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짐을 정리하다가 어딘가에 끼워져 있던 비디오테이프를 발견했다. 테이프 위에 써놓은 글자가 지워져 읽을 수 없으니 정체도 모르겠거니와 지금까지 찾지 않았던 것이니 없어도 되겠지 싶어 정리(?)를 했다.
자료를 뒤적이다 여러해 전 도시재생 사례 취재로 찾았던 독일 칼스루에의 미디어아트센터(ZKM)를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미련 없이 버린 몇 개의 그 비디오테이프가 생각났다. 무슨 내용이었을까 궁금했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 순간의 선택이 후회됐다.
ZKM은 2차 세계대전까지 탄약과 화약을 생산하는 탄약 공장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70년대까지 제철소로 활용됐지만 유럽 전역에서 중공업 제조업체들이 서비스업으로 업종을 전환하는 시기에 이 공장 역시 문을 닫았다. 이후 20년 동안 방치되어 있던 공장이 미디어아트센터로 변신한 것은 정보과학에 일찌감치 눈을 떴던 칼스루에의 지역적 특성이 그대로 반영된 덕분이었다. 새로운 미디어를 주목했던 칼스루에시는 정보 통신, 방송시설, 문화예술 영역을 통합해 발전시키는 정책에 눈을 떴다. 세계에서 하나 밖에 없는 미디어아트센터의 설립도 그 결실이었다.
ZKM은 탄약 창고를 아름답게 변화시킨 건축적 외향도 훌륭하지만 미디어아트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과거의 자료를 기록하는 첨단시설의 구축이 놀랍다. 그 시설들 사이에서 더욱 주목을 끄는 것이 있다. ZKM 연구실과 미디어도서관에 쌓여 있는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이다. 이들 대부분은 현대 생활 속에서 이미 오래전에 쓸모가 없어진 낡은 TV와 녹음기 전축 등 매체기기들이거나 원형을 훼손당한 음반과 비디오테이프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오래된 자료들이 바로 ZKM의 미래와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ZKM은 “우리는 살아가면서 늘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 역시 다시 과거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과거의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고 주목하는 이유”라고 밝힌다.
ZKM은 이미 세계 곳곳에서 수집한 오래된 음반과 비디오테이프로부터 1만5천장의 음향영상물을 복원해냈다. 덕분에 이 귀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미디어도서관은 오래전부터 미디어계에서‘지상의 공룡’으로 불리고 있다.
낡은 공간의 재생이 유행처럼 이어지고 있다. 외형적 변신과 활용을 내세우지만 도시의 역사성과 공간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채 획일화 되어가는 재생공간이 너무 많다. 버려지는 비디오테이프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지혜를 우리는 왜 갖지 못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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