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전주 기록, 시간을 쓰다 - 1973년 완산중 3-4반 박병익군의 일기

완산중 3-4, 8번 박병익의 일기장
완산중 3-4, 8번 박병익의 일기장
일기 뒷 표지 반공방첩
일기 뒷 표지 반공방첩
1973.11.13. 뮌헨 올림픽 예선 호주한국 전 골 장면
1973.11.13. 뮌헨 올림픽 예선 호주한국 전 골 장면
1972.11.21. 유신헌법 투표 독려문
1972.11.21. 유신헌법 투표 독려문
1973.9.23. 체력장 번호
1973.9.23. 체력장 번호

<일기, 민간기록의 꽃>

일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기록이기는 하지만 그 역시 당시의 시대적, 사회적, 문화적 산물이다. 꼼꼼하게 기록된 일기야말로 가장 미시적이고 구체적이며 생생한 민간 기록물이 아닐 수 없다.

<전주 민간기록물로서 병익일기의 가치>

1973년 중3 박병익군의 일기는, 1970년대 초반 전주에 유입된 서민의 생활을 생생히 보여준다. 전매청에 다니는 어머니와 방직공장에 다니는 누나들, 조지 포먼 같은 권투 선수가 되고 싶은 형과 쌍절권을 돌리며 이소룡을 닮고 싶어 하던 친구들, 빈대 극장과 동그라미 빵집을 기웃거리다 ‘삥 털리는’ 어리숭한 ‘중학생’ 등등, 그 ‘웃픈’ 시절을 되살리는 시간여행의 통로다.

병익 군의 일기에 ‘반공의 날’ 책상을 한쪽으로 밀고 레슬링을 한 기록이 있다(72.11.23.). 그 기록을 보는 순간 김일의 박치기 장면이 떠올랐다. 안토니오 이노끼의 뒷머리를 거머쥐고 오른발을 높이 들어 박치기에 돌입하는 정지 화면은, 온 국민이 한 목소리 ‘박치기’ 소리로 ‘레디 액션’, 한반도는 그 순간만큼은 통쾌, 상쾌, 유쾌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남진의 ‘저 푸른 초원 위에’로 양말이 닳도록 비벼대고, 차범근의 ‘슛 골인’이 한반도 창공에 메아리칠 때,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이면에는, 끽소리 함부로 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갈지도 모르는 두려움이 엄연했다.

일기장 뒤표지 ‘반공 아는 척하는 말에 비밀은 샌다 방첩’은, 당시 국가 권력의 서슬 퍼런 위협을 상징한다. 그러했다. 일기장 속 박 군의 정치 인식과 스포츠 몰입, 극장 순례, 연예 폭식은 당시 여느 중학생과 다를 바 없으며, 민주주의와 인권은 책 속의 이야기일 뿐, 매사 주먹과 으름장이 먼저인 시절의 흔적이 역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 땅에 들어설 때면 새마을운동에 힘쓰는 어른들 속에서 번영의 미래를 꿈꾸고(73.1.9.), 날이 추워지면 일선 장병과 병든 이웃을 걱정했으며(73.12.0.) 시험 때면 예비고사와 취직 준비하는 형과 누나들을 걱정하던(72.11.27.) 정다운 시절이었다. ‘병익일기’는, 전쟁의 무자비에 비하면 그나마 좋은 세월이 틀림없는, 도시 중심의 산업 사회로 급변하는 시대 상황에서 70년대를 살았던 전주 학창 시절의 자화상이다.

<1973년 전주에 유입된 남원 양반>

병익군은 남원 송동 안계 사람이다. 70년대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병익군의 부모님도 자녀교육을 위해 일찌감치 전주로 이사를 온 것으로 보인다. 전주로 유입된 각처의 사람들은 주로 정류장이나 역 근처에 자리를 잡는다. 병익군의 가족은, 전주-남원 전라선을 이용한 전주역(지금의 시청 자리) 근처에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기린봉으로 나무를 하러 가고(72.11.19.), 김장하려고 덕진에서 배추 80포기를 버스에 싣고 오거리에서 내린 어머니(72.12.10.), 동부시장에서 철도(지금의 기린대로) 사이에서 깡패를 만나 돈 10원과 목걸이를 빼앗긴 것(73.1.20.) 등을 감안하면 병익 군의 집은 노송동 병무청 주변 어디쯤이 된다. 병익 군의 형 병훈은 제1회 신인 아마추어 복싱대회에서 우승을 하였다.(73.3.4.), 둘째 형 병배는 병익보다 한 학년 위다. 여동생 기순은 중학교 추첨 5번 전일여중에 배정된다(73.2.16.). 어머니는 남원으로 장사를 다녔는데 무거운 짐을 역까지 들어다 드리며 병익 군은 꼭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73.10.6.).

<중3 남학생의 해피 데이>

73년 중3 병익 군의 목표는 고등학교 진학이다. 당시 고입 시험은 10과목이다. 과학 30점, 사회 국사, 공업기술, 국어 25점, 영어, 수학, 체육 20점, 음악, 미술 10점 그리고 반공 15점, 체력장 20점까지 해서 총 220점 만점이다. 병익 군은 학교와 도서관을 오가며 공부에 전념하는 한편 극장과 탁구, 축구 그리고 스포츠 중계와 연예 프로그램에 관심이 있었다. 코리아극장, 아카데미극장, 삼남 극장, 제일극장, 현대 탁구장, 중앙 탁구장, 전북 탁구협회장, 역전 탁구장, 챔피언 탁구장, 중앙초, 교대부속, 풍남초 등이 놀이터인 셈이다. 추운 겨울이면 고향 동네 형, 누나들과 술 한 되, 화토 놀이도 재밋거리다.

문화방송 10대 가수 청백전(72.12.2.) 남자팀은 김상진, 나훈아, 남진, 이용복, 여자팀은 하춘하, 김상희, 조미미, 문주란, 정훈희 등이었다. 제5회 킹스컵(72.11.18.~28.), 뮌헨 월드컵 아시아 예선전(73.11.)과 관련해서는 승패, 순위, 선수 특성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골 넣는 장면은 그림까지 그려가며 되새길 정도다. 제54회 전국체전에서 전북 4위(73.10.12), 제7회 ABC 아시아 농구선수권 대회(신동파, 박형태, 이광중, 이동광, 유기형, 박한, 기로한, 이자연, 강호연)(73.12.4.), 뮌헨 서부독일 오픈 탁구 선수권대회 단체전 우승(이에리사, 박미라, 정영숙), 단식 우승(정영숙)(74.2.24.), 조지 포먼이 노턴을 상대로 2회 KO를 거두며 30전 30승 27KO(74.3.28.) 등은 일기에 기록해야 할 중요 뉴스였다.

<일기로 보는 시민들의 생활상>

병익일기는 지난 2018년 10월, 제5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기증된 민간기록물이다. 일기를 공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기를 역사 위에 올려놓기만 하면 우리는 일기를 통해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다양한 숨결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전주 민간기록물의 기본 취지가, 전주시민들의 삶,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일기야말로 가장 훌륭한 민간기록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일기장을 공개한 박병익 선생의 용기 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내며, 다양한 계층의 일기가 수집되어 전주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풍성해지기를 소망해 본다.

/김규남 전주시민간기록물관리위원회 위원(지역문화연구공동체 이사)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국회·정당연말 정국 혼란⋯"전북 예산 감액 우려"

국회·정당자치단체 에너지분권 경쟁 '과열'⋯전북도 움직임 '미미'

정치일반전북-강원, 상생협력 강화…“특별자치도 성공 함께 만든다”

정치일반새만금, 아시아 관광·MICE 중심지로 도약한다

자치·의회전북특별자치도의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전북자치도 및 도교육청 예산안 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