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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작가회의와 함께하는 전라북도 길 이야기] 앉으면 글, 서면 길 - 김병용

• ‘길’을 찾는다는 것

자연이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한 길은 지구의 생김새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산길과 물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흐르는 좁고 울퉁불퉁하고 꼬불꼬불 가파른 옛길들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최초로 맺어진 역학 관계를 잘 보여준다. 이 관계를 때로는 거스르고 때로는 협상하며 인간은 길을 개척해왔다. 다리를 놓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사이의 격절감을 무화시켰고, 굽은 길을 반듯하게 펴기 위해 앞을 가로막는 산 한가운데에 터널을 뚫었다. 물길의 흐름도 돌리고 운하를 굴착했는가 하면 난바다 한가운데 뱃길을 내더니 마침내 하늘길까지 열었다.

왜 이와 같이 사람들은 집을 나서 길을 열었을까?

우선, 한무제 때 서역로를 열었던 장건의 경우나 ‘실크로드’, ‘차마고도’와 같은 교역로 혹은 마르코 폴로의 모험담이나 콜럼버스의 항해 등에서 볼 수 있듯 인간들은 전쟁과 동맹, 무역과 교류 등 직접적이고 실용적인 목적하에서 길을 나섰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림=신보름
그림=신보름

하지만, 자신의 말을 들어줄 사람을 찾아 천하를 주유했던 예수, 석가, 공자의 경우나 구도를 위해 구역(九譯)의 역경을 넘나들었던 현장, 혜초, 엔닌과 같은 구법승들처럼 추상적인 가치를 찾아 길을 떠난 이들도 인류사에는 수두룩하다.

또, 아문센이나 피어리, 텐징 노르가이나 라인홀트 메스너와 같은 극지 탐험가들은 인간의 질서 안에 들어와 있지 않던 야생의 땅에 기어이 발길을 들이밀었다.

이러고 보면 길을 나서고, 낯선 곳에서 난생처음 만나는 사건을 겪는 일이란 게 결국은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던져 남들을 위해 길을 닦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길을 찾는다’는 말이 수단과 방법을 강구한다는 뜻 이상, ‘비밀의 탐구’나 ‘진리의 추구’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이유가 또한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나 아닌 다른 이를 위해 몸을 던져 다리가 되고 길을 닦는 일,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일이라니…!

이런 면에서, 세상의 모든 길은 인간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땀의 결정이 빚은 소금길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각 시대별로 당대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에 대한 자연지리, 인문, 경제, 국방, 정치 지리적 인식의 총합이 실제의 지표에 그려낸 거대한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재 우리가 이용하는 세상의 모든 길은 인간들의 호기심과 필요, 욕망이 뻗어 나와 다져진 길이다.

이 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기 누가 사는가? 나는 그들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가? 이 길은 또 어느 길과 이어지는가?

 

• ‘길 들이다’라는 말

문학이란 사람들의 삶이 그려내는 무늬를 말과 글로 붙들어두는 인간들의 행위, 사람이 남긴 모든 자취마다 문학은 깃든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 알려져 있는 ‘길가메시 서사시’나 유럽 문학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오디세이아’가 길 위의 문학, 길을 찾기 위한 장쾌한 모험과 도전의 기록이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길 찾기란 이처럼 현실적인 동시에 추상적인 인간의 행위로 우리들에게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글’과 ‘길’의 친연성의 출발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는 호주 원주민인 애버리지니의 ‘송 라인(Song lines)’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본 산과 호수, 나무와 바위에 대한 기억을 길고 긴 노래로 엮어 흥얼거리고 또 그걸 후손들에게 암송하게 하였다. 이 노래를 배우는 어린이들은 아마도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의 풍경에 대한 상상을, 자신의 입이 부르는 노래를 자신의 귀로 들으며 머릿속으로 선조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으로, 보다 구체적으로 키워나갔을 것이다.

부른다, 노래를 부른다, 길을 부른다, 풍경을 부른다, 기억을 부른다. 그 노랫가락만큼이나 길고 긴 가락 속에는 아직 당도하지 않은 미래도 담겨 있으리라!

이처럼, 그들의 노랫가락 안에는 공간이 담겨 있고, 풍경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으며, 그 길을 먼저 걸었을 선조들의 여정이 또한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을 받아들이고 이해한 선인들의 감성을 이해하면서 자신들의 공간감과 공간에 대한 친연성을 자신들의 마음 깊은 곳에 받아들였다.

내가 어디 살고 있는가를 안다는 것은 곧 내가 누구인가를 자각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노래로 길게 이어진 길을 자신의 마음에 들이면서, 끊이지 않고 이어진 그 길을 걸어온 선조들과 나 사이의 연계선을 찾는 것. ‘송 라인’은 노래로 엮여진 풍경에 관한 기억이기도 하며, 그 기억이 전승되어온 길에 관한 노래이기도 하다. 애버리지니의 ‘송라인’은 구술문학의 전통이 갖는 아름다움과 유장함 그리고 그 전승 과정에 존재하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상상력의 전승에 대해 숙고하게 만든다. 왜 우리 선조들은 이 바위를 곰과 같다고 노래했을까, 저 강을 왜 은빛 강이라고 했을까, 라고 물으며 후손들의 상상력은 무한 증폭된다. 아마도 우리가 ‘글’이라고 하는 문학적 상상력의 출발은 이와 같이 길 위에서 또는 길을 상상하며 시작된 인간의 지적 행위였을 것이다.

동양 최초의 문학이론서라고 할 유협의 『문심조룡(文心雕龍)』에도 이와 흡사한 최초의 문명화된 인식이 드러난다.

하늘에도 무늬가 있고, 땅에도 꿈틀거리는 자취가 서려 있는데 어찌 인간의 마음에 무늬가 없겠는가!

 

글이 마음이 그려낸 무늬를 구체적으로 외화(外化)하는 것이라면, 마음에 파문을 일으키는 최초의 자극은 어디서 어떻게 발생하는가?

우리말 ‘길들이다’라는 말은 묘한 말이다. ‘길들이다’라는 말은 내가 무엇인가를 복종케 하고 나를 이해하게끔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반대로 내가 나를 둘러싼 환경을 이해하고 환경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자기 수긍을 표현하는 말일 수도 있다. 내 마음 안에 이제껏 존재하는 세상의 모든 길을 들여놓는 것, 너에게 가는 길, 세상을 이해하는 길을 들이는 것. 한 사람의 마음에, 생애 깊은 곳에 길을 들여놓으려면 당연히 길을 만나야 한다. 즉, 길에 나서야 한다. 길에 나선다는 것은 길을 향해 나가는 것, 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 길은 목적이며 동시에 과정이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리고, 이 복잡한 길과 길 위의 풍경들이 길에 나선 인간의 마음속에 들어와 파동을 일으키고 그 파동이 아로새겨진 인간의 마음이 결국 글을 쓴다.

 

• 서면 길, 앉으면 글

글이란 결국 길 위에 선 인간이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책상 앞에 앉아 찬찬히 자신의 마음결을 살펴 더듬더듬 그려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선후나 공간적 차이 등은 있을 수 있지만 이런 면에서 ‘길’과 ‘글’은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다. 글이란 결국 문자로 그려내는, 또 다른 세계 인식의 지도…. 길은 곧 글이 되고, 그렇게 그려진 몇 편의 글은 오래 사랑을 받으며 후학들의 ‘길’이 되어 계속해 뻗어나간다.

길을 걷는 것은 무엇보다 몸, 발바닥부터 손끝까지 사람들은 온몸의 움직임을 길의 흐름에 일치시킨다. 이렇게 온몸으로 길을 밀고 나가며 세계 인식의 밑그림을 획득한다. 이 경지를 나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의 단계라고 말하고 싶다.

길에서 돌아와 서탁에 앉아 글을 쓰는 일은 백지 위에 길을 그렸다 지우며 자신이 걸어온 길과 그때 가지 못한 길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원고지에 쓰든 자판을 두들기든 혹은 머릿속에 그리든 쓰기(writing)의 과정이며, 연상(imaging)과 심리적 투사(projection)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차츰차츰 길 위에서 주운 말, 숲을 헤치며 체득하게 된 경난(經難)의 깨달음을 통해 자기 나름의 정명(正名), 맥락(脈絡)을 취득하게 된다. 말하자면, 스스로 문리(文理)를 열어 나가는 것이다.

문리란 곧 울창한 언어의 숲에 자신만의 작은 오솔길을 내는 일. 작가는 그 스스로 길잡이가 되어 숲을 헤치고 나가야만 길을 낼 수 있다.

초입에 들어서는 일부터 종점에 도착하기까지 그 험난한 여정의 순간들이 모여 마침내 길이 되는 것과 발단에서 결말에 이르는 스토리텔링의 과정은 놀라울 만큼 흡사하다.

이런 면에서 작가란 곧 여행자다. ‘앉으면 글, 서면 길’로 살아가는 방랑자!

길 위에서 글을 구상하고, 글을 쓰면서는 걸어온 길을 바탕으로 새로운 길을 찾는 이들이 글쟁이인 터, 글쟁이는 곧 길라잡이기도 하다. 좋은 글은 작가의 긴 여행, 그의 몸과 마음이 걸어온 길을 통해 그려진다.

오늘 우리는 어느 길 위에 서 있는가, 어떤 글을 그려내고 있는가?

작가의 행로를 따라 함께 걷다 보면 필연, 우리는 어느 곳엔가 당도하게 마련이다.

그것은 풍경일 수도 있고, 사람의 마음일 수도 있으며, 사람들이 사는 마을일 수도 있다. 그렇게 글을 따라 길은 우리 마음 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길이 드는 것, 길이 나는 것이다.

 

/김병용(소설가)

* 1990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당선. 장편소설 『그들의 총』, 소설집 『개는 어떻게 웃는가』, 여행기록서 『길 위의 풍경』, 연구서 『최명희 소설의 근원과 유역』 등을 냈으며, 『길은 길을 묻는다』, 『전북의 재발견-길』, 『아름다운 순례길』, 『이순신 백의종군로』 등의 책임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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