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이 정리된 생각은
전북이 잘할 수 있는 데
더 집중해야 한다는 것
‘타향에서’ 칼럼을 7번째로 쓴다. 어느덧 마지막이다. 칼럼을 쓰는 동안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을 가져보고자 애썼다. 그간 나의 시선을 살펴보니 대부분 아래에서 위를 보고 있었다. 거주하는 전주의 물리적 위치가 서남부이기도 하였지만 향인에게 수도 서울은 늘 높은 곳이다.
바라보는 초점도 하나였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전주의 생각, 전북의 사고만이 가득했다. 하이데거였던가, 언어란 존재의 집이라고. 한 번도 전북으로부터 떠남을 선택하지 않은 내게 고향은 영혼의 존재소이자, 세상을 바라보는 유일한 창이었다. 고향에서 나고 자라고 배우고 직장 생활을 하면서 다른 지역과 비교는 곧잘 했지만 전북인의 시각이 아닌 다른 눈을 가지기 어려웠다. 그것이 솔직한 고백이다.
서울에서 생활한지 5년이 되었어도 마찬가지다. 몸은 서울에 있지만 내 정신은 여전히 전북에 머무르고 있다. 고향을 떠나와 다른 지역에서 계속 거주하는 자에게 요구되는 객관적 시선이 아직 구축되지 않았다. 기존의 전라북도 중심의 사고체계를 극복하지 못하면 아무리 서울에서 살아도 전북인의 시각이 지배적일 수밖에 없다.
‘타향에서’라는 칼럼을 쓰면서 처음으로 바깥에서 안을 보려고 했다. 서울에서 고향을 보는 것이다. 칼럼이 내게 강제했던 타향이라는 앵글은 이산(離散)된 자에게 주어진 정신의 디아스포라였다. 고향에서 외부를 보아왔던 ‘나’는 이제 중요한 타자(significant other)가 되었다. 만들어진 타자는 본래의 나와 맞닥뜨린다. 그 와중에서 나와 타자가 교환했던 가치와 이념들은 상호 주관성의 그물에서 만났다. 이 사고의 전환과정을 통해 타자의 시각이 요구하는 ‘고향에 대한 애정 어린 객관성’을 어느 정도는 확보할 수 있었다.
지난 반년 동안 4주에 한 번씩 극심한 ‘열’을 앓으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란 말을 믿으면서 타자의 시각으로 여러 고민들을 해보았다. 그 중 가장 큰 화두는 시대정신(zeitgeist)이었다. 우리 시대가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미래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 이들은 뚜렷한 해법이 있지는 않지만 공기처럼 우리가 늘 부딪혀야 하는 명제들이다. 쉼 없이 고뇌하며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 바로 시대정신이다. 또 묻는다. 나의 중요한 타자여, 그대 시대정신을 구하는가.
또한 고향의 유장한 아름다움도 엿봤고, 새로운 추세와 고향의 발전전략도 연계시켜 보았다. 심하게 변동하는 세상의 문법도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했다. 그 사이 정리된 생각은 현재 전북에서 하는 것처럼 전북이 잘 할 수 있는 일에 더 집중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북이 가지는 블루오션으로서 농업, 식물, 생태, 관광 등의 가치가 아주 크게 보였다.
타향이 고향과 아무리 지리적 격리를 요구한다 하더라도 타향에 있을 때 고향이 더 찾아진다. 국경지역인 변방의 애국심이 더 높고, 경계지역의 지역정체성이 더 명확하듯이 말이다. 타향에서의 기의(記意)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루이스 스티븐슨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보다 ‘희망’을 가지고 계속 여행하는 것이 더 좋은 일이다. 진정한 성공은 열심히 노력하며 일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난 6번의 칼럼에서 잠시 갖게 된 ‘타자의 다른 시선’으로 행한 고민들을 모두 쓰지는 못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다. 그러나 그 타자의 시각이 변주했던 고향 사모곡은 계속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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