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와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가 2016년부터 시작한 민간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반가운 책들이 모였다. 공공기관·기업·단체·축제의 역사를 집대성한 백서·사사·년사·도록 부류의 책이다. 이 책들은 그 단체와 관련 없는 사람에게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한 단체(분야)의 삶과 문화가 오롯이 담겨 있는 이들은 지역의 생태를 온전하게 세우는 주춧돌이다. 게다가 이런 책은 대부분 비매품으로 발간돼 서점에서 살 수 없고, 해당 지역 도서관에서도 찾기 어렵다. 책을 발간한 목적이 보존하고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한 것이기에 안타까움과 반가움이 더 크다.
기증자는 김영순·김진화·문순옥·이만호·이영희·인춘후·임주희·채수현·최현숙 씨. 전주에 살거나 부모님이 전주에 살았던 이들로, 대개 “이런 책도 받아주나요?”라며 조심스레 문을 두드린 귀한 인연이다.
△행간에 숨은 지역 이야기
『신흥 40년사』(2008)는 1968년 전주시 고사동 한복판에서 ‘신흥공업사’로 시작한 ㈜신흥콘크리트가 한눈팔지 않고 걸어온 도전과 개척, 시련과 극복, 끈기와 창조의 역사가 빼곡하다. 회사의 발자취를 넘어 60년대 이후 전주·전북의 산업 동향과 국내 콘크리트 산업사가 4백여 쪽에 수록돼 있다. 경영진과 20년 이상 장기근속자, 전·현직 공장장·지게차운전자·영업과장·현장노동자 50여 명의 인터뷰는 읽는 재미를 더한다. 사명인 ‘신흥’이 창업주(이교성)의 모교인 신흥고등학교에서 비롯됐다는 것도, 60·70년대 벽돌과 시멘트를 배달하는 ‘말 구루마’(말이 끌던 수레)가 전주 시내를 활보했다는 것도 책을 펼치면 알게 된다.
『전주교도소 100년사』(2008)에는 1908년 경원동(현 전북대 평생교육원)에 있던 광주감옥 전주분감부터 전주감옥, 전주형무소, 전주교도소에 이르는 100년의 역사가 담겼다. 교도행정이 주요 내용이지만, ‘교정원로 초청 간담회’에 실린 증언들은 전주의 역사·문화 콘텐츠로 스토리텔링 해도 좋을 만큼 특별한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빨치산 두목의 여인으로 사형을 선고 받았다가 임신한 것을 알고 대통령 특사로 감형된 이야기와 석전 황욱(1898∼1993)이 유려한 붓글씨로 진정서를 써 살려낸 아들, 간첩죄로 수용된 조선의 마지막 황녀 이문용(1900∼1987) 등이다. 이 백서가 출판되지 않았다면, 전주시에 기증되지 않았다면, 다시 펼쳐 살피지 않았다면 귀한 얘기들은 책 안쪽 깊숙이 더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전주향토지』(전주문화원·1990)는 전주의 문화원형을 알 수 있는 귀한 내용이 가득하다. 책은 한 권이지만 낱낱이 풀면 일제강점기부터 풍남문·전주교·덕진연못·대장정거리·장날 등 전주의 옛 모습이 담긴 12장의 사진을 비롯해 1990년을 기준으로 한 전주 지명 풀이와 세시풍속과 특산물 등 도시의 이모저모를 샅샅이 경험할 수 있다.
문화·예술 관련 단체의 기록물은 다양한 사진과 글을 통해 지금은 만날 수 없는 이들의 생전 모습과 지역의 생활상까지 알게 돼 더 반갑다. 『전주대사습사』(1992)는 작고·현존 명창들의 한 때가 있으며, 수상자의 거리행렬 사진 속 전주의 옛 시가지 정경도 볼 수 있다. 다시 챙겨 읽어야 할 이 땅의 명창 이야기도 꽤 많다.
한국소리문화의전당이 개관 10주년을 맞아 그간의 예술경영 성과와 문화사업 경과를 기록한 『소리 10년, 예술 10년』(2010)은 사진작가 유백영 씨가 찍은 공연·전시 사진들이 화사하다. 경영·역사·예술·공간·미래·부록(기록)의 6부로 나뉜 책을 펼치면 복합문화예술공간으로 성장하며 겪은 녹록하지 않은 세월과 전북의 공연·예술사가 일목요연하다.
△함께 모여 높아지는 지역의 긍지
『전북연극사 100년』(전북연극협회·2008)은 끈끈한 생명력을 가진 이 땅 연극의 뿌리를 간추려 엮은 책이다. 판소리의 창극화에 결정적으로 공헌한 신재효(1812∼1884)부터 10·20년대 창극과 소인극 운동, 50년대 전북극예술협회, 60·70년대 박동화와 창작극회, 80·90년대 전주시립극단과 황토 등을 비롯해 2000년대 초반까지 전북 연극의 역사와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촘촘하다.
『전북민예총 10년사』(2014)는 전북 문화예술 운동의 한 축을 담당해온 ㈔전북민족예술인총연합 10년의 기록이다. 2003년 창립 이후 전북의 예술 담론과 문화 경향의 흐름을 살피고, 예술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진단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한 사유가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 자료집』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다섯 권이 기증됐다. 그해 영화제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두툼한 이 책들은 10여 년 정도로 출판 연차가 짧고 전주국제영화제 사무실과 영화제 마니아들의 책장에 많이 꽂혀 있어 희소성이 적다. 하지만 전주와 관련된 도서가 모두 있을 것 같은 전주시립도서관과 전북대학교·전주대학교 도서관에는 없다. 『2009 세계서예비엔날레 도록』이 몇 권 찾아지는 것과 비교하면 더 아쉽다. 전주를 대표하는 축제의 온전한 역사를 오래 지키고 싶다면 해당 단체뿐 아니라 지역 구성원 모두가 나서야 한다.
『전주교도소 100년사』와 『전주향토지』에는 일제강점기 호남 의병장 16명이 찍힌 사진이 수록돼 있다. 같은 사진이지만, 하나는 해상도가 좋은 대신 사진 설명이 ‘1910년 일제 침략에 항거하다 전주분감에 투옥된 호남 의병장들’로 짧다. 다른 하나는 사진의 질은 떨어져도 ‘일본의 소위 남한대토벌 작전에 끝까지 항전하다 체포되었다.’는 설명과 의병장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까지 자세히 서술돼 있다. 여러 사료를 비교·검토하면 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예다.
『전북예총사』(2011)는 1962년 창립부터 2010년까지 전북 문화예술사 50년의 기록이다. 선기현 회장은 발간사에서 ‘기록으로 남겨지지 않은 자료를 찾는 일의 고단함’을 꺼냈고, ‘지난날 우리의 지역문화예술은 우수성과 뛰어난 창조성에도 온전하게 보존 계승되지 못하고 장본인들과 함께 묻혀버리는 일이 많았다.’라며 안타까워했다.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가 시민과 더불어 추진하려는 마음이 이것이다.
△흔할 때부터 챙겨야 한다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고 귀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찢기고 퇴색되고 버려지면서 사람들과 멀어지다가 어느 심지 깊은 이의 손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살아남은 것이 희귀본이다.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이란 관용구는 옆에 있는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가 수집 공모전과 별도의 기증자들에게 받은 도서는 책을 좋아하는 이의 책장에 오래 꽂혀 있거나 애호가들이 아껴 놓은 책이다. 헌책방에 가끔 노출되기도 하며, 간간이 도내 도서관 귀퉁이에도 있다. 지자체나 해당 기관의 책장에는 당연히 있어야 하는 책이다. 소중하지 않은 기록물은 없다. 흔한 것도 귀하다.
기억은 흐릿해지고, 추억은 아련할 뿐이다. 기록된 것이 먼저 남는다. 기록물을 챙기는 손길이 분주할 때, 이 땅의 역사는 더 당당해진다.
/최기우 전주시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부위원장·최명희문학관 학예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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