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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2018 시민기자가 뛴다] 홍성모 화백의 '해원부안사계도' - 길이 56m 부안 풍광서 휘몰아치는 근원을 찾는 부르짖음

계화도부터 줄포생태공원까지
해안선따라 83km 화폭에 담아
젊은 시절 심장질환 극복 이후
동양화가로 전환… 35년 화력
새단체장 취임 맞춰 군청 걸려
고향 향한 애틋한 혼신 공개돼

▲ 홍성모 화백이 작업실에서 해원부안사계도를 작업하고 있다. 홍 화백은 계화도에서 시작하여 줄포생태공원까지 해안선을 따라 총 83㎞를 화폭에 담았다

기세(氣勢)다. 홍성모 화백의 <해원부안사계도(海苑扶安四季圖)> 에서 본 것은. 지금까지 숱한 그림을 보아왔건만, 그림 속에서 기세를 본 것은 처음이다. 높이 1m, 총 길이 56m나 되는 방대한 크기에서 오는 압도감만은 아니다. 그것은 큰 믿음의 뿌리이며, 크게 분발하려는 의지, 그리고 크게 의심하는 뜻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다. 정성과 믿음이 한결같은 이가 아니면 결코 찾아지지도, 보이지도 않는 문. 그 문을 만 사람에게, 문 안을 들여다보고자 하는 온 우주에 오늘에서야 활짝 열어놓게 된 것이다.

홍성모 화백(56)은 2016년 10월, 부안에 들었다. 곰소의 젓갈식품센터 2층 빈 곳을 빌려 주중 사나흘 간 서울에서 내려와 머물며, 계화도에서 시작하여 줄포생태공원까지 해안선을 따라 총 83㎞를 화폭에 담았다. 부근의 찜질방에서 투숙하고, 겨우 화장실만을 왕래하면서 고향인 부안을 붓끝으로 종주한 셈이다. 본디 눈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완성이 있는 곳이 아니면 머무르지 않는 법이다. 그러기에 눈과 마음이 침침하여지고, 두 번이나 췌장에 문제가 생기고, 과로로 쓰러져 병원 신세를 지면서도 계속된 대장정이다.

5년 전 위도 상사화를 보고 나오면서라 했던가. 겸재 정선이 금강산을 보며 영조 대왕을 위해 <금강전도> 를 그리기로 작정한 것처럼, 화백은 부안 군민을 왕이라 생각하고 부안의 바다를 그려 바치리라 마음먹었다. 죽막동 사자바위와 어우러진 바다가 하늘이 내린 정원 같아서 이 바다에 깃드는 봄, 여름, 가을과 겨울을, 고향의 바다를 이 생에서 살피고자 했다. 그래서일 게다. 한 획을 발전시켜 남은 곳을 덜어내고, 부족한 곳을 채워 넣는 대원칙이, 두루 영고성쇠의 원리까지 통하고 끊임없이 변화해 나아가는, 언제 어디서나 그러한 이치가 화백의 그림 속에는 있다.

“나의 고향은 부안입니다.”

붓을 든 내내 화백은 말한다. 실제로 그의 고향이 부안군 백산면이지만, 화백의 어조에서는 송아지가 입을 크게 벌린 채 어미를 부르는 소리가 난다. 추사 김정희의 말대로 가슴속에 서권기(書卷氣)가 있지 않으면 가히 대어볼 수도 없는 붓끝에서 나는 소리다. 그의 희어진 머리만큼이나 본래의 고향, 고향으로 돌아가는 부르짖음. 천지만물 생명의 근원자리이면서, 모든 이들의 궁극인 뿌리 자리. 그 자리를 애타게 찾는, 혹은 찾으라는 하나 된 외침. 아이가 어미의 젖꼭지를 빠는 힘이 내재해 있는, 그의 말이 단순한 말이 아닌 주문처럼 들리는 것도 그 때문일 거라.

▲ 해원부안사계도 속 부안의 풍경.
▲ 해원부안사계도 속 부안의 풍경.

그러고 보면 화백의 그림은 조선 명종 때 격암 남사고가 남긴 한국의 역사서이자 예언서인, <격암유록> 에 수없이 나오는 구원의 활방(活方)인지도 모르겠다. 큰 병이 큰 약이 되기도 하듯, 알게 모르게 곪아버린 현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약이 되는 자리. 즉 어지러운 심신과 떠도는 혼백을 안정케 하는 안식의 자리 말이다.

고향을 부르는 소리를 화백은, 사람으로 말하면 뼈대가 되는 ‘선(線)’에서 찾는다. 선이 없으면 기운이 생동하지 못하고, 흙무더기처럼 후르르 무너져버린다 했던가. 그러나 선을 긋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먹색이라고, 화백은 반복해서 붓을 누르는 목소리를 냈다. 먹색이 탁하지 않고 맑아야 그림을 보는 이의 정신이 맑아지고, 먹 냄새에서도 친근함을 가질 수 있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잘 개인 그을음으로 만든 먹을 써야 한다. 생묵이 아닌 하루 재워둔 숙묵을 쓰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붓의 속도에 따라 먹이 한지 깊이 들어가지 않고 떠 보이므로, 붓을 쓸 때도 늘 삼가야 한다며 화백은 소탈하니 웃는다. 어려운 바를 먼저 하면 뒤에는 쉬워진다는 원리를 아는 이의 웃음이다. 그리고 머물러 있지 않되 머물러 있는, 이른바 동(動)·정(精)이 하나로 둥근, 달과 같이 편안한 얼굴이다. 그 얼굴에서 화선지와 판을 배접할 때 쓰는, 오랜 보존을 위해 그가 썩힌 풀 냄새가 묻어난다.

화백이 처음부터 동양화를 그린 것은 아니다. 많은 화가가 그러하듯 화백 또한 먼저 접한 것은 서양화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동양화를 접하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선천성 심장병 질환으로 쓰러지고 난 후부터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병원비가 무색했으나, 당시 원광대학교 전 동문이 1000원씩 모아 무사히 수술을 할 수 있었다. 두 번 사는 인생이기에 화백은 그 후로 ‘새 생명 찾아주기 운동’으로 <전북도민일보> 와 함께 난치병 어린이 돕는 일에 앞장서기도 한다.

그렇게 나무 그림도, 바위 그림도 안 배운 상태로 동양화를 시작한 것이, <청산계곡> 이라 제목을 붙인 그림으로 1986년 뜻하지 않게 미술대전 특선작으로 뽑히게 된다. 서양화의 면(面)과 동양화의 선(線)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던 때다. 다만 처음 가본 강원도 영월에 눈이 하도 많이 와서 산 계곡에 물안개가 짙었더라는데, 보이는 대로 꾸미지 않아도 무릉도원 같고, 한 폭의 그림 같은 산과 계곡을 그리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서양화에서 자주 다루던 인물화를 벗어나 여여한 자연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그런 화백을 취재하러 온 당시 <전북일보> 이해석 기자와는 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도 벗하며 살고 있다.

“심장병 수술 이후 동양화 35년 화력(畵力)이면, 이제는 고향을 담아도 되지 않겠는가, 싶더구만. 좀 더 있으면 손 떨리고, 눈도 침침해질 테니, 그나마 힘 남아 있을 때 부안 군민을 위해 고향에 대한 애틋한 혼신을 내어줘야 할 것 같았어. 고지식한 묘사도 늙어지면 나중엔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니.”

<해원부안사계도> 는 이렇게 완성되었다. 군민을 왕으로 생각하여 그린 그림. 붓을 댈 때 자신을 속이지 않는 데서 시작하였으므로 엄정하다 하지 않을 수 없는 그림. 서해 바다 물결 하나, 소나무와 정자 하나도 그림을 보는 이들이나 그림을 그린 이나 서로 상응하는 기가 있는 그림, <해원부안사계도> . 만물의 원리가 변치 않는 가운데, 그 동정이 변화하고 생기와 운치가 발산됨을 온전히 붓으로 드러낸 그림.

▲ 김형미 시인·전북작가회의 사무처장
▲ 김형미 시인·전북작가회의 사무처장

민선 7기 부안 자치단체장 취임식에 맞춰 부안군청 로비에 걸리게 될 <해원부안사계도> . 그의 그림을 보든 보지 않든 모든 이들이 근원으로, 뿌리인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리가 들린다. 외롭고, 아프고, 고뇌하고, 정한 있는 이들의 병이 낫는 소리다. 아이가 어미의 젖꼭지를 빠는 힘으로 내는 소리.

그러니 보라. 거대한 우주의 힘을 몰아오는, 그의 그림에는 여지없는 기세가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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