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정 이정직, 간재 전우의 수제자로 학맥 이어받아
성(性)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의(義)·이(利)의 조화 추구
문란한 과거 시행에 응시 포기, 서예와 학문에 전념
일제의 창씨개명 거부하고 왜경의 삭발 강요에 호통
“지극한 공(公)은 천하와 더불어 예(禮)를 갖추는 것”
“홀로 근심 안고 새벽까지 앉아서(獨抱幽憂坐達晨) / 하늘과 땅에 빌고 신에게 또 빌었네.(拜天禱地又祈神) / 어느 누가 부드럽게 덕을 품고 베풀 수 있어(何人能施柔懷德) / 온 세계를 녹이고 따뜻한 봄 오게 할 수 있을까.(四海融融各得春)” -‘丙申元朝’ 전문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 1882-1956)이 1956년 75세 설날 아침에 쓴 시이다. 평생 도를 구하고 학문을 하는 본뜻이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한다면, 그 해답은 위의 시에서 찾아지리라. 잠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홀로 앉아 천지신명께 세계평화의 봄을 간구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는 인간의 본바탕인 ‘성’(性)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실천하는 도학자의 본보기를 만나게 된다.
송기면의 본관은 여산(礪山)이며, 자는 군장(君章), 호는 유재이다. 그는 김제군 백산면 요교리에서 부친 송응섭과 모친 전주 최씨 사이의 4남 1녀 중 4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응섭공은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에 증수되었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여러 차례 천거되었다. 유재가 5세일 때 부친이 타계하여 모친이 그 뜻을 이어 가르치게 된다. 모친은 1894년 전주에서 거처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대문호 석정 이정직(1841-1910)을 집으로 모셔와 유재를 가르치게 하였다. 유재는 석정을 통하여 시문과 서화, 예술 이론, 천문과 지리, 역산(曆算)과 의학 등 실용적 지식을 포함한 박학적 학풍의 진수를 전수받으며 20세 무렵 명성을 크게 떨치게 된다.
1910년 스승 석정이 타계하자 그의 학문을 계승한 유재는 ‘요교정사’(蓼橋精舍)에서 석정을 대신하여 수많은 후학을 가르치게 된다. 1920년, 30대 후반의 유재는 세상의 혼란을 피하여 계화도에 머물고 있는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를 찾아가 예를 갖추고 사제의 연을 맺는다. 이후 유재는 도의(道義)에 뜻을 두고 이치를 궁구하는 데 전념하여 성리학의 체계를 확고히 세우게 된다. 아울러 옛것을 중시하면서도 수구론에 빠지지 않고 유신론을 강조하여 ‘구체신용설’(舊體新用說)을 정립하였고, 의(義)와 이(利)의 조화를 통한 효용을 중시하였다.
박완식의 역(譯)으로 발간된 『유재집』(2000년)에는 276제 368수의 시가 실려 있고, 이 중 180여 수가 교유시(交遊詩)다. 교유시가 많은 것은 두 스승 문하에서 수학하고 많은 제자를 둔 그의 이력과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유재의 성품에서 비롯한 것이리라. 또한 그의 시에는 경륜, 지조, 절의 내용이 뚜렷한바 그의 문학은 경세적(經世的), 실학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개화기에 태어나 일제강점기, 해방공간, 남북분단의 격변기를 살면서 부당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올곧은 삶을 관철시킨 힘은 바로 선비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다.
일제강점기, 근대문학이 정립되면서 문학의 주도권이 한문에서 국문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한문학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한문학이 소멸되는 끝자락에서 유재는 수준 높은 한시를 창작한바, 유재는 그의 글씨와 유학에 못지않은 한시를 남겼다. 그의 시는 크게 사회시와 서정시로 나눌 수 있는데, 사회시는 우국, 상시(傷時), 절의, 저항, 애민, 교유, 교육 등 다양하게 분류된다. ‘견훤의 묘를 지나며’와 ‘노량진, 사육신의 묘에서’ 두 편을 감상한다.
“저무는 산마루에 올리는 술 쓸쓸하고(一杯寂寂暮山頭) / 서풍에 만고 시름으로 지팡이가 머무네.(住杖西風萬古愁) / 싸움터 묵은 벌판에 가을풀이 이울고(百戰荒原秋草沒) / 들녘의 무심한 노인 누렁소를 풀어 놓네.”(‘無心野老放黃牛’)
“사육신의 죽음을 한탄하지 말라(莫恨六臣死) / 죽었어도 길이길이 아름다워라(死惟百世休) / 영령은 해와 달처럼 빛나고(靈應懸日月) / 백골은 산악처럼 무겁다네(骨亦重山岳) / 저녁 새 빈 골짜기에 울고(夕鳥號空谷) / 봄꽃은 강물에 떨어지네(春花落上流) / 내 일생 통한의 눈물(平生一?淚) / 노량나루터에 흩뿌리네(灑向鷺梁頭)”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 화자는 나그네가 되어 후백제의 왕 견훤의 묘를 마주하게 된다. 해 저무는 가을 쓸쓸한 날, 옛 영웅 앞에 술 한잔 올리며 옛 시절을 떠올린다. 과거 싸움터였던 들녘, 시들어가는 가을풀과 누렁소를 풀어놓는 노인의 무심한 풍경에서 화자는 무상감을 느끼고 있다. 우국의 정서를 자아내면서 동시에 달관한 인생의 한 경지를 엿보게 한다.
아울러 화자는 1920년대에 한강변 노량진에 있는 사육신 묘를 찾았다. 망국민의 비애가 사육신의 높은 절의와 만나니 그 감회는 걷잡을 수 없다. 도의를 지키고 기꺼이 목숨을 내놓은 사육신의 높은 뜻 앞에서 새도 울고, 꽃도 울고, 슬프게 흘러가는 강물 위에 망국민으로서 화자 역시 솟구치는 눈물을 흩뿌린다.
유재는 일찍부터 세속의 명리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 1906년 25세 때, 조정에서 박사과 과거를 실시하여 이에 응시하고자 했으나, 시험이 문란하고 불공정하다는 것을 알고 응시를 포기하였다. 다음의 시 ‘만조(晩眺)’는 관직을 포기하고 자연과 더불어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의연한 태도를 새의 비상을 통해 잘 보여준다. “곱게 물든 저녁노을에 하늘의 반이 물들었고 / 물 위의 맑은 안개는 희미하게 사라지려 하네. / 저녁노을 비치는 산 위로 새 한 마리 날고 있나니 / 내 몸은 아직 긴 강물 그림 속에 머물고 있네.”
유재는 평생 인격수양에 노력하고 명상을 하며 도인으로 살았는데, 사람을 대할 때는 진정한 마음으로 대하였다. 자신이 진리라고 믿는 것은 어떤 압력에도 굽히지 않았다. 일제도 유재의 성품을 알고 있었기에 창씨개명 같은 신민화정책을 강요하지 못했다. 다음 시는 왜경(倭警)이 칼을 들고 삭발을 강요할 때 단호하게 호통을 치고 돌아와 쓴 시다. 의를 품고 살아가는 유재의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음산하게 비가 내려 앞산이 어두운데 / 무수리의 요망함이 도둑떼처럼 나타나네. / 아무리 칼로 위협한다 해도 / 내 가슴속 의리를 어찌 자르리오.”
유재는 ‘마음’보다 ‘성’(性)을 더욱 존중하는 간재의 ‘성사심제설’(性師心弟說)을 계승하였으며, 방법론으로는 ‘구체신용설(舊體新用說)’을 강조하였다. “새롭게 한다는 것은 옛것으로써 본체를 삼고, 옛것은 새로운 것으로써 작용을 삼는 것이다. 본체가 보존되어 있음으로써 그 작용이 무궁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새롭게 한다는 것은 옛것을 계승함이니, 유신(維新)이란 옛것을 계승하여 새롭게 함을 말한다.” 유재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시 ‘제요교정사’의 “원래 우리 도는 일정한 형체가 없고 / 순리를 따르면 어디서나 넉넉하리.”라는 표현과 맥이 통한다. 그러나 자신의 본래 심성을 잃지 않으면서 상황에 맞게 처신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음 두 작품은 유재가 추구하는 도의 세계가 어디에 있는가를 알게 한다.
“못난 듯 사노라니 마음에 누(累)가 없고 / 번거로운 일 줄이니 꿈자리도 편하구나. / 한가하게 때로 홀로 걸으니 / 산수가 옷자락에 비쳐오네.”(‘偶題’), “하나도 가슴속에 누된바 없어 / 사람과 하늘 이치 본래 하나임을 알겠네. / 항상 맑은 기운 이 몸에 머무르니 / 내 마음 절로 담담하여 허공과 같네.”(‘詠歸亭’ 일부)
『유재집』에는 시 외에도 편지와 각종 문집의 서문, 묘비명과 행장(行狀) 등 많은 글이 실려 있고, 『유재집』에 수록되지 않은 유고가 아직 많이 남아 있어 당대 호남의 지성사(知性史)를 복원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유재는 “천하와 더불어 그 예(禮)를 같이 할 수 있다면 이것은 천하의 지공(至公)이다.”라고 하며 예의 실천에 지극하였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자의 대의(大義)를 항일로 주를 삼고, 시에서 망국민의 아픔을 다수 형상화한 것도 예의 실천의 연장선에서 볼 수 있다.
유재는 ‘유신론’에서 주장한 것처럼 삶의 본체인 성리(性理)를 떠나지 않으면서 현실 상황을 끌어안는 시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한시는 유연(悠然)한 도(道)의 시학을 담고 있으며, 어느 국문 시가보다 민족의식의 각성을 보여주었다. 일제 말기, 그는 시 ‘온양온천’을 통해 ‘성’(性)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넓은 품을 보여준다. “온양온천은 우리나라의 으뜸이라. / 질병을 치료하는 데 큰 공이 있네. / 어떻게 하면 본성 잃은 자까지 치유해 / 한 세상 태평성대로 편하게 할까.” 당대 본성을 잃은 자는 ‘일제’를 말함이 아니겠는가.
/김광원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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