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하고픈 영화는 무얼까
나, 아니면 타인을 위한 것?
답을 찾을 때까지 계속할 듯
“남들이 모르고 있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라고 쓰인 편지를 양양은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낭독한다. 양양은 우연히 얻은 카메라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찍기 시작한다. 그의 삼촌이 왜 뒷모습을 찍냐고 물으면 양양은 “삼촌이 뒷모습을 못 보는 것 같아서요” 라고 답한다. 아이다운 대답 같지만 사실 꽤나 철학적인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의 장례식이 등장 하면괜히 롤랑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 에서 사진가를 죽음의 대리인이라고 표현한 말까지 떠오른다. 양양의 행동은 세계의 절반을 타자의 시각으로 인식해 도출한 현상을 다시 재인식하며 삶을 완성하는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카메라>
이 영화는 대만영화감독 에드워드 양의 <하나 그리고 둘> 이라는 작품이다. 2000년에 제작된 이 영화는 18년 만에 한국에서 재개봉을 한다. 에드워드 양은 영화가 시대를 말하는 방법에 있어 가장 훌륭하다고 평가받았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의 감독이기도 하다. 에드워드 양 을 무척 좋아하는 나는 깨끗하게 디지털 리마스터링 된, 이미 수십 번 본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을 보기 위해 경주 출장을 가기 전 부산영화제에 들려 영화를 본 후 부산에서 택시를 타고 경주까지 갔던 적도 있다. 아쉽게도 에드워드 양은 십 여년 전 세상을 떠났다. 고령가> 고령가> 하나>
누군가 내게 왜 영화를 하고 싶어 하냐고 묻는 다면 아마 양양과 같은 대답을 내놓진 못할 것 같다. 온갖 미사여구와 수식을 동원하여 탄복할 만한 대답을 내놓기 위해 시간을 더 달라고나 하지 않을까 싶다. <하나 그리고 둘> 의 재개봉 소식을 듣고 나는 왜 돈도 못 벌고 시간만 어영부영 보내고 있으면서 계속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할까 조용히 생각해봤다. 십대 때는 오로지 영화가 좋았을 뿐이고, 이십대에는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순 없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보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을 뿐이고, 삼십대인 지금은…. 이렇게 돈도 못 벌고 시간만 어영부영 보냈던 게 아까워서 꾸역꾸역 하는 것이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너무 시시하지만 솔직한 심정이라 반박을 못하겠다. 하나>
할머니의 죽음 직전까지 아무 말도 못했던 양양은 장례식장에서 편지로 구구절절하게 말을 한다. 차마 하지 못했으나 결국은 뱉고야 마는, 그리고 그 과정까지 카메라라는 도구로 타자의 세계를 인식하는 양양이라는 주체의 성장을 화면 너머 바라보는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영화는 무엇인가. 그것은 나를 위해서인가, 아니면 그것을 바라보는 타자를 위해서인가. 아직 답은 정해지지 않았지만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알아가기 까지 나는 계속해서 이 일을 해 나갈 듯 하다. 그 일련의 과정을 마무리 할 때쯤 누군가 내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양양과 같이 순수하게 대답했으면 한다. 내가 태어난 이유, 나의 쓸모, 누군가와 함께 노동하며 살아갈 가치, 이 모든 것들을 한큐에 설명할 수 있는 답이면 참 좋겠다.
1년 동안 1650자라는 글자에 나의 사고와 어떤 지침을 담기엔 턱없이 모자랐지만 매번 쓰면서 어떤 가치에 대한 생각을 하고 만다. 그 가치를 찾아가는 것 또한 위에서 말한 영화를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과 함께 해야 할 듯 하다. 모든 쓸모와 가치를 위하여 글을 읽으신 독자분들도 각자의 이유를 찾으셨으면 한다. 좋은 지면을 주셔서 감사하단 말씀을 끝으로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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