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표를 끝낸 직원이 고속버스 기사에게 안전운행 하십쇼! 하고 외치며 퇴장하는 짧은 순간, 나는 일인용 좌석에 앉아 얕게 심호흡을 한다. 언제 세 시간을 버티나 하는 막막함과 동시에 마음 편한 내 공간으로 간다는 안도감을 안고 스스로 조용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버스가 서서히 출발하고 안내 음성이 깔리기 시작하면 얼룩진 창밖으로 대구 풍경을 훑어본다. 하지만 퇴근 시간 도로로 끝없이 밀려드는 저 긴 행렬들이 내 머릿속을 메우는 듯해 조금만 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린다. 될 수 있으면 빨리 고속도로로 진입해 마음이 차분해지기를 바라면서, 중간에 정차하는 서부정류장에서는 몇 명이 타던지 눈을 꾹 감고 있다.
2007년부터 2017년 지금까지 십 년 동안 대구와 전주를 오가며 살고 있다. 대구는 본가가 있는 곳이고, 전주는 대학을 갈 때 거쳐야 했던 도시지만 지금은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기차를 타고 다니면 좋겠지만 환승 시간을 합하면 오히려 비효율적인 탓에 나는 늘 고속버스만 타고 다니고, 지금은 편해져서 기차가 오히려 불편하다.
졸업한 지 꽤 지난 지금은 명절과 제사 때만 가까스로 본가로 내려가는데, 막 입학했을 땐 한 주를 빼먹으면 무슨 일이라도 날 것처럼 급히 대구로 출동하곤 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친한 동기들도 금요일만 되면 집으로 내려가 버려서 놀 사람이 없다는 게 심각한 이유 중 하나였다. 금요일 수업이 없었던 나는 망설일 필요 없이 목요일 수업이 끝나자마자 기숙사 짐을 싸들고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금암동 고속터미널로 쫓아갔다.
그렇게 하도 자주 타니 이젠 검표원과 기사 얼굴도 외우고, 거창휴게소와 함양휴게소 두 곳은 정말 익숙한 곳이 되었다. 다시 출발하는 고속버스 안에서는 온갖 풍경을 다 보았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자주 했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 거지?, 지난주까지 멀쩡했던 저 산이 왜 무너졌지? 어라, 골프장을 짓고 있네? 오늘은 왜 나 혼자 버스에 있지? 저 기사분은 도대체 언제 쉬어? 하는 그 다른 느낌 속에서 나는 살았다. 죽음의 88고속도로 위를 달리며 평일이든 주말이든 명절이든. 그런 고속버스 안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간은 장수군으로 들어가는 터널 속이었다. 그 터널만 지나면 높은 산이 끝없이 나왔고, 작은 마을들이 모여 지붕으로 띠를 잇고 있었다. 오랫동안 그 길을 오갔지만 표지판을 눈여겨보지 않은 탓에 그곳이 장수라는 사실을 학과 문학기행 때 동기들의 말을 듣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때 친구들은 남원, 김제, 오수, 부안, 고창 등 다양한 지역에서 나고 자랐는데 나는 친구들이 사는 지명이나 동네 이름을 듣는 것이 신기했다. 특히 오수면에서 대규모로 닭을 키우는 행근이는 월요일만 되면 닭이 몇 마리 알을 낳았네, 걔들이 얼마나 컸네, 하며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친구들이 내게 대놓고 “야! 대구 사투리 좀 써 봐.” 하면 나는 니가 뭔데 써라 마라 시키고 있느냐며 버럭버럭 화를 냈지만, 내가 잘 모르는 말씨를 들을 때면 그 뜻과 리듬을 정확하게 알고 싶어서 대놓고 “머여, 어찌라고!” 하며 따라하며 놀곤 했다. 그런 일화들을 모아 재밌지 않느냐고 대구 집에 가서 한바탕 풀어놓으면 가족들은 너무 물들지 말라는 듯한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런 눈빛과 말들이 싫어서 대구에 가면 집에는 잘 안 들르고 동성로나 수성못으로 직행했다.
어느 날 밤늦게 귀가하다 오빠를 마주치면 넌 그냥 집 옆 산업대에 들어갔어야 했다는 말과 덤으로 핵꿀밤을 쥐어 박히곤 했다. 그때 나는 다시 한번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대구에서 학교를 다니면 아무것도 소중해지지 않을 테니까. 어찌 되었든 일요일 막차 시간 전까지 대구에서 꾹꾹 밟아 놀고 나서야 내 육신은 다시 버스 좌석에 앉을 수 있었고, 자동 세 시간이 지나면 멀쩡히 전주에 도착해 머쓱한 기분으로 짧은 터널 같은 버스를 빠져나오도록 설정돼 있었다. 좋아서 하는 일은 지치는 것도 좋았다.
그나저나 고속버스에서 내리면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관문이 내겐 큰 난관이었다. 밤늦게 전주고속터미널에 도착하면 굴러가는 비닐봉지조차 두려운 이방인의 얼굴이 되어서 “전북일보 건물 앞에서 꼭 380번대 버스를 타야 한다”는 동기들의 깨알 같은 조언을 잊은 채 교도소나 장례식장 앞에 내려 사색이 되곤 했으니 말이다. 우여곡절 끝에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시내버스 안에서는 갑자기 서럽고 우울해진 마음을 붙잡고 슬픈 노래를 마구 듣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태평히 바라보는 가게 간판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이 있다. 볼 때마다 정신적 피해를 따지고 싶었던 그곳, 동산동 우체국 못 가서 보이는 ‘거시기상회’였다. 컬쳐쇼크, 그냥 그런 말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기분이었다. 경상도에서 ‘거시기’란 말은 특정 무엇을 칭하는 데만 쓰는 터라, 그 간판을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지날 때면 미안한 마음만 든다. 이제 사라지고 없기 때문이다.
일주일의 반은 삼례에, 반은 대구에서 보내며 아쉬울 것 없는 이중생활을 하던 1학년 1학기. 그로부터 십 년이 흘렀다. 나는 멀리 있는 내 학교가 좋았고, 나 같은 애도 시 같은 걸 쓸 수 있어 기뻤다. 대학인데 대학로랄 게 하나도 없고 비 오기 전날 똥 냄새가 많이 난다는 것이 정말 힘들었지만. 난생처음 높은 철길을 지나는 기차를 보고, 가만히 소리를 듣고, 미친 듯이 붉은 노을에 입을 다물 수 없었던 비비정 풍경들, 친구들이 전주 놀러오면 자랑하며 데려갔던 전동성당, 경기전, 그리고 갈대가 아름다운 천변 길들, 남원 김제 오수 삼인방 친구들이 들려주는 듣도 보도 못한 극한 농사 체험들이 나는 즐거웠다.
고속버스 안에서, 수많은 터널을 지나서, 익숙하고도 낯선 길들 위에서 느낀 평온한 시간들이 안겨준 선물들을 나는 이렇게 글로 풀어놓고 있다. 대구에 가면 언제든 받아주던 친구들도, 삼례에 가면 뭐든 도와주려 했던 동기들도 이제 어떤 길에서든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된다. 그렇게 한 주를 보내야 마음 한구석 충만한 기분이 들던, 다시 학교로 돌아와 동기들과 낄낄거리며 돌아다닐 수 있던 시간들. 그 이후로도 가장 아름다운 날들을 전라북도에서 보냈다는 것이 묵직한 자산이다.
며칠 전, 내가 사는 동네 하늘 위에 북두칠성이 쏟아질 듯 떠 있었다. 얼마 뒤면 달도 크게 뜨는 추석이 다가온다. 이젠 자주 소식 듣고 싶은 식구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도 하고, 대구 친구들도 만나 한바탕 수다 떨고, 다시 고속버스를 타고 평온한 마음으로 휴게소에 들러 숨을 트고 싶다. 그 전에 고창, 부안 여자 동기들과 내가 사는 인후동에서 하룻밤 자기로 했는데, 무슨 썰들을 들려줄지 기대된다. 떠나야만 돌아올 수 있고 다시 디뎌야 나아갈 수 있는 길, 조금 평온하게 조금 쿵쾅거리며 나는 살아가고 있다.
쿵쾅 하나 더.
88고속도로명이 광주-대구 고속도로에서 ‘달빛’고속도로로 바뀐다고 한다. 달구벌과 빛고을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만든 그 이름, 정말 마음에 든다.
/임주아(시인)
* 201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광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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