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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초제 심청가 완창, 음반으로 내놓은 장문희 명창

김은정 선임기자

장문희 명창이 지난 26일 열린 전북도 무형문화재활성화를 위한 워크숍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장문희 명창이 지난 26일 열린 전북도 무형문화재활성화를 위한 워크숍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박형민 기자

2004년 전주대사습대회가 내놓은 서른 번째 명창은 20대의 젊은 명창이었다. 대사습 사상 최연소에 심사위원 전원으로부터 만점을 받은 이 주인공은 장문희씨. 우리나이로는 스물아홉 살이었지만 12월에 태어나 며칠 만에 두 살을 한꺼번에 먹는 애민 살을 감안한다면 정식나이는 스물일곱 살 밖에 안 된 이 앳된 명창에 관심이 몰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나 국악계가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그의 스승은 이일주 명창. 서편제판소리의 대가였던 이날치의 손자 이기중이 그의 아버지이니 장문희 역시 이날치로부터 이기중을 거쳐 이일주의 맥을 잇는 소리가문의 후예였던 것이다.

일곱 살 어린나이에 소리 길에 들어서 햇수로 38년. 전통판소리를 공부하는 일에 온전히 삶의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그가 새로운 의지를 모아 대중들과 만나는 길을 열었다. 15년 전 한 레코드사로부터 제안 받았지만 끝내 사양하며 자신의 과제로 돌려놓았던 음반을 스스로 제작해 내놓은 것이다.

<장문희 심청가> . 다섯 시간이 넘는 심청가 완창을 5장의 CD로 엮어낸 그는 이제 판소리의 본질을 알리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장문희 명창(44,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원)을 만났다. 스승이자 이모인 이일주명창의 소리를 그대로 받은 그의 판소리를 향한 애정과 신념은 단단했다. 판소리연구가 최동현교수가 그의 미덕을 왜 천부적으로 타고난 재능에 오직 한 길, 한눈팔지 않고 판소리에만 전력해온 성실함을 더했는지도 알 것 감았다.

 

-음반이 예쁘게 나왔네요. 첫 음반인데, 기획사를 통하지 않고 개인 작업으로 음반을 냈다는 것이 의외입니다.

“사실 오래 전, 음반 녹음을 제안 받았었어요. 대사습 명창부 장원이 됐을 때이니 20대였는데, 그때는 음반을 낸다는 것이 두렵더라고요. 연륜이 쌓이고 소리의 깊이를 더 채운 다음에 내고 싶었습니다. 신나라레코드사에서도 제안을 해주셨는데 완곡하게 사양했지요. 줄곧 이 작업은 제게 과제였지만 음반을 내는 일만은 제가 직접 나서서 하고 싶었어요. 여건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보니 이제야 내게 되었습니다.”

 

-5시간이 넘는 완창 심청가를 녹음하는 일만으로도 쉽지 않은 과정을 거쳤을 것 같습니다.

“서울에 머무르면서 2-3일 동안 녹음하는 일을 여러 번 거쳤지요. 다행히 김형석 선생님이 녹음실을 제공해주셔서 좋은 환경에서 녹음을 할 수 있었어요. 마스터링도 따로 할 필요 없을 정도로 시설이 좋았는데 소리 보정을 위해 후반 작업을 하면서 마스터링은 따로 보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자비를 들여 진행하는 일이 새로운 경험이었을 것 같습니다. 작곡가 김형석씨와는 특별한 인연이 있었습니까.

"몇 해 전 케이블 음악채널 엠넷의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에 출연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편곡자로 참여하셨던 선생님과 인연이 되었어요."

 

-그렇고 보니 2년 전쯤인가요. 엠넷의 ‘더 마스터’에서 장문희라는 이름은 화제였습니다. 그때 그랜드 마스터로 뽑혔죠.

“다섯 번 출연했는데 두 번 그랜드마스터가 되었어요. 개인적으로 기대 이상의 결과였고 감사할 일이었지요. 그때 새삼 알게 되었어요. 대중들이 국악을 낯설게만 알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판소리를 듣게 되면 확실히 끌리는 뭔가가 있다는 것이었죠.”

 

- ‘장문희’란 이름 앞에는 최연소 명창이란 칭호가 늘 함께 합니다. 소리를 처음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습니까.

“처음 소리를 만난 것은 여섯 살 때예요. 엄마가 이모(이일주 명창) 댁에 저를 보내셨는데, 며칠 지내다보니 이모가 너무 무서웠어요. 엄마를 졸라 다시 집으로 갔죠. 몇 개월 지났는데 엄마가 다시 보낸 것이 이듬해이니 일곱 살에 다시 이모 댁으로 온 거죠.”

 

-그럼 일곱 살 때부터 소리를 배웠습니까.

“처음에는 그냥 이모가 소리하시는 것을 옆에서 듣고 보는 것이 전부였어요. 1-2년 그렇게 보내다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춘향가를 배우기 시작했죠. 그때부터 지금까지 소리로만 살아왔으니 38년이나 되었네요.”

 

-초등학교 때 이미 심청가 완창회로 화제를 모았었죠. 이후 초등학생이 완창하는 무대가 더러 있긴 했지만 그때가 시작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밥먹고 학교 다녀오면 대부분의 시간을 소리공부로 보냈으니까요. 다른 사람보다 먼저 시작하고 또 많은 시감을 소리공부로 바쳤으니 당연히 빨리 익힐 수 있었어요. 안숙선 선생님께 받은 적벽가를 제외한 네 바탕을 일찌감치 떼었던 것도 그 덕분이고요.”

 

-사실 요즘 환경에서 판소리의 가업을 잇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그래서 장명창의 소리길이 더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명창의 후손이라는 무게가 제게 주는 부담이 가볍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그저 나 스스로 열심히 하면 좋은 소리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선조들 덕분에 갖게 된 재능이 있었기에 오늘의 제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장문희란 이름을 본격적으로 알리게 된 것은 아무래도 대사습이었겠죠.

“물론입니다. 2004년 대회에서 명창부 장원을 차지하면서 명창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까요.”

 

-그때가 스물여덟 살, 대사습 역사상 최연소로 명창의 반열에 올라 화제가 되었었습니다. 그것도 첫 번째 도전에 심사위언 전원 만점으로 얻은 영광이었는데 그때 어떤 심경이었을지 궁금합니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실 저는 10년을 바라보고 처음 도전한 것이었거든요. 그래서 상은 받았지만 제 소리의 부족함을 누구보다도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려웠어요.”

 

-그때 몇 년 더 도전을 해야 했다면 지금과 달라진 것이 있을까요.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잘 모르겠지만 첫 도전으로 얻은 그 결과가 제게 좋은 역할만 한 것은 아니었어요. 정상에 일찍 올라섰다는 성취감 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으니까요. 지금도 무대에 서는 일은 늘 조심스럽고 자신이 없는데, 아마 그때부터 갖게 된 부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만점’이나 ‘최연소’에 대한 무게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죠. 무대란 것이 항상 완벽할 수만은 없잖아요. 실수도 할 수 있으니 항상 잘할 수만은 없다는, 조금은 편한 생각을 갖고 청중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제게는 가장 어려운 일이 아직도 무대에 서는 일이거든요. 그런 태도를 갖고 있으니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도 어렵고……. 그때의 상황이 전통판소리에 대한 무거움을 저에게 안긴 것 같아요.”

 

-창작판소리에 대한 관심은 어떻습니까.

“관심은 있지요. 그런데 어떤 창작판소리가 와도 기존의 전통 판소리보다 좋다는 생각은 들지 않아요. 선뜻 창작판소리에 나서지 않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예전보다는 훨씬 나아졌지 않습니까. 그 바탕에는 창작판소리의 역할도 크지 않을까요.

“다양한 창작판소리도 그렇고 퓨전 형식의 무대들로 청중들을 만나는 것도 필요합니다. 덕분에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저는 판소리를 제대로 이해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음악이니까요. 그러려면 대중들이 판소리의 본질과 가치를 통해 판소리를 알게 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합니다.”

 

-전통 판소리를 지켜오면서 안게 된 고민이 깊은 것 같습니다.

:40년 가까이 전통판소리를 공부해오면서 가장 큰 과제가 대중들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일이었어요. 요즘 소리를 공부하는 20대들을 보면 긴소리를 잘 하지 못합니다. 5분까지는 ‘아휴 목이 참 예쁘네’ 싶다가도 10분 정도 지나면 목이 난리가 나거든요. 여러 기회로 심사를 하게 되면 이런 환경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저 사람이 어떻게 공부를 했고 기량이 어느 정도인지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거든요. 어리지만 그 연배에 맞는 깊이 있는 소리가 있지 않겠어요. “

 

-왜 그런 환경이 만들어졌을까요.

“가장 큰 원인은 대학입시제도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입시를 치를 때 부르는 시간이 3분이거든요. 아이들이 6년, 길게는 그보다 더 오랫동안 소리공부를 하고 대학을 가는데 고작 3분으로 가늠을 한다니....... 어떻게 그것으로 깊이를 가진 소리를 가릴 수 있겠어요. 게다가 요즘은 또 맑은 목과 가요나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갈 수 있는 재능이 주목받는 시대이니 전통판소리가 자칫 외면 받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지요.”

 

-화제를 돌려보죠.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넘쳤는데, 소리길이 아닌 다른 길을 갔으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 없었습니까.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러니까 저에게는 이 길이 숙명이었던 것 같아요. 제게 주어진 길. 그러니까 힘들어도 이것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전주로 내려왔습니다. 대학원은 다시 서울로 갔지요. 그리고는 다시 전주에 돌아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서울에서도 자리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있지 않았을까요.

“그것 역시 숙명이었나 봐요.(웃음) 사실 한차례 대학입시에 실패하고 우석대를 갔는데 졸업하고 바로 한예종 대학원에 들어갔거든요. 꼭 서울에 자리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기회가 주어졌다면 아마 그 길을 택했겠지요. 그런데 대학원 졸업 즈음에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원 공고가 난거예요. 그때의 선택을 후회해본 적도 없거니와 오늘의 환경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전통 판소리에 마음을 두고 있는 입장에서는 창극 무대가 어떻습니까.

“어린 시절부터 어르신들의 창극 무대를 많이 봐왔어요. 국립창극단은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죠. 제 기억으로는 무대의 화려함보다는 어른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정말 소리가 좋아서 전율을 느꼈던 것 같아요. 소리다운 소리를 제대로 들을 수 있었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갈수록 창극 무대가 본질보다는 포장이 앞세워지는 것 같아요. 본질이 중요한 가치가 되지 않고 주변의 것들을 더 내세워지는 무대는 그 생명력이 짧아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이 크기도 하고요.”

 

-우리 것을 찾는다면서 본질이 묻혀버린 요즈음의 풍토가 위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가 이 시점에 전통판소리를 내놓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아직은 제가 젊은 세대잖아요. 이런 젊은 사람들도 전통을 지켜가려는 의지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저로서는 새로운 시작인 셈인데, 정작 음반을 내고 보니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보입니다.”

 

-전통판소리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일도 그중의 하나일 듯싶은데요.

“맞습니다. 그러려면 제가 먼저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직은 구체적인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작이란 마음으로 나섰으니 길이 보이겠지요.”

 

인터뷰를 하는 내내 젊은 명창의 의지를 이렇게 단단하게 엮어 놓은 바탕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것이 어쩌면 한 시대를 소리로 빛냈던 명창 이날치의 후손이라는 자긍심일 수도, 아니면 20대에 명창의 반열에 우뚝 선 타고난 재능에 대한 자신감 일수도 있겠으나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전통판소리만큼 좋은 것을 만나지 못했어요. 사람의 성음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감동을 대신할 예술이 또 있을까요.”

이 젊은 명창이 우리 판소리를 일으켜 세울 날이 그리 멀지 않았으면 좋겠다.

 

● 장문희 명창은

장문희 명창은 서편제소리의 대가인 이날치 명창의 후손이다. 이날치와 그의 손자인 이기중, 그리고 이모이자 스승인 이일주 명창으로 이어지는 소리의 맥을 잇고 있으니 전통적인 판소리 가계의 면모가 그 덕분에 지켜지고 있는 셈이다.

그의 어머니 또한 소리와 춤에 재능을 보였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그 길을 가지 못하고 큰딸인 그를 언니인 이일주 명창의 문하에 일찌감치 보내 소리꾼으로 대성하기를 소망했다.

소리 공부는 일곱 살 때부터 시작됐다. 그러나 이모는 타고난 재능을 보이는 조카에게 선뜻 소리를 가르치지 않았다. 1-2년 동안 소리하는 것을 보거나 듣게 하는 것으로 조카의 귀를 열어주었던 이모는 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비로소 심청가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다른 제자들보다도 유난히 엄하게 그를 가르쳤던 이모는 그를 오로지 소리만을 일상의 대부분으로 삼게 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곤궁했다. 이모는 애정으로 돌봐주셨으나 넉넉지 않은 형편을 알고 있던 그는 급식비를 타는 일도, 숙제를 할 수 있는 참고서를 사달라고 말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참고서가 없으니 늘 숙제를 하지 못했던 그는 벌로 회초리를 맞아야 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워낙 타고난 소리로 주목을 받았지만 그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변성기를 맞았던 중학교 때가 그 첫 번째인데 상청이 안 나오는 것 뿐 아니라 온몸을 써야 하는 소리 공부 자체가 힘들어 다른 길을 가고 싶었다. 그러나 이모는 그 어느 것도 허락지 않았다. 다시 마음을 다잡았지만 고등학교는 꼭 예고를 가고 싶어 엄마 이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울로 갔다. 서울 외곽의 고등학교를 다니던 2학년 때 학생 대사습대회에 나가 2등상을 받았다. 그때 그의 기량을 눈여겨본 박범훈 교수가 국악예고로 편입할 것을 권했다. 전액 장학생으로 서울 국악예고를 졸업했다. 고2때 동아콩쿨에 나가 금상을 수상했지만 이듬해 대사습에 재도전해 장원이 됐다. 중앙대 국악과 입시를 치렀으나 실기시험에서 추임새까지 넣으며 그의 소리에 감탄했던 심사위원들은 그를 떨어뜨렸다.

이모의 권유로 우석대에 들어가 4년 동안 대학시절을 즐겼다. 졸업후 한예종 대학원에 들어가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때맞춰 공고가 난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에 응시해 단원이 됐다. 이듬해 대사습 명창부에 도전했다. 명창이 되기 위해 목표한 시간은 10년이었으나 그는 단 한번 도전으로 명창이 되었다. 그해 대사습은 심사위원 전원 만점의 최연소 명창을 내는 기록을 갖게 됐다.

이일주 명창으로부터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수궁가> 네 바탕을, 안숙선 명창으로부터 <적벽가> 를 이수한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완창회를 시작, 적벽가를 제외한 네바탕 완창회를 가졌다.

2017년에는 화제를 모았던 케이블 음악 방송 엠넷의 <더 마스터-음악의 공존> 에 출연, 두 번이나 그랜드 마스터로 뽑혔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국악 관련 각종 대회를 휩쓸고 수많은 전통판소리 무대와 창극 공연에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나 쌓아온 경력 대신 자신의 소리로만 장문희라는 이름이 알려지기를 원한다. 이번에 내놓은 <심청가> 음반도 온전히 자비와 자기 시간을 투자해 제작했는데, 그 음반 어디에서도 이 젊은 명창의 화려한 경력을 따로 찾아 볼 수 없다.

심청가로 시작된 음반제작은 춘향가로 이어갈 계획.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수석단원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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