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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도 준치' 넘어설 선량(選良)

위병기 정치·경제 에디터
위병기 정치·경제 에디터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를 떠올려보자. 지금부터 반세기전인 1970년 9월 29일 세종문화회관에선 야당인 신민당 전당대회가 열렸다. 대선을 앞두고 YS(김영삼)는 40대 기수론을 주창했고, 곧바로 DJ(김대중)와 소석(이철승)이 가세하고 나섰다. 주류측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YS의 낙승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으나 막판 승자는 뜻밖에도 DJ였다. 훗날 이들은 그때부터 30년 넘게 대한민국을 주물렀다. 가히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할만하다. 누구도 예상못한 이변은 소위 김대중의 ‘명함각서’였다.

“금차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는 김대중 의원을 추천하고(지지하고) 정기당 대회에서는 이철승 씨를 당수로 지지하기로 서로 합의각서를 교환함”명함각서 하나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달렸다. 투표 직전 이철승은 사퇴 선언을 하고 퇴장해 버렸다. 1차 투표 결과 김영삼 421표, 김대중 382표, 무효 82표였다. 무효표는 대부분 이철승 계였다. 장내가 술렁거렸음은 물론이다.김대중은 명함에 각서를 써줬고 2차 투표에서 대역전극이 펼쳐졌다. 김대중 458표, 김영삼 410표, 무효 16표였다.

박정희가 피하고 싶었던 사람, 김대중이 풍운아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훗날 당권 경쟁때 DJ는 소석이 아닌 YS의 손을 들어줬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끝까지 대통령을 꿈꿨으나 소석 이철승은 대통령은 어렵다고 보고 소위 중도통합론을 내세웠다. 선명성을 상실한 소석은 이후 추락을 거듭한다. 훗날 김대중은 이에대해 “나는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 약속을 지키지 못했을 뿐이다.”고 했다.

소석의 낙마 시점을 계기로 전북 정치권은 독자적 세력을 구축하지 못하고 호남권의 아류에 머물러야만 했다. 가능성있는 대권 후보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2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유종근 전 지사가 대권을 꿈꿨으나 영어의 몸이 되고 말았고, 이후 정동영 의원이 집권당 대권 후보로 떠올랐으나 참패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지역사회 일각에서는 정세균 총리 카드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이번 4·15총선을 계기로 전북 정치권은 판이 확 바뀌었다. 전북 출신으로는 집권 여당 첫 대권후보를 지냈던 정동영 의원이 낙선했고, 5선을 바라보던 조배숙 의원도 여의도 입성에 실패했다. 3선을 노리던 김관영, 4선을 노리던 유성엽 의원도 거세게 불어닥친 ‘문재인 바람, 민주당 바람’에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지만 연령이나 정치 풍향계 등을 감안할때 이번 낙선자 중 한두명을 제외하고는 ‘자의반타의반’ 정계은퇴가 불가피해 보인다.

사람들은 흔히 ‘썩어도 준치’라고 한다. 본래 좋고 훌륭한 것은 썩거나 헐어도 어느 정도의 훌륭함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다. 이번 총선에서 낙마한 중진급 의원들을 일컬어 “썩어도 준치인데 좀 아깝다”고 하는 이도 있다. 정동영을 꺾은 김성주, 유성엽을 꺾은 윤준병, 김관영을 제압한 신영대, 이춘석을 넘어선 김수흥, 조배숙을 따돌린 한병도가 얼마나 역동적으로 의정활동을 해야만 하는지 등골이 서늘할 것이다. 오늘(7일) 승자가 확정되는 민주당 원내대표 후보 3인중 김태년·정성호 의원은 4선이고, 전해철 의원이 3선인 것만 봐도 국회에서 얼마나 관록이 중요한지 알 수있다.

이제 ‘썩어도 준치’란 말은 잠시 잊고 180석 초거대여당 원내사령탑과 호흡을 맞춰가며 활약할 전북 출신 신예들을 관심있게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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