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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물 아래 가던 길 – 곽병창

눈을 들면 걸어가야 할 길이 있고, 고개를 돌리면 걸어왔던 길이 뒤를 따른다. 길 위에서 우리는 조금씩 어른이 되었고, 이제 서둘러 늙어가는 중이다. 이 모든 일이 길에서 이루어졌고, 또 이루어져야 할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니 무릎으로 세상을 딛다가 문득 몸을 일으켜 첫걸음을 내디뎠을 때의 찬란을 떠올려보라.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마침내 신의 세계에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던가!

작가들에게 길은 침묵하는 신과 다르지 않다. 그 고요와 정적에 귀 기울이면서 자기 내면의 목소리로 고통스러워하는 작가들에게 길은 아니 신은 한 번도 빛나는 영감을 선사해준 적 없지만, 작가들은 저마다의 감각으로 신의 몸을 더듬고 살펴낸 형상을 오직 인간의 언어로 형상화해냈다.

단짠에 연재되는 글들은 그렇게 길에서 얻은 영감이거나 길을 향해 경의를 표하는 마음들이다. 전북작가회의 회원들이 저마다 품고 있던 문학과 인생과 사랑과 판타지를 모았다. 신보름 화가가 삽화를 그렸다.

 

물 아래 가던 길

글=곽병창(극작가)

버스가 그렁거리며 고갯길을 오르다가 가까스로 숨을 돌린다. 운전사 곁에는 작은 애기 무덤만 한 엔진박스, 따뜻한 그 덮개 위에서 노인들 두엇이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졸다가 눈을 번쩍 뜬다. 긴 기어 레버를 두세 번 흔들어대던 운전사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액셀 페달을 밟는다. 기어 레버 아랫도리를 감쌌던 비닐 커버는 진작 다 벗겨져서 덜렁거리고 차 밑바닥도 훵 뚫려 있다. 찬바람이 휘발유 냄새랑 뒤엉켜 밑창 구멍으로 훅 끼쳐 온다. 저 아래 맨땅의 잔자갈들이 이리저리 튕겨져 나간다.

아주 오래전, 용담 가는 길이다. 진안에서부터 쉬지 않고 달려온 완행버스가 막바지 급한 언덕길을 돌아드는 중이다. 왼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낭떠러지 아래는 시퍼런 강물, 화난 용처럼 사시사철 우르릉거리며 돌아나가는 좁고 깊은 급류이다. 진안터미널서 정천까지 야트막한 고개 하나, 정천서 제법 가파른 산길을 타고 넘으면 모정리 정류소, 모정리서 다시 기운을 얻어 더 가파른 고갯길로 치달아 넘으면 나타나는 긴 다리 하나, 그 다리 건너 왼쪽 아슬아슬한 낭떠러지길이 용담읍내 가는 길, 오른쪽 평탄한 길로는 왜쟁이, 송풍리 지나 금산 가는 길이다. 그 길, 삼거리에서 오로지 용담읍내만을 가기 위해 내어놓은 버스 길, 금산을 가려면 그 낭떠러지 굽이를 다시 되짚어 나와야 했던 그 길은, 전주서 찾아가려면 종일 버스를 타고 가야 했다. 차가 마주 오지 않기를 빌어야 하는 외길이었다. 내가 탄 버스가 용담 들머리의 낭떠러지에 간신히 올라서서 기어를 바꾸고 그 아슬아슬한 굽이를 돌아가는 그 시간은, 그래서 늘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그림=신보름
그림=신보름

차가 그 길 위에 올라서서 흔들거리기 시작하면 내 마음은 늘 어두웠다. 그러지 않아도 지치고 쓸쓸한 길이었다. 멀리 태고정 쪽에서부터 길게 늘인 석양빛이 까마득한 낭떠러지 밑 검푸른 물굽이에 어리어 반짝이고 있었다. 석양에 물든 채, 고갯길 저 아래로 가까스로 나타나는 용담읍내를 내려다보며 나는 늘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사로잡히곤 했다. 바닥이 군데군데 뚫린 버스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나를 불안하게 했던 것은 석양이었다. 용담읍내는 언제나 어둡고 음울한 모습이었다. 반쯤 석양빛을 등지고 저물어가는 조그만 읍내의 집이며 골목들-. 뿌리를 알 수 없는 깊은 슬픔을 견디고 있는 듯한 그 풍경이 나는 싫었다. 짙고 깊게 휘돌아 나가는 물굽이에, 마치 사로잡힌 듯 안겨 있는 낮은 지붕들-. 몇은 함석지붕이었고 몇은 슬래브식 지붕, 그리고 차부(버스정류소)에서 먼 외곽에는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그 낮게 웅크린 마을은 아무리 보아도 정겨워지지가 않았다. 부모님이 살고 있었고 한 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가 마을 뒷산 기슭에 오래된 친구처럼 서 있었지만 나는 그 마을이 낯설었다.

늘 그늘이 진, 해가 넘어가고 있는 동네, 그 골목 어딘가에서 마흔 살 아버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부에는 제법 많은 버스들이 뒤엉켜서 들고 나느라 분주했고 구리스로 범벅이 된 차부 부근의 땅은 지저분했다. 그 검은 흙들로 이어진 골목길을 따라 음식점, 이발소, 다방, 점방이 해거름 술꾼들을 기다리고, 차부의 운전사들, 차장들은 매표소 앞 나무 의자에서 왁자하게 웃거나 욕을 해댔다. 그 언저리 어디쯤에서, 술집이거나 다방이거나, 아니면 아버지를 괜히 형님이라 부르던 차장들 틈에서, 아버지는 나를 기다렸다. 멀미에 지쳐 파리한 얼굴로 높은 버스 계단에서 부려지듯 차부 땅바닥에 내려서면 아버지가 어디선가 ‘병창-’ 하고 외치며 다가왔다. 안아주셨을까, 까칠한 수염 얼굴로 내 볼을 비비셨을까, 그 순간은 기억에 없다. 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구리스 질컥이는 차부 옆길을 따라 골목 끝의 애저집 <흥성옥> 엘 종종 가셨다. 접시 가득 김이 모락모락 나게 잘 삶겨 나온, 그 저금통만 한 새끼 돼지들의 뽀얀 맨살-. 초등학교 내내 객지 생활에 지쳐 허약했던 나는, 허겁지겁 그 어린 것들을 잘도 먹어치웠다. <흥성옥> 은 늘 어른들로 북적였고 나는 얼른 먹고 가야 하는 ‘어린 것’이었기에 아버지보다 먼저 나왔을 것이다. 우연히, 날마다 우연히 만나는 아버지의 친구들은, 또 아버지를 잡고 한 잔 더 했을 것이고, 나는 읍내 한가운데 난 큰 길을 따라 엄마가 기다리는 집으로 터덜터덜 걸었다.

그때쯤이면 태고정 쪽에서 비춰오던 석양빛도 다 사위어들고, 그 뒤 깊은 골짜기에서 나온 어둠이 마치 거대한 동물의 아가리에서 나오는 화염처럼 온 동네를 집어삼키는 중이었다. 읍내에서 찻길 반대편으로 들어가는 더 깊은 안쪽, 시퍼런 물굽이가 돌아 나오는 그 골짜기의 초입에 태고정(太古亭)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음이 분명해 보이던 그 낡고 외로운 정자의 이름은 왜 하필 태고정이었을까? 저 물굽이는 도대체 얼마나 더 깊은 산골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일까? 우체국 지나고 면사무소 지나고 의용소방대를 지나는 동안 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투성이인 그 동네가, 고향도 아니고 타향도 아닌 그 동네가 자꾸 궁금했다. 그 자갈 많던 읍내 안길은 왜 자꾸만 내 발걸음을 튕겨내던지, 내 걸음은 그 길에 잘 어울리지 못하고 자꾸 허공을 딛는 것만 같았다. 우체국 집 딸인지 소방대장 딸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한, 그 전 한 학기를 다녔던 용담국민학교서 잠시 친해졌다 생각했던, 그러나 끝내 제대로 눈길 한 번도 못 마주쳐본 숙경인가 하던 여자아이 속마음도 갈수록 알쏭달쏭했다. 그리고 태고정이랑 그 뒤를 우르릉거리며 돌아 나가던 물소리는 점점 더 무섭게만 느껴졌다.

그 시퍼런 물의 고향이나 늙은 정자의 내력을 채 알아채기도 전에, 숙경이 속마음도 제대로 알아채기 전에, 우리 집은 용담을 떠났다. 용담국민학교에 있던 아버지가 송풍국민학교로 전근을 가신 탓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오랫동안 나는, 집에 가는 길에 늘 그 낭떠러지 굽잇길의 석양빛을 받으며 용담 차부를 돌아 나와야 했다.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천지가 개벽을 했다. 금산 쪽으로 왜정이 모퉁이를 길게 돌아 나가서 회룡마을 가는 산굽이에 거대한 댐이 들어서고 정천부터 송풍리 사이 산천은 다 물에 잠겨 버렸다. 용이 사는 연못이라 용담이라 붙였다던 예쁜 이름은, 이제는 거대한 호수의 이름이 되었다.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죽어도 못 떠난다 울부짖던 이들도 하릴없이 고향을 떠났고, 댐만 생기면 일확천금 부자 될 줄 알았던 이들도 별 부자 못 된 채 고향을 등졌다. 그래도 누군가는 그 언저리에 집 짓고 살고 누군가는 문중 납골당을 더 높은 곳으로 옮겼다. 읍내 가던 낭떠러지 굽잇길도 물에 잠겼고 그 대신 말쑥한 드라이브 코스 길이 호수 위를 가로지른다. 그 길 위로 벌초하러 갔다가 돌아올 때면 팔십이 훌쩍 넘은 아버지는 조수석에서 자꾸만 눈가를 짓누르신다.

이제 그 낭떠러지 버스 길 아래 깊고 검푸르기만 하던 그 물굽이는 온데간데없다. 용담 차부에서 우두커니 기다리는 동안 풍겨오던 짙은 구리스 냄새는, 천지 사방 떠돌던 차장들의 악다구니 소리와 함께 사라져갔다. 나는 그때 그 낭떠러지 길에서, 구리스 향기 코를 찌르던 차부 길에서 몇 걸음이나 멀리 왔을까? 되돌아보니 내 발걸음은 여전히 그때 그 길 언저리서 허공만 휘젓고 있고, 근원을 알 수 없어 무섭기만 하던 그 골짜기며 물굽이들은, 더 깊은 삶의 심연(深淵)이 되어 여전히 내 앞에 아가리를 벌리고 있다.

용담호 그득한 물은 모를 것이다. 저 아래 차부 흙 마당에서 아직도 구리스가 술술 풀려나오는지, 흥성옥이며 골목 다방을 기웃거리던 사내들은 어디쯤에서 해 질 녘 술잔을 기울이는지, 용담초등학교 뒷산 중턱까지 차오른 물은 죽어도 모를 것이다. 그때 내가 낯설기만 했던 우리 동네 용담에 대해 아무 것도 몰랐듯이-. 해만 넘어가면 귀신 나올 듯 무섭기만 하던 태고정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지금은 호숫가 관광단지로 옮겨 앉았다. 전혀 태고정 같지 않은 모습으로, 뽕짝 소리 자지러지는 휴게소 곁에서, 아파트 노인당의 노인처럼 쭈뼛쭈뼛 서 있을 뿐이다. 면사무소 따라 송풍리로 옮겨간 <흥성옥> 에서는 이제 애저를 팔지 않는다.

그래도, 저 물 아래 사람들 오가던 그 길, 아직 거기 있을 것이다. 가을이 되면 떠나간 이들의 어지러운 꿈자리마다, 물 아래 저 길로 그때 그 사람들 다시 모여들어서, 한 잔만 더 하자고 보챌 것이다. 오늘도 붐비는 저 꿈자리 길 위로, 석양은 또 찰랑찰랑 울먹이며, 마지못해 비스듬히 지고 있을 것이다.

 

* 곽병창: 극작가, 연출가. 우석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희곡집 『강 건너 안개 숲』, 『필례, 미친 꽃』, 평론집 『연희, 극, 축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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