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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의 독립현장] 정읍, 호남 만세운동 불 지펴…남원, 민·관 함께 의거

‘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정읍지역의 3·1운동은 호남지역 독립만세운동에 불을 지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 헌병대의 무력 사용에도 불구하고 10일간 지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남원에서는 덕과면장을 비롯한 면사무소 직원 등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일본제국주의의 억압에 숨 죽이던 민·관이 함께 의거한 독립운동으로 평가된다.

 

△태인에서 불어온 불길…정읍 전역으로

 

3·1운동 100주년 정읍지역 만세운동 재현 행사
3·1운동 100주년 정읍지역 만세운동 재현 행사

1919년 3월 16일 태인 장날 정오를 기점으로 지역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졌다. 당시 3·1운동 직전에 고종황제 국상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던 태인면 청년 김현곤, 송수련, 박지선은 김성수와 송진우 등 당시 사회지도층 인사들을 만나 만세운동 계획을 알렸다.

또 민족대표들의 독립선언서를 정읍으로 가져와 뜻을 함께하는 청년들과 만세운동을 논의했다.

이들은 지역민들이 많이 모이는 태인 장날에 의거하기로 하고 각지의 동지들을 규합했다.

태인면사무소 서기를 지내던 김현곤은 송한용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수천장을 등사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이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시장 상인 및 주민들에게 건넸다.

만세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면사무소 인근에서 시장까지 행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시장에 모였던 수천명의 군중이 호응했다.

만세운동이 격화되자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고, 일부 대열이 주재소까지 나아가자 헌병 등이 총을 겨누고 군중을 폭행했다.

태인지역의 만세운동은 10여일 동안 산발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투옥된 애국지사들은 6월 또는 1년 반의 옥고를 치른 뒤에도 상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며 군자금을 모금하는 등 투쟁을 이어갔다.

태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정읍 전역으로 퍼졌다.

천도교와 기독교인 등은 3월 23일 정읍 장날을 맞아 만세운동을 계획했지만 전날 헌병대 급습을 받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4월 2일 읍내 장날에 덕천면에 사는 송기룡과 박제구 등 애국지사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자, 수많은 군중이 들고일어났다.

정읍은 독립운동을 이끈 참지성인으로 꼽히는 백봉 라용균(1895~1984) 선생을 배출한 고장이다.

1918년 일본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재학 중이던 라용균은 백관수, 김도연 등과 함께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할 계획을 세우고 ‘2·8 독립 선언’에 나섰다. 2·8 독립 선언에서 재정 분야 책임자였던 그는 거사 뒤 관련자가 체포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상하이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돼 법제위원과 정무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 활동과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국회에서는 백봉 라용균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99년부터 ‘백봉 신사상’을 제정해 매년 모범적인 의정 활동을 한 국회의원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다.

 

△민·관이 다 함께 “대한독립만세”

 

남원 3·1운동 기념비
남원 3·1운동 기념비

전북지역에서 가장 치열한 항일운동을 벌였던 임실 둔남면 인근에 자리한 남원 덕과면에서는 면장 등 면사무소 직원들을 중심으로 만세운동이 불붙었다.

덕과면장 이석기는 재종제 이성기, 면직원 조동선 등과 1919년 4월 3일 신양리 도화곡의 식수기념일을 맞아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비밀리에 각 면장에게 만세운동 참가 취지서 등을 보내며 동참을 호소했다.

이석기는 “우리 조선 국민도 독립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당시 도화곡에 나온 800여명의 면민들에게 만세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했고, 면민들이 호응하며 시위 행진을 벌였다.

무장한 일본 헌병대는 만세운동에 참여한 면민들을 억압하는 등 무력으로 군중을 해산시켰다.

이에 영향을 받은 남원지역민 1000여명은 4월 4일 장날 광한루에 모여 태극기를 선두로 만세운동을 벌였다.

기독교인들은 작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줬고, 천도교인들은 등사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다.

당시 일본 헌병대의 무차별 총격으로 시위 대열은 해산하고, 8명이 현장에서 순국했다. 또 10여명이 중상을 입고 20명이 붙잡혔다.

앞서 3월 2일 서울에서 온 독립선언서가 임실을 거쳐 덕과면 교인들에게 전달됐다. 남원읍 금리에 있었던 천도교 교구장 유태홍은 선언서 취지를 교인들에게 알리는 등 대한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3·1운동 길이 빛내리

정읍시와 태인청년회의소는 지난 1일 태인면 일대에서 독립만세운동 기념 행사를 열었다.

이날 기념식에는 1000여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여해 100년 전 나라를 되찾기 위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그날의 역사를 재현했다.

정읍시는 오는 8월 중 태인 3·1운동 등 정읍지역이 항일 민족운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내용의 학술대회를 열 계획이다.

남원에는 덕과면 3·1운동 발상지 기념탑과 함께 기념비가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동아일보사는 창간 54주년을 맞아 남원청년회의소의 협력을 받아 1974년 3월 1일 남원 3·1운동 기념비를 세웠다.

일제의 무단통치에 저항해 민족의 자주독립을 이루기 위한 1919 기미년 3·1 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1919년 4월 3일 남원 덕과면에서 이석기 면장 주도의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3일 덕과면 만세운동은 남원군민에게 많은 자극과 감동을 안겼다.

만세운동은 일제에게도 큰 충격을 줘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치로 바꾸게 하는 계기가 됐다. 또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는 밑거름이 됐다. 문화정치기간에 창간된 동아일보사는 이 같은 남원지역의 뜨거운 자주독립의 정신을 기리고 순국선열들을 추모하기 위해 남원청년회의소와 이 비를 건립했다.

국가보훈처는 2002년 11월 이 기념비를 현충시설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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