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함과 발전된 문화를 만들어온 우리의 고대국가 백제. 660년에 신라에 의해 멸망하면서 잊혀진 역사가 됐다. 하지만 현재는 익산·부여·공주에서 옛 도읍지 터 및 유물들이 오랜기간 발굴, 조사되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후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백제는 크게 초창기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성도읍기(기원전 18∼기원후 475), 웅진도읍기(475∼538), 사비도읍기(538∼660)로 시기를 구분한다. 현 백제역사유적지구는 웅진도읍기와 사비도읍기의 흔적이다.
한국언론진흥재단과 백제세계문화유산센터이 이러한 백제문화유산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9일과 10일 익산, 부여, 공주에서 진행한 백제세계문화유산기행을 동행 취재했다. 백제유적의 현 상황과 함께 익산 백제유적의 앞으로 과제를 짚어본다.
△웅진백제의 숨결 ‘공주’
연수의 첫 장소는 충남 공주시에 있는 공산성이었다. 현 공산성은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인 웅진 백제의 심장이라 할 수 있다. 총 연장 2660m의 고대 성곽으로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한 공산성은 475년 백제가 고구려에게 한성이 함락되고 난 후 급하게 시절에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기 때문에 산세가 험하다. 공산성의 현 입구는 서쪽문으로 당초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 1993년에 고증을 거쳐 복원된 상태였다.
성벽을 따라 5분정도 이동하면 공산정이라는 정자가 나오는데, 이곳에서 금강과 공주의 전경을 볼 수 있는 명소이기도 하다. 과거 백제시대에는 이곳이 적군의 침입을 살피는 망루의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공산성의 중심부에는 왕궁터로 추정되는 공간이 있다. 현재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공주의 또 다른 백제문화유산은 송산리 고분군 유적이다. 이 곳에는 웅진백제의 태평성대를 이룩한 무령왕과 왕비의 능, 즉 무령왕릉이 있는 곳인데 현재는 폐쇄된 상태다. 과거에는 일반인에게도 관람이 허용됐지만 훼손이 우려돼 현재는 모형으로 고분군 전시장에서만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왕의 염원이 담긴 ‘익산’
익산은 무왕의 꿈이 담긴 도시다. 강력한 왕권을 꿈꾸며 익산 천도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중 하나가 미륵사지다. 용화산(해발 342m) 밑에 조성된 탁 트인 미륵사지(터)의 위용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삼국유사> 는 “백제 무왕(재위 600~641)이 부인(선화공주)와 함께…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부인이 ‘이곳에 큰 절을 지어달라’고 해서 하룻밤 사이에 전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도 미륵사터에는 3금당 3탑의 형태, 즉 ‘서탑(2019년 원형 복원·국보 제11호)+금당, 중앙탑(목탑 터만 남음)+금당, 동탑(1993년 모조탑으로 복원)+금당’ 등의 흔적이 잘 남아있다. 삼국유사>
또 다른 익산의 유적으로는 왕궁리 유적이 있다. 그 넓이는 백제문화유적지 중 가히 최고이며, 목적이 가장 분명한 왕궁터로 많은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특히 이곳에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무왕을 기리기 위해 제작한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이 있다.
△백제의 마지막 희망 ‘부여’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을 함께한 도시다. 사비백제의 중심지로 이 곳에는 많은 백제유적지가 남아있다. 부여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은 정림사지다. 정림사지는 부여의 한 가운데 위치한 사찰터로, 도심에 세워진 사찰 중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 크기가 비록 크지 않지만 소박하지만 정갈한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석조여래좌상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또 중문·탑·금당·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고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식가람’ 배치로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적인 공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여는 백제의 마지막을 알 수 있는 삼천궁녀의 이야기가 담긴 낙화암도 있다. 의자왕의 후궁들이 “차라리 죽을지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며 이곳에 와서 강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절벽 아래에는 빨간글씨로 落花岩(낙화암)이라 써있는데 이 글씨는 조선시대 우암 송시열이 ‘삼천 궁녀들이 떨어지면서 바위에 부딛혀 피로 물들지 않았겠냐’는 상상을 통해 빨간 글씨로 새겼다고 한다.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