)을 선물로 주며 도량과 배포를 보여주었다. 또한 왕건과의 서신교환에서 “나의 바라는 소원은 활을 평양성문루(平壤門樓)에 걸고 (나의) 말에게 패강(浿江=대동강)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고구려 영역을 포함한 후삼국 통일의지를 천명하였다.
특히, 견훤은 신라에 대한 공략을 강화하였는데 920년 1만의 기병을 이끌고 합천, 초계지역을 공취하고 925년 12월에는 거창 등 20여 성을 공취하였고, 이어 927년에는 신라 왕도 경주를 급습하여 당시 신라왕인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옹립하였다. 이 때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은 왕건의 원병을 대구 공산에서 대패시켰다. 이때 고려장수 8명이 전사하였다하여 이산의 이름이 ‘팔공산’으로 바뀌어 불리게 되었다. 신라왕도를 공략한 견훤은 신라의 보물과 인재를 대거 이끌고 전주로 돌아와 왕도 전주를 새롭게 꾸미게 되었다.
한편, 견훤은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관제를 정비하는 한편, 현재 중국의 항주지역에 있었던 오월(吳越)과 후당(後唐), 거란(契丹) 및 일본(日本)에도 사신을 보내어 국교를 맺거나 통교하는 등 국제적 역량과 위상 확대를 꾀하였다. 이는 해양국가 백제의 위상을 회복하고 해양대국으로 거듭나기 위한 견훤의 의지가 나타난 것이다. 특히, 현재의 항주지역에 위치한 오월과 일찍부터 교류하여 전주에 정도한 900년 사신을 파견하였고 오월왕은 보빙사를 파견하는 등 국제교류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당시 후백제가 중국과 교류한 항로는 후에 고려가 군산도 즉, 현재의 선유도지역을 활용하여 송나라와 교류하였던 상황을 고려하면 현재의 만경강을 활용하여 전주에서 군산도(선유도) 및 흑산도를 이용한 항로를 활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같은 후백제의 대외정책은 후삼국간의 관계에서 국제적 위상을 활용해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목적이 강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935년(경순왕 9) 왕위계승 문제로 갈등한 장자 신검(神劍)의 정변으로 견훤은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 탈출해 고려에 투항하고 자신의 사위 등도 투항케 해 후백제 지도부는 분열되었다. 결국 935년 신라의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하고 936년 왕건이 선산 부근에서 신검의 후백제군을 격파하자 후백제는 결국 45년 만에 붕괴되었다.
당시 견훤의 투항과 후백제 지도부를 와해시킨 행동에 대해 부자갈등에 의한 자멸이란 평가도 있지만 당시 대세가 고려로 기운 상황 등을 고려하여 대규모 전쟁에 의한 백성들의 죽음을 막기위한 대승적 조치로 파악하려는 입장도 참고된다.
이같은 난세에 백성을 구하고 새로운 백제 부활을 꿈꾸었던 견훤을 기억하는 공간이 후백제 왕도 전주에 ‘견훤로’라는 도로명 이외에는 구체적 공간이 한 곳도 없다는 것은 참으로 아쉽고 안타까운 상황이다. 후백제 붕괴이후 고려는 견훤왕을 폄훼하고 왜곡된 역사상을 만들어 오히려 후백제 본거지에 부정적 이미지가 있을 수 있지만 출생지로 전하는 상주, 문경일대에는 견훤을 기리는 사당과 관련 유적이 잘 정비되고 있다는 점에서 후백제 왕도 전주를 부끄럽게 한다. 다행히 최근 지역의 어르신들과 문화유산 해설사들이 중심이 되어 견훤왕의 역사성을 객관적으로 재평가하기 위한 모임이 진행되어 매우 고무적이다. 또한 전주시, 국립 전주박물관이 견훤 왕궁 및 왕도유적을 찾고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어 결과가 기대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견훤사당 건립과 관련 역사를 올바로 교육하는 방안 등이 시급하다.
서기 900년 즉, 1118년전 전주에서 후삼국 통일을 위한 새 역사의 시작을 알린 견훤의 역사가 이제 다시금 울려 퍼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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