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영(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깊어가는 가을, 해가 질 무렵에 바라본 만경강의 억새 바다는 장엄하였다. 만경강변에 서서 붉게 물들어가는 물억새 풍경을 바라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숨이 멎을 듯 산하의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더구나 만경강에 기대어 삶을 이어온 전북도민이라면 어릴 적 추억 한 자락은 안고 있을 것이다. 익산(구 이리)에서 자란 필자도 학창시절, 이리와 백구를 잇는 목천포 다리가 있는 둑 안 논에서 모내기봉사를 했던 기억, 통학기차를 타고 춘포역(당시는 대장역)과 삼례를 지나며 차창으로 너른 들판과 만경강을 바라보며 대학을 다녔던 추억이 있다. 당시 춘포에 사는 선배로부터 어릴 적 보았다는 ‘만경강 모래찜’ 풍경은 장관이었다고 얘기들은 것도 생각난다.
만경강은 오롯이 전북의 강이다. 완주군 동상면 밤샘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만경강은 고산천과 소양천, 전주천과 삼천천, 익산천, 탑천 등 지류와 합류하며 군산과 김제 사이의 넓은 하구를 통해 서해로 나간다. 조선시대에는 만경강을 사수라고 불렀는데 조선의 본향인 전주를 흐르는 강이라고 하여 중국 한고조 유방의 고향에 흐르는 강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만경강은 자유곡류하천으로 주위에 기름진 충적평야를 형성하여 전북지역을 최대의 곡창지대로 만들어주었다. 또한 전형적인 감조하천이었기에 밀물과 썰물에 따라 배가 드나드는 수운이 발달하기도 하였다. 춘포 봉개나루엔 많은 상선이 오갔고 삼례에도 고깃배들이 드나들었다. 삼례의 마을 이름인 해전리에서 당시 만경강의 조수기능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름진 평야를 거느린 만경강은 일제의 야욕에 가장 먼저 수난을 당하는 처지가 된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들은 재빨리 전북에 들어와 대농장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전주 동산농장, 춘포 호소카와농장, 서수 이엽사농장, 군산 불이흥업농장 등 수많은 일본인 농장이 설립되며 전북은 일제의 식량공급지로 전락되었다. 일제는 수탈한 쌀을 군산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전국 최초 신작로인 전군도로를 1908년에 완공하고 1914년에는 이리와 전주를 연결하는 사설철도인 경편철도를 가설하였다. 또한 농업용수 공급을 위해 관개시설 공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는데 바로 만경강의 직강공사와 대아댐 건설이다. 1922년 완공된 대아댐, 1925년 시작하여 1939년까지 진행되었던 만경강 직강공사에 동원된 수십만 명의 농민들의 고난은 어떠했을까 짐작해본다. 서수 이엽사농장의 농민들이 소작율 75%에 시달리다 항거했던 옥구농민항일항쟁을 보면 만경강은 일제시대 고율소작제에 착취당하던 농민들의 저항과 눈물의 강이기도 하다.
만경강을 짧게나마 살펴본 이유는 전북의 교육생태계를 생각해보기 위해서이다. 이제 교육의 방향은 학교와 지역이 연결되고, 마을의 역사와 자원이 교육과정에 편성되어 마을사람들이 교사로 결합되는 교육생태주의로 나아가고 있다. 교육생태주의 교육은 학생들의 삶의 공간인 지역과 학교가 연결되어 있기에 교과서만을 습득하는 지식이 아닌 살아있는 지식, 경쟁이 아닌 협동과 상호작용 관계를 통한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 만경강은 바로 교육생태주의를 지향하는 교육 공간으로 가장 적합한 곳이다. 자유학년제나 현장체험학습기간에 전북의 아이들이 2박 3일간 만경강을 따라 걷는 상상을 해본다. 도민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강, 역사와 문학의 현장, 생태 환경교육의 장, 만경강을 바라보며 건강한 교육생태계, 지역교육공동체를 꿈꾸는 이유이다. /이미영(전북지역교육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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