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무주를 떠나 순천으로 이사했다. 행정적으로는 이제 전북 도민에서 전남 도민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의 절반 이상은 무주에, 전북에 체류하고 있다. 중요한 숙제 하나를 미제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미련 또는 사회적 책무로 따로 이삿짐을 꾸려 챙겨왔다. 바로 ‘정기용의 길’이다. 한마디로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에 지어 놓은 30여 곳의 공공건축물을 복원·재생하겠다는 계획이다. 무주의 산을 넘어, 강을 건너, 들을 헤치고 ‘자연과 인간이 서로 감응하는 정기용의 공공의 길’을 이어보려는 욕심이다.
무주군에는 ‘말하는 건축가’, ‘자연과 인간을 감응시키는 건축가’ 정기용이 설계하고 건축한 공공건축물들이 마을 곳곳에 산재해 있다. 사실상 국내에서는 전무후무한 공공건축 명소라 부를만하다. 건축을 공부하거나 직업으로 삼은 건축인들 말고도 일반인들도 찾아오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건축물들로 이끌고 안내하는 길도, 길잡이가 없다. 심지어 변형, 훼손된 곳도 있어 사실상 방치된 상태가 아닌가 오인된다. 심지어 무주군에서 나서 살고 있는 무주 원주민조차 존재조차 제대로 모르는 이가 허다하다. 하물며 정기용의 공공건축물이야말로 무주군의 품격과 무주 군민의 자긍심을 높여주고 지역 경제 활성화를 촉발할 소중한 지역 공유 자산이라는 가치는 동의받기도, 설명하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최근 그 가치를 충분히 공감, 통찰하고 있는 한국농촌건축학회가 나섰다. 이른바 ‘정기용 무주군 공공건축물 재생프로젝트’를 열심히 준비하고 있다. 무주군을 관류하는 남대천을 중심으로 산과 강과 들을 따라 ‘정기용 공공건축물’을 씨줄과 날줄로 잇는 산책로, 탐방로 등을 새로 조성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정기용의 공공건축물을 재조명․복원함으로써 공공이 공유하는 건축 자산으로서는 물론, 자연과 인간이 감응하는 농촌 공간 디자인의 혁신적인 사례로서 학술적 의미와 지역 브랜드 가치를 높이려는 목표다.
• 농촌다운 건축, 마을을 잇는 ‘정기용 길’
구체적인 재생 전략으로는 남대천을 따라 형성된 마을과, 그 마을마다 자리 잡은 공공건축물을 길로 엮고 잇는다는 그림이다. 남대천을 따라 물가에 자리 잡은 등나무 운동장, 무주군청, 농민의 집, 추모의 집 등은 하천에 가로놓인 다리를 산책로로 연결하면 모두 만날 수 있다. 기존의 무주 마실길과 연계하면 남대천이라는 수자원의 접근성과 활용도를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오지 산골 지역으로 척박한 무주군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최고의 지역 자산이다. 그 자연과 더불어 무주의 지역 정체성을 완성하는 건 산골 마을이다. 정기용은 바로 이 무주의 천혜의 자연경관, 그리고 인간이 모여 사는 마을들이 서로 조화롭게 감응하도록 공공건축물을 설계, 배치했다. 이러한 ‘정기용의 공공건축물’들은 그 자체로 사람들을 ‘아름다운 무주의 산골 마을’로 호객하는 최고의 스토리텔링 마케팅 자원이라 평가할만하다.
무주군과 업무 협약을 맺은 한국농촌건축학회는 한마디로 “정기용 공공건축을 통해 농촌다운 건축, 농촌다운 마을의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겠다”는 포부다. 정기용 공공건축의 철학과 기법이야말로 농촌 건축과 농촌 마을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최적의 사례지라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 원형을 복원하거나 발전적으로 리모델링함으로써 ‘농촌다운 건축’과 ‘농촌다운 마을’을 구현해보겠다는 것이다.
• 자연과 인간이 감응하는 ‘공공성의 길’
‘정기용’은 남다른 건축가임에 틀림없다. 당장 겉으로 드러난 주요 이력만 몇 줄 훑어봐도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금방 눈치챌 수 있다. 그는 애초 대학에서 건축학을 공부한 게 아니다. 학부에서는 미술을, 대학원에서는 공예를 공부했다. 당시 김수근 건축가에게 1년여 강의를 들은 게 건축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다. 1972년 프랑스로 유학해 실내건축, 건축, 도시계획 등을 본격 수학하고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 자격을 취득했다.
귀국한 그는 잠시 절망했다. 새마을운동으로 농촌의 초가지붕을 뜯어내고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새마을운동은 삶과 역사를 부정하게 만든 문화적 학살"이라고 그는 비판한다. 이후 아예 몸소 농촌 경제와 농촌 문화를 공부하고 흙집 기술까지 익혔다. 이후 평생 "건축은 삶을 조직화하는 것"이라며 자연 환경과 주민의 본래 삶을 거스르지 않는 흙의 철학을 실천했다.
이 같은 정기용 건축 철학과 실천의 정점에 무주군 공공건축 프로젝트가 놓인다. 당시 무주군수와 정기용 건축가가 무주 진도리 흙토담 마을회관 일을 계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1996년부터 2008년까지 10년 넘게 온갖 난관과 우여곡절에 굴하지 않고 프로젝트를 밀고 나갔다. 등나무로 스탠드에 그늘을 드리운 '무주 공설운동장', 천문대를 설치한 '부남면사무소', 면장실을 없앤 자리에 공중목욕탕을 새로 들인 '안성면사무소' , 세상에서 가장 밝은 납골당 ‘추모의 집’, 무주군 중심지를 한눈에 조망하도록 전망대를 갖춘 ‘농민의 집’, 서로 마주보며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 등이 대표작이다.
• 오래된 풍경을 저장하는 ‘시간의 길’
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 김해 등의 ‘기적의 도서관’도 정기용의 작품이다. "건축가가 한 일은 원래 거기 있었던 사람들의 요구를 공간으로 번역한 것이지 그 땅에 없던 뭔가를 새로 창조한 것이 아니다."라는 신념으로 도서관을 지었다. 2011년 3월,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정기용의 삶의 철학과 마지막 여정은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 로, 그리고 『감응의 건축』 등 ‘글 잘 쓰는 건축가’로 세상에 이렇게 울림을 주고 있다. 말하는>
“건축가가 하는 일은 궁극적으로는, 공간이 아닌 시간을 설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공간은 수단에 불과하고, 시간은 건축의 목적이 된다. 세월이 지나면서 건축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시간이다.”
무주에서 정기용의 공공건축을 잇는 ‘공공의 길’이 새로 만들어진다면 무주를 걷는 답사자, 산책자들은 뜻밖의 행운과 행복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정기용의 공공건축물을 잇는 ‘공공의 길’ 위에서 그동안 각자 잃어버렸던 시간 또는 시간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정기용의 ‘길’은 이런 속성과 효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길은 풍경을 저장하고 있다. 홈 파인 레코드판이 소리를 저장하듯. 그래서 사회학자, 인류학자들은 이렇게 오래된 길들을 그림일기(figure journal)라고 부르는 것이다. 길은 반복적 몸짓으로 탄생하며, 반복된 몸짓은 생존에 요긴했던 '가까운 것', '친근한 것' 들을 엮어주면서 생겨난다.”
부끄러운 자작시 ‘정기용 씨를 기억하는 무주군민의 일상 및 일생’에서 나는 이미 정기용의 길을 갈구하고 있음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지붕이 있는 버스정류장부터 공설납골당까지 / 이 모든 게 다 정기용 건축가가 지은 생사초월의 감응 건축인 걸 감사하리라 / 죽어도 산 유령처럼 무주의 일상을 영원히 즐길 수 있으리라 / 살아있는 무주군민들만 놀라지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고.
정기용은 “여러분 감사합니다. 바람, 나무, 햇살, 모두 감사합니다.”를 유언으로 남겼다. 나도 정기용 건축가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 “감사합니다. 바람, 나무, 햇살만큼.”
*정기석: 2016년 『詩와 경계』 신인문학상 등단. 저서로 『농부의 나라』, 『마을을 먹여 살리는 마을 기업』, 『귀농의 대전환』 등. <마을연구소(commune lab)> 소장. 마을연구소(commu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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