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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흔적, 역사가 되다] 효행록에 담긴 지소(紙所)의 흔적과 효자 이야기

효행록
효행록

이달 10일 전주시민 기록관이 개관하면서 제7회 전주 기록물 수집 공모전에 출품된 작품들을 보이는 수장고에 전시하고 있다. 이 출품작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김종선 씨가 출품한 ‘선조 효행록’(1848년)이다. 이 효행록은 그림과 문서로 기록되어 있는데, 앞부분은 효행 사실을 그림으로 그려 놓았고 더불어 전주의 지소(紙所)가 표시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또한 선조의 선영 가는 길을 서울 서대문부터 경기도 고양(일산)까지 지명으로 표시하였고, 뒷부분은 효행 내용을 4언절구로 기록하여 사료적 가치가 높다.

 

△전주천에서 장어를 잡아 위독한 아버지를 살린 효자이야기

효행도에 담긴 내용을 분석해보면 찬바람이 매서운 겨울, 승암산 아래 전주천을 따라 장어를 잡기 위해 오르내리는 효자 김수철이 보인다. 승암산 자락을 타고 조금 올라간 곳에 붉은 글씨로‘紙所’가 찍혀있고, 인근에 초가집 3채와 기와집 4채가 보인다. 고덕산 아래 남고진 모습이 아주 재미있게 표현되어 있다.

그렇다면 효행도에서 왜 지소를 소재로 그림을 그렸냐 하는 점이 궁금해진다. 효자 김수철은 승암산 아래 좁은 목(병암)에서 아버지의 병을 치료할 장어를 잡게 된다. 이때 지소와 관련 있는 인물들이 우연히 지나가다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즉 그림을 보면 지소에서 근무하는 아이와 승려, 부남면 도윤(지금의 면장에 해당), 이렇게 세 사람이 그 광경을 증명이라도 하듯 지켜보고 있다. 또 김수철은 아버지 흥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전주천을 오르내리는데, 3일 후 대성동 지역에서 이 씨 성을 가진 자가 두 마리의 장어를 팔고 있었다. 이 아이는 옷을 걸치지도 않는 것으로 보아 혹 하늘에서 내려온 인물이 아닌가 추정되며 효자 김수철은 거금 1전을 주고 장어를 사서 아버지에게 드린다. 위독한 병에 걸려 당장이라도 돌아가실 수 있는 아버지를 아들이 어렵게 구한 장어로 구완하여 한 달을 더 살게 했다는 내용이다. 이 그림 속에는 남고진 산성과 승암산 그리고 전주의 지소가 기록되어 있어 매우 의미가 있고, 특히 전해오는 전주의 효자이야기 중 장어를 소재로 하는 내용은 이 효행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전주부지도.
전주부지도.

△전주 지소(紙所)의 흔적을 찾아서

전주 지소(紙所: 전주부에서 종이를 만드는 곳)에서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사람 3명이 모두 그려져 있는데, 지소를 관리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부남면의 도윤(都尹: 현 면장)인 이통원(李通元)과 지소승(紙所僧) 월연(月連) 그리고 지소청직(紙所廳直) 민육월남(閔六月男)이 그려져 있다. 1872년 전주부지도를 보면 부남면에는 지소가 없으며 어은골에는 나타나고 있다. 전주부의 부남면은 향교가 있는 교리를 포함해서 옛 교동사무가 있는 방축리 그리고 지금의 완산동(은송리, 곤지리) 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남원 쪽으로 반석역을 지나 객사동, 죽음리, 은석리, 봉산리 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이런 내용을 근거로 조심스럽게 추정해보면 지소는 부남면에 속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지소로 적합한 자리는 주변에 닥나무가 많아야 하고, 철분이 없는 맑은 물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전북대 소장 전주부지도를 살펴보면 효행도와 마찬가지로 신원(상관면사소)에서 물줄기가 흘러오다 굽어지는 지점에 지소가 있다. 이 지점을 추정해 본다면 여러 정황으로 보아 색장동으로 볼 수 있다. 이 마을에 사는 90세 어르신 이완근씨에게 물어보니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전주천에서 종이를 많이 떴으며, 우리 색장동 마을 앞에서도 종이를 떴다”고 하였다. 이 어른이 말하는 곳은 색장동 방앗간 지점으로 예전에는 이곳에 물레방아가 있었고 이후 방앗간으로 변하여 지금은 개조하여 멋진 찻집으로 변했다고 한다. 색장동정미소 뒷 칸을 보니 은석동에서 보를 막아 이곳으로 오는 물줄기가 있어 예전에 이곳이 동네였으며 지소가 있었음을 가능케 한다. 전북대에서 소장한 지도를 보면 상관면 지역에 만마관이 건재하고 있으며 신원(新院:지금의 신리) 바로 밑으로 지소가 표시되어 있다. 지소 있는 바로 왼쪽 산은 승암산으로 지소가 있는 곳은 색장동지역으로 생각되며 차 후 기초조사를 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된다. 임실과 남원에서 오는 사람들은 색장동의 색장치를 넘어 신원-갓바위-문수골-은행다리를 넘어 서울로 가는 코스이다. 즉 지름길이다. 이 지도가 그려질 당시는 창암 이삼만도 공기골에 살면서 직접 만마관(萬馬關)편액을 써서 붙였다고 전하는데, 아마 이곳을 지나면 매우 운치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색장동에는 반일운동을 했던 이거두리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효행록에서 효행도 효자이야기 장어.
효행록에서 효행도 효자이야기 장어.

△후세에 전하고자 형 김수철의 효행을 글과 그림으로 기록한 <효행록>

효행도에 나타나는 효자 김해김씨 김수철(金守哲)은 효자동 바우배기에 살았는데, 그의 효행사실을 후세에 묻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생 김우철이 글을 짓는다. 족보를 보면 김수철은 자가 재수(再守)이고 또 다르게는 인여라 불렀으며 호는 경향정이다. 그는 선흥의 장남으로 신사년 8월 27일 생이다. 그는 향년 47세에 운명하였는데 묘소는 임실군 관촌면 신흥사 부근에 자리하고 있다. 자료를 보면 김수철은 부친이 8년 동안 지병이 있어 백초를 다 시험했지만 1812년(壬申) 겨울에 병의 증세가 점점 악화되고 이질에 걸렸다. 이에 의원은 마땅히 특효약은 장어뿐이라고 하면서 이를 추천하였다.

효자 김수철은 장어를 구하기 위해 계곡을 따라 위아래로 왔다 갔다 했으며, 하천의 연에도 배를 든든히 하고 지켰다. 또 삼일 동안 자면서 하늘에 기도를 했더니 승암산 아래 병암을 지나는데 한 자가 넘는 장어가 눈 위에서 꿈틀거리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장어탕을 끊여 진상하니 이때는 섣달이었다. 그 후 삼일이 지나 또 병암(승암사 부근)을 지나는데 도로변 인가에서 발가벗은 어린아이가 눈 위에 서 있고 손에는 하나의 간지대가 있는데 간지대 끝에 매달려 있는 것이 두 마리 장어였다. 이 장어를 1전을 주고 사서 그 날 탕을 끊여 아버지께 진상을 하니 병세가 점점 차도가 있어 한 달을 더 살게 되었다. 이런 효행을 조정에서 듣고 정려를 내렸고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후예들에게 보이고자 한다는 내용이다. 김수철의 동생 우철은 1848년(무신) 섣달에 추모하는 마음으로 글을 지어 남겼다. 전주에도 효행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다. 부모님이 고기가 먹고 싶어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니 떨어졌다는 이야기며, 또 겨울에 수박을 찾아 헤맸다는 수박동이 있다. 그런데 이렇게 장어를 구하는 효행사실은 기록상으로 볼 때 처음이지 않은가 사료된다. 효행의 중요성이 점점 희박해지는 이 시대에도 귀감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전주의 지소 자리도 복원되기를 희망해 본다. (끝)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라북도 문화재위원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라북도 문화재위원
김진돈 전주시 민간기록물관리위원·전라북도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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