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완연해가는 즈음이면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라던 최양숙의 노래가 사람들의 귓전에 입가에 맴돌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각종 sns를 통해 자신과 상대방의 근황이 즉각적으로 전파되고 때론 과시되기도 하는 오늘날의 풍경 속에서 하얀 종이 위에 한 글자씩 정성껏 써 내려가던 손편지는 갈빛으로 바스락거리는 플라타너스 잎처럼 아련한 기억이 되어버렸다. 상황이 이렇다고 필자가 옛 방식은 귀하고 지금 것은 못하다는 귀고천금(貴古賤今)의 논리를 강권하려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건 그 시대에 맞는 소통의 방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시대의 매체가 그 시대의 소통 방식을 만들어가듯 편지를 통해 의사를 주고받던 시대에는 그 시대의 정서와 사유가 편지글 안에 오롯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약 100년쯤 전에 만들어진 간찰첩(簡札帖)이다. 이 첩은 전주시에서 수집한 귀중한 자료인데, 이제 백 년을 거슬러 간 편지글 모음에는 누구의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으며 우리는 이 첩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지 간찰첩 안으로 들어가 보자.
△ 누가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간찰첩의 표제는 ‘간재전선생유훈(艮齋田先生遺訓)’이다. 풀이하면 ‘간재 전 선생님께서 남기신 가르침’ 정도가 되겠다. 그렇다면 간재 전 선생은 누구인가? 아마도 독자 대부분이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겠지만, 자료 소개글의 본새에 따라 약간의 췌언을 붙인다. 간재 전 선생은 곧 간재 전우(田愚; 1841~1922) 선생으로 간재는 그분의 호이다. 전우 선생은 율곡(栗谷) 이이(李珥)-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마지막 적전(嫡傳)으로, ‘성(性)이 곧 리(理)’라는 성리학의 본령을 확고하게 세워 제국주의에 찢긴 조선의 정신을 온전히 하고 성선(性善)에 기반한 의리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당대의 거유(巨儒)이다. 그는 일제의 국권침탈이 본격화되던 1908년 이후로는 서해의 왕등도(?登島), 군산도(群山島), 계화도(繼華島)를 옮겨가며 성리학에 몰두하였고, 1922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500여 제자를 길러냈다. 어쩌면 그에게 성리학은 도의(道義)가 무너진 세계를 바로잡을 무기요, 교육은 훗날을 도모할 전사(戰士)를 양성하는 과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길러진 제자 가운데 김의훈이란 분이 있었다. 간재가 종유했던 인물과 길러낸 제자들을 정리해놓은 『화도연원록(華島淵源錄)』에 따르면 김의훈은 자(字)가 경희(卿喜)이고 고종 병자년(1876)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선산(善山)이고 부안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간찰첩 첫 면에 붙어있는 봉투에 수신처가 ‘부안(扶安) 상동면(上東面) 제내리(提內里)에 있는 김경희(金卿喜)의 서옥(書屋)’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과 일치한다. 아울러 간찰첩의 표제 우하단에 ‘이여재(貳如齎)’는 성균관대학교 존경각에 소장되어 있는 『이여재사고(貳如齋私稿)』를 통해 김의훈의 호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 기초할 때 이 간찰첩은 김의훈에게 보낸 스승 전우의 편지를 김의훈이 간재 사후 어느 시점에 ‘간재전선생유훈’이라는 표제를 붙이고 첩으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첩은 자그마한 9폭 병풍 모양으로 접을 수 있고 앞면과 뒷면에 모두 13통의 편지가 붙어있다. 크기는 접었을 때 가로 18.5cm, 세로 25.5cm이고, 펼쳤을 때의 길이는 166.5cm이다. 편지 말미의 간지와 『간재집』의 내용을 살필 때, 편지의 작성 시기는 1914년부터 1919년 무렵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는 간재가 계화도에 우거(寓居)하면서 강학하던 때였다.
△학문의 요체를 일러주고, 학인(學人)의 자세를 권면하다
편지글의 대부분은 간재가 자득한 학문의 요체를 김의훈에게 전수하는 내용들이다. 간재 평생 공부의 핵심은 심(心)과 성(性)의 관계를 구명하는 것이었다. 간재는 성(性)은 리(理)로, 심(心)은 기(氣)로 철저히 구분하였고 심(心)을 리(理)로 파악하려는 일체의 논의들과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그리고 간재는 이러한 논쟁을 통해 성(性)이 스승이고 심(心)은 제자라는 ‘성사심제(性師心弟)’, 성은 높고 심은 낮다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독창적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간찰첩에 실린 첫 번째, 네 번째, 일곱 번째, 여덟 번째, 열 번째 편지가 심과 성에 관한 논의를 담은 편지들이다.
한편 간재는 제자에게 공부하는 방법과 삶을 살아가는 자세를 일러주기도 하였다. 가령, 여섯 번째 편지는 병을 조리(調理)하던 김의훈에게 보낸 것인데, 제자가 병에서 회복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면서도 “옛날 어느 스승이 유생에게 병중에 공부가 어떠했는가 물으니 유생이 매우 어려웠다고 대답하자 스승이 병들지 않았을 때처럼 해야 그게 바로 공부라고 대답하였는데 이 말을 체득하였는가?”라는 내용을 덧붙여 병중에도 공부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는 준엄한 뜻을 보이기도 했다. 또 아홉 번째 편지에서는 ‘생각을 세워 주재(主宰)하라【요점은 정신을 바짝 차리는 데 있으니 흐리멍덩해져서는 안 된다】’와 ‘나그네로서의 근심을 없애라【가뿐하게 물리쳐 근심이 설 수 없게 하라】’는 두 가지 자세를 제시하고 “진실로 이 도리를 능히 한다면 앞날에 반드시 무한한 발전이 있을 것이다”라고 격려하기도 하였다. 열한 번째 편지에서는 “평생 남을 탓해봐야 아무런 득이 없고 잠시라도 자기에게 돌이켜보면 또한 여미(餘味)가 있으니 어찌하여 이 맛이 있는 것을 버리고 저 무익한 것을 취하는가?”라며 자기성찰을 이렇듯 명징하게 당부하기도 하였다.
△간찰첩의 의의
전통시대 편지는 일신상의 다양한 근황을 담고 있어 다채로운 일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런데 이 간찰첩은 학문이라는 무거운 주제로만 시종일관할 뿐 아취(雅趣) 어린 풍류나 정겨운 일상 등은 전혀 찾을 수 없다. 그 자리에 깍듯하게 예우하며 자신이 깨우친 학문의 요체를 전수하고 공부하는 자세를 일러주는 근엄방정한 스승과 제자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제국주의의 침탈 속에 곡학아세의 무리들이 시류에 편승하고, 그 결과 도덕과 의리가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학문을 통해 훗날을 도모하고자 했던 칠십을 훌쩍 넘긴 노선생이 제자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겠는가?
제자 김의훈은 스승의 이런 간절함을 정확하게 알았다. 그래서 스승께서 돌아간 뒤 그간의 편지글을 모아 정성스럽게 첩을 만들고 ‘간재 전 선생님께서 남기신 가르침’이란 제목을 붙였던 것이다. 아마도 김의훈은 이 간찰첩을 늘 곁에 두고 스승의 유훈을 수도 없이 가슴에 새겼을 것이다. 이렇듯 스승과 제자는 학문을 부여잡고서 암흑의 시대를 건너려 했던 것이다. 바로 여기에 이 간소한 간찰첩의 커다란 울림이 있다. 시대적 한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다. 간찰첩에 어려있는 두 분의 형상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자신의 신념을 평생의 실천으로 완성해간 두 사제의 삶은 범부의 단안(斷案)이 함부로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김형술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주대 한문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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