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유학생활을 시작했던 31년 전 베를린 국립도서관 1층에는 사람들의 휴식 공간 옆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 장면을 담은 사진들이 상설 전시된, 일종의 열린 전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을 쓰던 시절이 아니어서 쉽게 접할 수 없는 사진들을 보며 적잖이 충격을 받고 가슴이 저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우리도 일본에 저렇게 당했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민지 역사에 대한 지식은 자주 듣고 읽으며 살았지만 고통 받고 죽어간 민중들이 겪었을 아픔과 통한을 내 것처럼 느끼지 못했음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독일인들이 역사적 과오를 기억하는 방식 속에서 한 한국 유학생이 얻은 소중한 교훈이었다.
철학에서는 정의의 출발은 인간애이고, 이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가 같이 느끼면서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바로잡는 일 역시 그 시대 민중의 억울한 원한과 슬픔을 함께 느끼고 기억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것은 최근 경제 보복의 원인이 된 일제 강제 동원 노역의 역사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일제 식민지 시절 강제 징용된 조선인 숫자는 연인원 600~700만 명이고 이중 일본과 만주 등 국외로 동원된 노무인력이 150만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그중 10~20만 명 정도가 사망한 걸로 알려져 있다. 숫자가 말해주듯 이것은 당시 총 인구 2500만 정도에 불과하던 조선인을 상대로 벌어진 전방위적 강제 노동 동원이었다.
일제 강제 노역의 역사 중에서도 미쓰비시가 해저 1000m에 매장된 석탄을 캐기 위해 만들었던 하시마섬은 지옥의 노예 노동지로 악명이 높다. 그곳은 사람이 옆으로 누워서 채굴해야 할 만큼 굴이 좁아 어린 소년들이 많이 끌려간 곳이기도 하다. 45도가 넘는 지하탄광에서 하루 12시간씩 쉬지도 못하며 노동에 시달리다 맞아 죽거나 질병, 영양실조, 사고 등으로 죽어 나갔던 기록은 차마 눈물 없이 읽기 어려울 정도다. 이들 징용 노동자들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 뒤 아무런 보호장비 없이 복구현장에 투입되기까지 했는데, 돌아오지 못하고 죽은 유해들은 화장돼 마구잡이로 섞인 채 현재 한 탑 밑에 매립돼있다고 한다.
이렇듯 일제 강제 동원 노역의 핵심 가해세력에는 일본 정부와 군부뿐 아니라 조선인 노동력 수탈에 일찍부터 발 벗고 나선 일본 기업들이 있었다. 일본 기업들은 1938년 ‘국가총동원법’이 제정되기 전부터 이미 일본 정부에 조선인 노동력의 활용을 적극 건의하며 강제 동원 일선에 집요하게 나선 장본인들이다. 결국 조선인 강제 동원은 일본 정부와 이윤에 탐욕스러운 일본 기업의 이익 연합이 걸어온 역사의 한 과정이며, 오늘날 전범 기업의 손해배상 판결에 일본 정부가 앞장서 경제 보복에 나서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할 일이다.
현재 전국적으로 번지는 일본에 대한 항의와 불매운동은 일본에 대한 우리의 분노 표출이며 의미 있는 대응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번 일을 일시적 항의 표시를 넘어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로 삼으려면, 먼저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꽃다운 시기에 겪었던 비통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의 참상을 후세대들이 자신의 아픔처럼 느끼고 공유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체계적인 접근이 중요하다. 이 땅에 살아온 수 없는 사람들의 시대적 고통이 우리 가슴에 느껴지지 않을 때 그 시대의 역사도 우리 기억에서 멀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임성진 에너지전환포럼 공동대표·전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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