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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독립현장] 전주 남문에서 만세 운동 울려 펴져

도로공사 인부들이 합세한 금산의 만세시위도

“나는 대한 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른 것도 죄가 된단 말인가”(유관순 열사)

1919년 3월 1일 손병희 등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만세를 삼창함으로써 3.1독립만세운동의 불을 지폈다. 한국인의 독립 의지를 국내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알린 만세운동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산됐다.

3.1운동의 마중물로 재부각되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상지로 꼽히는 전북 곳곳에서 일제에 맞서는 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에 전북일보는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광복회 전북지부와 함께 매주 한 차례에 걸쳐 도내 만세운동 근원지를 조명하고, 해당 자치단체의 기념사업 및 사적지 정비 계획을 소개한다. 두 번째 순서로 전주와 금산에서의 만세운동을 되짚어봤다.

 

전주 남부시장 매곡교 인근에 세워진 전주 3.1운동 발상지 기념비. 박형민 기자
전주 남부시장 매곡교 인근에 세워진 전주 3.1운동 발상지 기념비. 박형민 기자

△‘채소가마니에 숨긴 태극기’, 남문에서 만세 소리와 함께 펄럭이다.

1919년 3월 1일 전주군 천도교 교구실에서 은밀한 논의가 진행됐다. 서울에서 온 이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000여장과 함께 서울에서의 상황이 전주로 전달됐다. 천도교구 배상근, 김진옥 등은 이러한 사실을 임실의 천도교 교구실과 익산, 이리, 함열, 김제, 옥구, 무주, 정읍, 태인, 순창, 고창, 금산, 부안 등 각 지방으로 전파했다. 또 교인 민영진, 김태경, 서호순 등을 통해 예수교회 측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등 교회 조직을 통해 ‘만세운동’을 도모했다. 쉽지 않았다. 일제는 종교 단체 관계자들에 대한 집중 감시를 벌였고 일부 인물들이 일경에 붙잡혀 운동이 시작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3월 13일. 전주 남문 일원에서 장날을 기해 대규모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신흥학교와 기전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지하실 호롱불 밑에서 태극기 및 선언서 등을 준비하며 시간이 가는 줄 몰랐다. 예정일인 13일 일경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채소가마니에 숨긴 태극기를 남문시장까지 옮겨왔다. 이날 정오께 남문에서 울린 인경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행동이 개시됐다. 천도교, 예수교인, 신흥학교 및 기전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150여명이 남문시장부터 태극기를 들고 일제히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기전학교 여학생들은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나눠줬다. 이명수는 태극기를 양손으로 흔들며 “대한사람으로서 만세를 부르지 않는 사람은 반역자!”라고 독려했다. 대열은 삽시간에 불어났다. 남문에서 공립제2보통학교, 대화정을 지나 대정정, 우편국 앞까지 행진했다. 거리는 태극기와 독립 만세의 물결로 넘쳐났다. 독립만세운동은 자정을 넘겨 다음 날 새벽 2시까지도 독립만세와 검거된 애국 동포 석방을 외치며 곳곳에서 계속됐다. 이날 전주 읍내에서 검거된 인원만 30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 한 시민은 일본 헌병이 휘두른 칼에 태극기를 움켜쥔 팔이 잘려나가자 다른 손으로 태극기를 집어 올렸다. 그 팔도 잘리자 입에 태극기를 물고 만세를 외치는 등 독립을 향한 열망은 막을 수 없었다. 일경이 총·칼을 들고 막아섰지만 해산하지 않는 대열에 총을 발사하기도 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전주에서 독립만세운동은 차츰 분산적이고 장기적인 운동으로 들어섰다. 일경은 군중을 향해 물을 끼얹고, 소방용 갈구리로 전진하는 대열을 마구 찍기도 했다. 거리에 만세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일경은 빨간 잉크를 참여자들에게 몰래 찍어 모조리 붙들어 가뒀다. 상황이 어렵게 전개되자 애국시민은 행동을 밤으로 옮겼다. 기전여학교의 김순실, 김나현 등 여학생과 도민은 도청 앞에서 “대한독립 만세!. 구속한 애국동포를 석방하라”고 외쳤다. 이렇게 이어진 만세운동으로 일경에 붙잡힌 인원은 300명이 넘었다.

붙잡힌 애국지사들은 일경의 갖은 고문을 받았지만 민족의 긍지와 의지를 굽히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전주시는 이를 기념하고자 지역 3·1운동 발상지인 남부시장 매곡교 인근에 3·1운동기념비 등을 조성했다.

 

일제 식민지배에 항거해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만세운동을 기념해 전주신흥중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 박형민 기자
일제 식민지배에 항거해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만세운동을 기념해 전주신흥중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 박형민 기자

△도로공사 인부들까지 합세한 금산의 만세운동

1919년 3월 23일 금산면의 청년 김용술, 임승환은 만세운동을 계획한다. 이들은 “방금 세계 강국은 단체적. 일진적 행동으로 인해 성립하게된다. 아 조선은 건국 4000여 년으로 문명의 자격과 인의의 인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강제정치하에서 신고하는 것은 안일, 우매의사상과 매국적자의 소치인 것이다. 동포 청년은 간교한 적자의 행동을 배우지 말고 인도를 주창하여 압박정치하에서의 금수생활을 면하고 독립적 자유활동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정신을 가진 동포는 본일 오후 2시 우시장 상부에 집합하여 주동인물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이다”는 격문을 짓고 읍내의 장꾼들에게 배포한다. 읍내의 분위기가 무거워지고 요동쳤다. 김용술, 임승환이 20여명의 청년과 함께 “대한민국독립만세”를 외치자 주위의 수천 군중이 호응했다. 놀란 일경은 주동자인 김용술, 임승환을 체포하자 군중은 일시 해산했다.

25일 제원면 제원리의 청년 박영규는 23일에 있었던 읍내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는 감연히 앞장설 것을 결심한다. 박영규는 집에서 한지에 크게 태극기를 그리고 한쪽에는 국문, 한문으로 대한독립만세라는 글귀를 쓴 큰 기를 들고 나와 종과 큰 북을 쳐서 사람들을 모아 만세를 외쳐 불렀다. 자유와 독립을 외치는 200여명의 대열은 승리를 구가하면서 마을을 돌고 돌았다. 다음날 오후에는 다시 도로 부역에서 돌아오는 주민들을 마을 앞에서 맞이하며 “지금 한국은 독립하게 되었으니 일동은 다시 독립만세를 부르자” 고 말한 뒤 만세를 불렀다.

28일 금산읍에서 또 한차례의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이른 아침부터 헌병들의 경계가 펼쳐졌다. 일경은 이날 오후 상점은 문을 닫고 노점과 행상들이 짐을 싸니 무사히 장날을 넘겼다는 안도감을 보였다. 하지만 돌아갈 차비를 하려는 것처럼 서성대던 수 백명의 군중은 돌연 태극기를 휘날리고 만세를 부르며 질서도 정연하게 행진을 했다. 당황한 일경은 공포탄을 발사해 해산을 시도했지만 대열은 무너지지 않았다.

며칠 후 3월 31일. 복수면 곡남리 주민 김영호. 정재열. 오연구 등은 곡남리 앞길에서 인근주민 들과 함께 도로를 수리하다가 인부들에게 각 지방의 만세운동 상황을 설명했다. “우리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만세운동을 하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이들이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혀 부르고 앞장서니 같이 도로수선 공사에 나왔던 수영리의 주민 약 200여명이 대열에 합세했다.

도로공사를 감독하러 나왔던 일경은 이를 제지하려 했지만 김영호. 오연구 등은 이를 모른 체 환호성을 올리며 동분서주로 만세를 지휘했다. 얼마 후 진산면 헌병주재소에서 응원대가 급파됐다. 응원대의 출동으로 군중은 해산되고 김영호. 정재철 등 7명이 붙잡혔다. 하지만 만세운동은 야간을 이용해 혹은 산상에서 산발적으로 두고두고 계속됐다.

최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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