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부산,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시던 시어머니를 모시며 남편 영욱(60) 씨와 슈퍼마켓을 하던 재순(60) 씨. 시아버지마저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을 때, 앞만 보고 달려온 삶에 회한이 밀려왔다. 시부모님 요양과 부부의 건강을 위해 귀농을 결심한 재순 씨는 지난 2010년, 친정 부모님이 계시는 고향 산청으로 돌아왔다. 시부모님 병간호가 끝나자마자 친정엄마에게 찾아온 치매, 아이가 된 엄마를 극진히 모시면서도 남편 영욱 씨와 생업인 곶감 농사까지 정성스럽게 지어왔다. 동네 일이라면 기꺼이 소매 걷고 나서더니 최근에는 부녀회장과 귀농·귀촌 연합회 회장까지 맡아 활약 중인 그녀, 바로 ‘지리산 여왕벌’ 재순 씨다.
부산에서 배 엔진을 만드는 기술자였던 민철(39) 씨와 전업주부로 두 아이의 육아를 담당했던 옥임(36) 씨. 홀벌이 도시 생활이 조금씩 버거워지자 부부 사이에도 다툼이 잦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고민하던 때, 지리산 여왕벌 재순 씨는 딸 가족을 산청으로 불러들였다. 그렇게 시작된 황 서방의 처가살이 3년, 장모님 권유로 시작한 양봉은 꿀만 뜨는 게 아니었다. 벌통을 들었다 놨다 하며 벌에 쏘이는 건 기본이고, 일벌들보다 부지런해야 꿀을 뜰 수 있었다. 남편을 따라 올해 첫 채밀에 나선 옥임은 품앗이 채밀 현장에서 실수 연발, 구슬땀 흘려가며 양봉 일을 배워가고 있다. 5월 중순, 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 초보 양봉 부부는 이동 양봉을 떠날 채비가 한창인데...
치매 엄마부터 딸 부부와 손주들까지 4대가 북적이는 집, 하나부터 열까지 재순 씨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여왕벌 장모님의 걱정과 당부가 황 서방에게는 잔소리 아닌 잔소리, 작년에는 ‘황 서방 가출 사건’까지 있었다는데... 매사 추진력 강하고 행동력 갑인 여왕벌 재순 씨. 또한 장모님의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황 서방은 장모님 앞에만 서면 자꾸 주눅이 들고 작아져만 가는데... 그런 엄마 여왕벌과 일벌 황 서방 사이에서 중재하느라 죽어나는 건 바로 옥임 씨다.
드디어 멀리 경북 예천으로 이동 양봉을 떠나는데... 초보 양봉 부부는 물도 나오지 않는 숙소에서 밤낮 가리지 않고 벌통을 살피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 와중에 새로운 꽃 자리까지 보러 다니며 지친 부부는 기어이 다투고야 만다. 부부 둘이서만 올해 처음 나선 이동 양봉, 주룩주룩 내리는 굵은 비에 채밀도 못 하고 벌도 잃을까 노심초사... 위기 속에 금방 전우애가 싹튼다. 가득 찬 꿀통, 첫 이동 양봉 성적표는 좋았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집, 녹초가 된 부부는 여왕벌의 품 안에서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내는데...
딸 부부가 이동 양봉을 떠나면 손주들 학교 보내랴, 공부시키랴,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는 재순 씨는 치매 엄마까지 아이 셋을 살뜰히 챙기면서도 지친 기색이 하나 없다. 예초기로 감나무밭에 풀 베고 텃밭까지 야무지게 가꾸는 바지런한 재순 씨! 열흘간의 이동 양봉을 마친 딸 부부가 산청으로 돌아오면서 다시 완전체가 된 4대 가족, 지리산 여왕벌 재순 씨의 품 안에서 4대의 꿀 같은 행복이 솟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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