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춘순례'에 나타난 전주 이야기
이종호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신아출판사 상무
사진제공= 동국사 종걸 스님
전주는 조선왕조 500년의 본향으로 그 역사만큼이나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특히 기록문화는 우리 지역만의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완판본으로 상징되는 목판인쇄는 20세기에는 활판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인쇄문화의 혁명적인 변화가 시작된다. 이와 같은 추동을 일으킨 인물이 바로 육당 최남선이다.
최남선은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문명국가로 등장한 일본의 인쇄 · 출판문화를 보고 충격을 받아 거금을 들여 활판인쇄기를 도입하고 일본인 기술자까지 국내로 불러들여 출판사 신문관을 설립하고 한국 최초의 월간 잡지 『소년』을 창간하는 등 근대출판으로 전환하는데 혁명적인 과업을 이루었다.
잡지 창간 당시(1937년) 18세 소년의 천재성을 바탕으로 신문명에 눈을 뜬 최남선의 혜안은 한국의 출판인쇄문화를 견인한 새빛임에 틀림이 없다.
육당의 전주 답사기와 더불어 몇 가지 기록을 통해 전주의 옛 모습을 살펴본다.
△현대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육당이 쓴 『심춘순례』는 전주를 시작으로 전라도 일대를 다니면서 기록한 현대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원조격이다. 그가 쓴 『심춘순례』는 1925년부터 기록되어지는데 지금은 없어진 이리(익산)에서 전주까지 연결된 경편철도를 타고 오면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당시 전주역은 구 전매청 부지로 현재는 태평동 아파트가 들어선 곳이다. 당시 전주는 호남선에서 벗어난 지역으로 서울에서 오는 교통편이 없어 불편했는데 경편철도는 호남선과 전주를 이어주던 동맥의 역할을 한 셈이다.
책을 보면 익산에서 출발하여 대장촌을 지나 삼례역에서 숨을 고른 후 한내천을 건널 때 비비정과 호산서원을 바라보며 전주 입성을 기대하는 그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은 한내천 교량 위에 열차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그 길이 바로 경편철로이다. 경편철도는 1914년 11월에 준공하여 1927년까지 13년간 운행하던 협궤열차였다.
육당은 경편열차를 “체신없는 값으로 어떻게 까불깝죽하는지 마치 요망스런 방울 당나귀에 올라앉은 것 같다”라고 표현하였다.
고(故) 작촌 조병희 선생은 “그놈의 기차가 어떻게 생겼는고 하니, 저거 광산에 있는 철도 정도나 되나요. 딸까닥 딸까닥 혀요. 그것 하나 남겨 놓았으면 전주 물건인디. 협궤차하고는 틀려요. 아주 좁아요. 광산철도하고 비슷혀. 기차는 화통이 쭉 나오고 눈이 어떻게 텔레비에 나오는 솜리까지 댕기는디 그것 한번 더 봤으면 좋겠어. 우리가 어디를 갈 적에 우우하고 갔는디 탈선이 되었어요, 탈선이 되니까 모두 동네에 가서 막대기를 가져다가 올려 가지고 갔응께, 가히 짐작할 수 있지요, 뭐 도로보다 조금 낫다고 볼 수 있으니까나. 철도는 철도여. 뚜껑이 있고 그랬으니까. 지금 덕진 어디로 가는고 하니 지금 국악원 요짝으로 지났어요. 덕진 거기, 빽빽 소리 내고 헐 적에는 향수가 있었는디 지금은 없어졌어요.”
한 세기를 살으신 어른의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전주 옛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전주역의 넓은 광장에서 짐 다툼하는 작은 지게꾼들의 수월치 않은 싸움통에 한참 우스운 괴로움을 겪고”라며 육당이 전주역에 내렸을 때의 풍경을 묘사한 글에서 당시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전주역을 내리자 지게를 맨 짐꾼들의 모습과 전주성의 훼철한 길을 따라 남문까지 이동하는 모습이 영상을 보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경편철도는 그 후 1927년에 철도국이 전북철도를 매수하여 경전북부선의 기존 철로를 광궤로 개축에 착수하여 1929년 9월에 완공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또한 전주 이리 광개축 공사와 더불어 전주에서 순천간 철도를 1936년에 준공하여 여수까지 이르는 노선을 ‘전라선’이라 명명하였다.
경편철도가 광궤로 개축하면서 전주 역사도 한옥의 형태로 1929년 새롭게 완성되었다. 새롭게 부각된 노송정 전주역사 부근은 전주의 중심가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육당이 전주에서 모악산으로 가는 여정에 꽃밭정이를 지나는데 길가에 엿장수가 벌린 좌판과 엽전 꾸러미의 풍경도 재미있다. 모악산 가는 길 문정리의 산등성이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세내 흐르는 큰 벌판(난전)이 시원하게 눈앞에 전개되는 모습도 생경하게 표현하였다.
당시 육당은 불교계의 큰 어른인 석전 박한영 스님을 모시고 다녔는데, 이렇게 전주의 곳곳을 다니면서 천재도 모르는 처처의 숨은 이야기를 듣고 매일 기록한 글을 자신이 창간한 시대일보에 발표하였다. 당시 열악한 교통과 통신수단을 생각할 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기고한 글들은 한 권의 책 『심춘순례』로 탄생한다.
“곰팡내 나는 서적만이 이미 내 지식과 견문의 웅덩이가 아니며 한조각 책상만이 내 마음의 밭일 수 없이 되었습니다,”
그의 기록은 한 세기가 흐른 지금도 전주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는 듯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날마다 무심코 지나가는 거리와 건물, 나무 등 그것들의 생애도 기록해 두자. 시간의 흔적은 역사가 되고 역사는 다시 우리 후손에게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될 수도 있다.
나의 기록은 인생 수첩이 되고 가족사는 마을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개인의 기록은 공동체의 기록으로 넓게는 지역사가 되고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겨질 것이다.
경편 철도가 지나가던 길에는 녹슨 철로만이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역사(驛舍)는 전주시청과 아파트가 들어서서 흔적도 없어졌지만 육당이 남긴 기록은 영원하다.
기록이 주는 힘이다.
#『심춘순례』란
『尋春巡禮』는 육당 최남선이 쓴 우리 국토에 대한 예찬의 글이다.
육당은 석전 박한영 스님<(1870~1890년 생으로 승려이자 교육사상가, 완주군 삼례읍 하리 조샛마을에서 태어남. 동국대 전신 주앙불교전문학교 교장,조선불교교 교정(현 종정) 역임>과 함께 1925년 3월 28일부터 50여 일간 호남과 지리산 일대를 여행하면서 한도인閒道人이라는 필명으로『시대일보』에 그 순례기를 연재했고, 1년 후 전반부의 기록을 모아 책으로 펴냈다.
오세창의 제자(題字)와 고희동의 표지삽화, 정인보의 표제지가 실릴 만큼 이 책은 당시 최고 지성들의 관심 속에 출간되었다. 그것은 『심춘순례』가 단순한 기행문이 아닌, 일제에 빼앗긴 국토를 돌아보며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는 본격적인 우리문화답사기였기 때문이다. /이종호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신아출판사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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