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을 자주 다니던 50대 때의 일이다. 모악산을 가려고 중앙시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데 무심코 뒤돌아보니 뒤편 안경원 유리창에 A4용지 2배 크기의 종이에 매직펜으로 쓴 글자가 눈에 띄었다. “내 생에 최대의 자랑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섰다는 것이다.” - 골드 스미스
나는 일행인 친구에게도 읽어보라고 했더니 글을 읽고 난 그 역시 잠시 감회에 서린 표정이었다. 그 친구는 지난 20여 년간 증권에 손을 대 수억 원의 손해를 보고 의기소침하여 급기야 자살까지 생각했던 사람이고, 나 역시 질병으로 졸지에 성치 못한 몸이 되어 실의에 빠져 있던 때니 어쩌면 이 글은 우리 이야기 같아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글은 수년이 지나도 그대로 부착되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골드 스미스’는 영국의 유명한 작가로 영국의 명문 예술대학의 이름이 ‘골드스미스 대학교’라고 명명되었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 글을 써 붙인 안경원 주인은 비록 속칭 안경판매업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어딘가 속이 깊고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 세월은 흘러 다시 20여 년이 지났다. 내가 사는 곳도 개발이 되어 각종 상가가 들어와 성업 중이었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 우연히 우리 집 옆의 안경원을 들르게 되었다. 60대 중반으로 보이는 주인은 지성인다운 점잖은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잠시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여기 말고도 시내에 안경원을 하나 더 갖고 있다고 했다. 어디냐고 물었더니 중앙시장 시내버스 승강장 옆의 안경원이라는 게 아닌가?
20여 년 전 창문에 ‘골드 스미스’의 글이 붙어 있던 그 안경원이 아닌가? 나는 깜짝 반가워 그 이야기를 했다. 원장도 맞다고 반색을 하였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곳 안경원 벽에도 ‘헬렌 켈러’, ‘켄블랜차드’ 등 유명인들의 명언들이 자필로 써서 붙어 있었다. 그는 전북과학대 안경학과 교수로 재임하다 정년퇴직한 분인데, 중앙시장 안경원 창문에 붙어있는 ‘골드 스미스’의 명구에 얽힌 일화를 말해주었다. 강의가 끝나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떤 남학생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인사를 꾸벅하며 “저는 이번에 징집 영장이 나와 입대하게 되어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하면서 뜻밖에도 자기가 이 대학에 들어오게 된 동기를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는 몇 년간 자기가 원하는 대학입시에 번번이 실패하자 부모님 뵐 낯도 없고 실의에 빠져 구이저수지에 가서 빠져 죽으려고 결심하고 시내버스를 타려고 중앙시장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안경원 창문의 ‘골드 스미스’ 명언을 읽게 되어 자살을 포기했고, 그때 안경원에 들어가 사장님을 뵈려고 했더니 대학 강의 차 출타 중이라는 말을 듣고 이런 분한테 안경학에 대한 교육을 받아 장차 안경사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여 이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말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어쩌면 종이 한 장에 글을 써서 유리창에 붙여 놓은 것이 새파란 젊은이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하고 장래 진로까지 열어준 셈이다. 그는 이 곳 안골로 이사 와서도 자율봉사회장으로서 길거리 청소, 가로수 정비 등 봉사를 수년째 해오고 있다고 했다. 나는 밝은 사회로 나가기 위해 폭넓게 봉사활동을 하는 분이 우리 동네 바로 이웃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수년간 모르고 지내왔다는 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봄에 만개한 벚꽃처럼 우리 동네가 더욱 환하게 밝아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학철 수필가는 2013년 ‘대한문학’으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이사, 영호남수필문학회·한국미술협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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