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중국행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인천공항에서 전주로 돌아온 적이 있다. 어처구니없게 비자 발급도 받지 않고 중국 여행에 나섰다가 당한 낭패였다. 1박2일의 짧은 여행기간에다가 목적지가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사는 연변이어서 국내 여행처럼 편히 여겼던 탓이다. 가까우면서도 멀고, 먼 것 같으면서도 또 가까운 곳이 연변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야 중국의 주요 도시 곳곳에 우리 기업이 진출해 있고 중국 여행지도 다양해졌지만, 1992년 중국과 수교 당시만 해도 중국사회에 낯선 한국인들에게 연변은 중국과 통하는 관문이었다. 연변의 남서쪽 끝에 자리한 백두산은 중국 관광의 필수코스였고, 민족의 풍습을 지켜온 공동체 문화가 살아 숨쉬는 연변 또한 한국 관광객들의 핫플레이스였다.
중국의 변방에 머물렀던 연변은 한국과의 수교 이후 급속한 발전을 꾀했다. 연변 내 관광객의 증가와 함께 한국기업의 투자가 이뤄지고, 많은 연변 교포들의 한국행 노무송출을 통해서다. 90년대 초까지 연변의 주도인 연길시마저도 비포장으로 먼지가 풀풀 날렸으나 지금은 국내 중소도시와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만큼 자동차가 북적거린다. 거의 모든 가정이 자가용을 보유하면서 오히려 교통체증을 걱정할 정도로 격세지감을 갖게 한다.
우리가 연변을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연변의 사회·경제적 발전 때문이 아니다. 연변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의 압박을 피해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우리 땅 삼아 재충전을 했던 곳이다. 청산리항일전승지·봉오동 항일전승지·일송정 등 독립운동의 근거지로서 많은 유적을 보유했다. 연변 교포들의 이런 민족적 자긍심은 오늘날까지 면면하다. 민족 학교들의 모습과 3.13만세 운동 등 항일투쟁사를 기억하는 역사전시관이 용정중학교에 세워져 있고, 연길시에 있는 연변박물관은 중국에서 우리 민족의 전통 풍속이 어떻게 지켜지는지 보여준다. 일본 유학 중 투옥돼 옥사한 윤동주 시인의 생가와 기념관을 만들어 민족혼을 일깨우고 있기도 하다.
연변이 지닌 이런 민족사적 특성 때문에 국내 각 자치단체와 연변간 교류가 활발히 이뤄졌다. 광역 단위 차원에서 강원도(1994년)와 충남도(2015)가 연변조선족자치주와 자매결연을 체결했고, 충북도(2008년)는 상호협력 관계를 맺어 교류하고 있다. 기초 자치단체 차원의 교류도 20여개에 이르며, 전국적으로 망라돼 있다. 전북에서는 대학을 중심으로 연변대학과 활발한 교류가 눈에 띈다. 전북대, 우석대, 원광대 등이 연변대와 다양한 형태의 결연 등을 통해 교류를 넓히고 있다. 그러나 전북 자치단체들은 연변과 거의 담을 쌓고 있다. 남원시만이 2002년부터 연변가무단을 초청하는 정도다.
전북 자치단체들의 그간 국제교류를 보면 별 실속이 없었다. 자매·우호결연 협약을 체결할 때만 요란한 채 유야무야 되거나, 교류 내용도 전시성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교류대상 국가를 선정할 당시 교류에 따른 효과를 면밀히 검토하지 않은 채 즉흥적으로 결정한 이유 때문이다. 전북도와 도내 14개 시군이 교류대상으로 삼고 있는 도시의 절반 이상이 중국에 치중해 있지만, 정작 동질성이 많은 연변은 없다는 게 그 반증이다.
남북협력이 가시화 되는 상황에서 연변의 교포들이 남북을 잇는 교두보 역할을 할 것이란 점에서 연변의 중요성이 다시 부각되고 있다. 일부 자치단체가 연변의 인적네트워크를 활용해 북한과 공동 프로젝트에 나선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연변의 독립운동사와 연변의 민족예술이 더욱 빛을 발할 것으로 본다. 가장 한국적인 도시를 자부해온 전북도와 전주시가 연변과 교류에 나서야 할 때다. 시대적 흐름이나 문화적 특성을 감안할 때 40개에 육박하는 전북의 중국 교류대상 도시에 연변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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