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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대표 독립운동가 10인] "대한독립만세!" 목숨이 다하는 순간에도 뜨거운 외침

동학농민혁명 정신 계승, 도내 곳곳에서도 일제와 맞서

박준승, 백용성, 백정기, 김인전
박준승, 백용성, 백정기, 김인전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오.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 (독립운동가 손병희)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3.1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알린 만세운동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3.1운동의 마중물로 재부각되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전북 곳곳에서 일제에 맞서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에 전북일보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 전북지부와 함께 매주 한 차례에 걸쳐 도내 만세운동 근원지를 조명하고, 해당 자치단체의 기념사업 및 사적지 정비 계획을 소개한다. 그 첫 순서로 도내 만세운동을 주도한 대표 독립운동가 10인의 행적을 되짚어 봤다.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박준승’

임실 출신인 박준승(1866~1927년) 선생은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손병희 등과 함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외쳤다.

1890년 동학에 입교한 그는 1892년 삼례에서 있었던 교조신원운동과 이듬해 김제 원평에서 열린 척왜양창의 운동을 위한 대집회에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1903년 손병희의 일본 망명 후 전라도 책임을 맡아 박인호와 항일을 위한 포교에 매진했다. 3.1운동으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후에는 1926년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에 추대됐다.

△민족대표로 한국 불교 수호에 앞장선 ‘백용성’

백용성(장수·1864~1940) 선생은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 대표이자 어려운 불교 경전의 한글화를 처음으로 시도한 경전 번역인이었다. 3·1운동 당시 백용성은 한용운의 추천으로 민족 대표 33인이 됐다. 1919년 3월 1일에 백용성을 포함한 민족 대표들은 서울 종로의 태화관에서 민족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삼창을 했다. 이 일로 구금돼 고초를 겪고 1921년 3월에 석방된 백용성이 제일 먼저 한 일은 <금강경> 을 순 한글로 번역·간행하는 일이었다. 이후 삼장역회를 설립해 수많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간행했다. 1928년에 한글로 된 <화엄경> 을 간행하는 기념비적인 일을 해냈다.

△3.1운동의 정신적 지주 ‘문용기’

익산 출신인 문용기 선생(1878-1919)은 1919년 4월 4일 익산 장날에 일어난 3·1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박도현·장경춘 등 기독교 계통의 인사들과 만나 3·1운동 계획을 세우고 장날을 맞아 300여 군중과 함께 거리를 행진했다. 일제가 시위 군중을 무력으로 진압하려 하자 문용기는 군중 앞으로 나가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연설을 했다. 이때 장에 나왔던 많은 장꾼이 그의 탁월한 연설에 이끌려 시위에 참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헌병이 휘두른 총검에 찔려 두 팔을 잃고 온몸이 난자당한 채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도 그는 계속해서 독립 만세를 부르짖다가 순국했다.

△자유를 꿈꾼 독립운동가 ‘백정기’

이봉창·윤봉길과 함께 ‘3의사’로 불리는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인 백정기(부안·1896~1934)는 국외에서 활발히 독립운동을 펼쳤다. 1923년 여름 일본 도쿄 조천 수력 발전소 공사장 노동자로 신분을 위장해 일왕 암살을 계획했다가 동경 대지진으로 실패하자 피난민 대열에 섞여 1924년 4월에 귀환했다. 같은 해 상하이로 넘어가 이회영, 정현섭, 유자명, 이을규, 이정규 등과 함께 ‘재중국 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자유혁명자연맹’을 조직한 다음 ‘흑색공포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을 강화해 대일투쟁을 전개했다

△독립에 향한 멈추지 않는 열정과 헌신을 보여준 ‘정현섭’

김제에서 태어난 정현섭(1896~1981)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했으며 7월 미국의회사절단이 내한했을 당시 일본의 침략상을 알리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의 추격을 받자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1930년에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조직하는 동시에 백범 김구와 함께 ‘서간단’을 결성했다. 당시 서간단은 친일파 숙청을 감행하는 등 본격적인 무력 항쟁을 도모했다. 1931년 1월에는 각국의 무정부주의자들을 구성원으로 ‘흑생공포단(BTP)’을 조직해 일본 영사관과 병영에 폭탄을 던지는 등 무력 항쟁을 이어갔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참된 지성인 ‘라용균’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재학 중이던 라용균(정읍·1895~1984) 선생은 백관수, 김도연 등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2.8 독립 선언’에 나섰다. 2.8 독립 선언에서 재정 분야의 책임자였던 그는 거사 뒤 관련자가 체포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돼 법제위원과 정무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 활동과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국회에서는 백봉 라용균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백봉 신사상’을 제정해 매년 모범적인 의정 활동을 한 국회의원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민족의식의 계몽가 ‘김승옥’

일제의 침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더는 글방에서 책을 볼 수 없었던 김승옥(고창·1889~1962)은 1916년 1월 은규선, 신기업 등 동지 혈서 동맹을 함께 주도한 이들과 고창청년회와 야학회를 조직해 민족의식을 키워 나갔다. 1919년 2월에 그는 고창청년회 동료들과 함께 고창 장날을 기해 만세 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했고 3월 21일 오전 11시 고창청년회 회원 및 학생 1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이후에도 고창청년회의 회장, 고창노동회 회장 및 노동학원장을 맡아 고창지역의 청년·노동운동을 주도하는 등 민족사상의 고취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독립을 위한 투철한 희생정신 ‘임규’

익산 출신인 임규(1867-1948) 선생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에 가담했다.

이후 그는 1895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게이오 의숙중학교 특별과와 게이오 전수학교 경제과에서 학문을 길렀다. 그는 1919년에 최남선, 최린, 현상윤 등과 함께 3.1운동을 계획하고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거사일 직전 일본으로 건너가 번역한 독립선언서와 통고문 등을 일본 정계와 학계, 언론계에 각각 배포했다. 1920년대 초에 보천교의 경성진정원 형평사장을 지내면서 보천교로부터 받은 5만 원을 라용균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목회자 ‘김인전’

김인전(1876-1923) 선생은 교회의 부흥을 위해 노력한 목사이자 교육 계몽운동가로 전주 3.1독립만세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전주의 3.1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됐는데, 그는 천도교 측과 연락해 만세운동에 참여할 교사와 학생들을 모아 3월 13일 정오 남문시장 광장을 중심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3.1독립만세운동의 배후자로 체포될 상황이 되자 그는 상해로 망명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후 임시정부 의정원의 재무예산위원, 정무조사위원 등을 거쳐 1922년에 제4대 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됐다.

△임실 오수 독립만세운동의 지도자 ‘이기송’

이기송(1888~1939) 선생은 1919년 3월 23일 임실 둔남면 오수리 장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오수리에서는 이미 3월 10일에 보통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돼 임실군 내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그러나 일본인 교장의 압력으로 더 이상 학생들의 만세운동이 일어나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기송은 오병용·이만의 등과 연락해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이날 장터에 모인 군중 앞에서 독립운동의 당위성에 대해 호소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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