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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정도 1000년, 창조와 대안의 땅 '전라북도'] 완전한 땅, 후삼국 통일수도 전주 꾸민 견훤왕 - 신앙으로 왕도 보호하고 책으로 지식문화 수도 완성

신라서 건축 기술자 데려와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꾸며
신령스러운 동물 배치하고 동서남북에 사찰 세워 수호
후삼국 최다 서적 모았지만 견훤 패망하며 모두 유실돼

▲ 유교의 사령과 불교의 사고사찰이 지키는 전주. 현재는 기독교의 남문, 북문,동문, 서문교회가 전주를 둘러싸고 있어 흥미롭다.

“(견훤왕은) 삼한을 경략하고, 백제의 옛 나라를 부흥하였다. 도탄을 물리쳐내시니 백성들이 편안함을 찾아 모여드는 것이 바람처럼 일어나 원근의 백성이 말이 달리는 것처럼 모였다.” /‘삼국사기’견훤전

△견훤왕, 후삼국 통일 수도 전주를 만들다

후백제 견훤왕은 892년 무진주(현재의 광주)에서 거병하고 독자적인 정치행보를 유지하다가 900년 전주로 도읍하여 후백제의 공식적인 출발을 진행하였다. 이 후 936년 신검왕대에 후백제가 망하기까지 전주는 37년동안 후백제의 수도로서 기능하였다. 이 기간은 한 국가의 도성구성과 관련하여서는 충분한 시간으로서 전주의 도시구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기간이 되었다. 특히, 927년 신라 경주를 공격하고 경순왕을 옹립하고 특히, 공산에서 고려군을 대패시킨 견훤은 후삼국 통일을 목전에 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견훤은 전주를 통일수도에 걸 맞는 체계를 갖추게 하였으며 화려하고 사치스럽다는 당시 평가가 들 정도로 전주를 꾸몄다. 특히, 신라에서 데려온 ‘여러 분야의 뛰어난 기술자’(백공지교자百工之巧者)를 활용한 전주 도성건축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종래 후백제 왕도 전주의 공간에 대해서는 다양한 공간설정과 가능성이 검토되었다. 가장 최근 전주박물관은 전주를 둘러싼 고토성의 흔적과 현재 구도심을 중심으로 한 도성공간들에 대한 기본안을 발굴과 연구를 통해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국가적 목표와 방향이 후삼국 통일이었고 그 지향점이 고구려 옛 영토까지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는 점이다. 이 같은 목표 구현을 위해 견훤왕은 종교 신앙적 보호체계를 구상하고 이를 실천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교의 신령한 네 마리 동물 사령(四靈), 전주를 지키다

▲ 김정호의 동여도에 나타난 봉황암(鳳凰岩).
▲ 김정호의 동여도에 나타난 봉황암(鳳凰岩).

견훤왕이 후백제 왕도 전주를 지키기 위한 종교신앙적 흔적으로 주목되는 것이 유교의 경전 ‘예기(禮記)’에 나오는 네 마리 신령스런 동물인 사령(四靈) 관념이다. 이는 인간을 먹이는 가축의 원형인 기린·용·거북·봉황으로 점차 도성수호의 신령한 상징으로 자리잡았고 도교와 연결되어 도성 방위의 사신(四神)신앙으로 발전하였다. 그런데 후백제 왕도 전주를 둘러싼 지명에 이들 명칭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즉, 전주를 둘러싼 산줄기에 부여된 명칭인 기린봉(麒麟峯)의 기린, 용머리고개의 용, 거북바위의 거북, 옛 지도에 표현된 봉황암(鳳凰巖)의 봉황이 그대로 전주에 나타나고 있다.

▲ 완산10곡 병풍도에 보이는 내검암리의 거북모양 바위와 금암동 구 KBS자리의 거북바위.
▲ 완산10곡 병풍도에 보이는 내검암리의 거북모양 바위와 금암동 구 KBS자리의 거북바위.

한편, 이들 대응내용을 살펴보면 기린봉과 봉황암이 서로 인접하여 산림에 위치하는 형세이고 용과 거북은 전주천과 연결되어 연못에 깃들여 사는 형세와 연결되는 지형적 형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 같은 사령은 상서로운 동물로서 인간을 먹이는 존재이자 어진 정치를 상징하고 태평성대를 나타낸다는 점에서 이같은 존재가 도시수호 및 구성에 존재한다는 것은 국가통치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이념체계였다. 그런데 이같은 표현은 전주에 적용될 수 있는 시점은 후백제 왕도이던 시기에 가장 가능성이 높다. 결국 견훤왕은 사령신앙에 입각한 관념을 전주의 공간에 대응시켜 후백제 전주를 명실상부한 “완벽하고 온전한 최고의 땅”으로서 만들려고 하였다.

△불교의 사고사찰 배치로 전주를 지키다

전주에는 독특한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는 사고사찰이 존재하고 있다. 먼저 남고사는 창건 당시 남고연국사(南高燕國寺)라 불렸는데 여기서 ‘연국’이란 나라를 편안하게 한다는 뜻의 말로 산성에 있는 사찰 이름으로 전주를 지키는 남고산성(南高山城)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문헌비고(文獻備考)’에 따르면, 남고산성은 901년 후백제의 견훤(甄萱)이 쌓았으며 견훤산성·고덕산성이라고도 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또 동고사는 승암산에 위치하고 있는 데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말 경순왕의 아들이 출가한 사실이 전해져 후백제 견훤과의 관련이 추정된다.

한편, 서고사는 ‘동국여지승람’에 등재되어 있는 사찰로 만성동 황방산(黃尨山)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또 북고사란 명칭은 존재하지 않지만 진북동 어은터널과 서신교 사이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진북사(鎭北寺)라는 사찰은 1790년대 경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호남읍지’의 전주부에 등장하고 있는데 명칭이 북쪽을 지킨다는 뜻으로 북고사와 같은 개념이다.

이같은 전주를 지키는 4개 사찰의 개념은 전주를 불교적 수호관념을 투영해 보호하려한 불교적 신앙을 계승 발전시킨 견훤왕의 의지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후삼국 최대 서적을 보유한 전주, 문화수도를 보여주다

후백제왕 견훤은 수도 전주를 최대의 지식문화수도로 만든 문화군주였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지은 ‘청장관전서’에는 전주가 후삼국 시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책을 보유한 지역이었음을 서적이 당한 참변에 대한 기록을 통해 알려주고 있다. 즉, 그는 우리나라에 매우 많은 서적이 있었는 데 이들 3천년 역사중 서적이 사라지게 된 역사상 2대 참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당(唐) 나라 장수 이적(李勣)이 고구려를 평정하고는 우리나라의 문물이 중국에 뒤지지 않는 것을 시기하여 동방의 모든 서적을 평양에다 모아놓고 모두 불태워버렸으며, 신라 말엽에 견훤이 완산(完山) (지금의 전주)을 점령하고는 삼국(三國)의 모든 서적을 실어다 놓았었는데, 그가 패망하게 되자 모두 불타 재가 되었으니, 이것이 3천년 동안 두 번의 큰 액(厄)이었다.” 이덕무, ‘청장관전서’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 조법종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

사료에 나타난 서적의 참화 첫 번째 사건은 고구려의 책이 당나라 장수 이적에 의해 불탄 사건이고 두 번째 사건은 견훤이 후백제 왕도 전주에 모은 책이 당한 참화를 설명한 것이다. 비록 서적이 사라진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역설적으로 이 사실은 전주가 우리역사에서 서적의 도시임을 보여주고 있다. 즉, 후백제 견훤왕이 후삼국통일 수도를 꿈꾸며 전주를 화려하게 조성하고 이에 부응하는 학문과 문화도시로서의 품격에 걸맞는 서적을 모아 당대 최대의 도서관을 만들어 기록을 보존한 전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이 후백제 왕도 전주는 유교의 사령 즉, 기린, 거북, 용, 봉황이 먹이고 지켜주는 도시이자 불교의 사방수호 사찰인 남고사,동고사,서고사,진북사(북고사)가 수호하는 공간이었다. 또한, 견훤왕은 삼국의 모든 책을 전주로 모아 우리나라 최대의 지식문화 수도로서의 위상을 만들어낸 문화군주였다. 또한 당대 최고의 기술자들을 모아 후삼국시기 최고의적 공간구성을 이루어 통일수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제 후백제 견훤왕의 의지와 포부가 우리시대로 계승되어 새로운 아시아문화심장, 기록과 지식문화의 수도로서 전주가 거듭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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