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촌(鵲村) 선생이 세상을 떠난 지가 올해로써 열아홉 해가 되었다. 그런데도 선생에게 붙은 많은 수식어와 함께 ‘전북의 큰 어른’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망백(望百)에 이르도록 그는 한순간의 정체도 없이 시조 시인, 한학자, 서예가, 향토사학자, 고서 수집가 등으로 우리의 문화와 예술을 지켜냈고, “청무성(廳無聲, 소리 아닌 것을 듣지 말라)”의 올곧음으로 진실의 의미를 일깨워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은 국권침탈이 되던 해, 1910년 11월 23일 충남 논산시 강경읍 채운산 기슭 ‘까치말’에서 태어났다(선생이 출생 당시에는 이 지역은 전라북도였음). 선생의 호 ’작촌(鵲村)‘은 고향마을 이름인 ’까치말‘의 한자음을 쓴 것이다. 네 살 무렵 부모를 따라 전주로 옮긴 후, 전주고등보통학교(현 전주고의 전신)에서 공부하였으며, 졸업 후에는 관촌과 전주의 금융조합에서 근무하다가 퇴직하였고, 양봉사업을 벌여 전국을 순회하며 각 지방의 인정과 풍속, 생활상을 견문하기도 했다. 선생은 평소에 문학과 역사, 한학(漢學)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것은 집안의 내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대로 내려온 선비 집안에다가 선생의 외삼촌이었던 시조 시인이며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 선생의 영향이 매우 컸던 것 같다.
선생은 다섯 살 되던 해부터 조부이신 소암공(小巖公)으로부터 천자문과 소학, 논어를 배우고 글 쓰는 법을 익혔다. 소암공(小巖公)은 남다른 열정으로 손자의 교학에 열정을 쏟으셨다고 한다. 근엄한 소암공(小巖公)은 작촌(鵲村)이 공부에 태만하거나 잘못을 저지르면 이에 상응하는 편달(鞭撻)을 감수하도록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스승이면서 조부에게 배운 한문은 훗날 선생이 한시와 서예, 한학을 연구하는 큰 힘이 되었다. 전국을 돌며 양봉사업을 할 때부터 지은 한시(漢詩) 500여 편에서 180여 수를 골라 선생의 나이 아흔에 『작촌(鵲村) 한시집』 (신아, 2000)을 낸 바 있다.
또한,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인 시조를 사랑하여 육순이 넘은 1978년에 『현대문학』지에 박병순, 정소파, 이태극의 추천으로 등단하였으며, 1989년에는 시조집 『새벽 까치소리』에 이어 『해거름에 타는 꽃불』(이삭, 2002년)을 출간했다. 선생의 시조는 시조의 정형성을 고수하면서 고향과 문화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감회 등을 정갈하게 잘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선생은 한학(漢學)과 더불어 서예에도 탁월한 재능을 가졌다. “서(書)는 예(藝)가 아닌 도(道)이다”라는 일관된 생각으로 도(道)의 경지에 이르고자 전념하였으며, 특히 작촌의 ’초서(草書)‘는 매우 유명하다. 한국미술문화대상전 초대작가와 서예가로 왕성하게 활동하였으며, 1999년에는 평생에 걸쳐 수집한 고문서, 향토사 및 문집, 서예 등 2,300 여권의 고서를 우석대학교 도서관에 기증하여 향토문화 사랑의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이 지역의 각종 비문, 잊힌 지명과 위치를 고증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특히 문화재 감정 및 향토사학자로 향토문화 발굴 및 보존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풍남문 완산종복원위원으로 종기(鐘記)를 쓰고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으로 명명하도록 자문하였으며, 향토 사학 자료를 발간하여 『완산(完山)고을 맥박(脈搏)』(탐진, 1984)을 출간하였고, 전주, 완주를 중심으로 읍지(邑誌) 및 군지(郡誌) 발간에 도움을 주었고 만민의총 충열사 비문과 임란공신 조경남, 의사 황대연의 비문을 짓는 등 향토사학자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
선생은 살아계실 때 한겨레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선생의 꿈은 미술학도가 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본 미술학교로의 유학의 뜻을 세웠지만, 어려워진 집안 형편 탓에 포기하고 대신 취직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선생은 그 이상의 꿈을 이루어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였지만 패기 있고 강직한 성품의 선생은 당시 우리 민족의 울분과 한(恨)을 문학과 서예, 그리고 서화(書?)로 달랬다.
작촌(鵲村) 선생도 한때는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한 직장생활을 하였지만, 문학과 역사에 대한 내면의 열정은 한순간도 꺼지지 않았다. 어찌 보면 평생의 글쓰기와 역사연구는 선생으로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던 것 같다. 선생의 3남 조정형 (전통명주 이강주(李薑酒) 회장)이 소장하고 있는 많은 유품 중 필자가 특별히 관심을 가진 것은 선생께서 어린 시절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매일 쓰셨다는 일기장이었다. 수십 권의 일기장에 빼곡하게 담겨 있을 수신제가(修身齊家)의 자세, 가풍을 잇고 세상을 걱정하는 선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것이다. 또한, 스스로 작성한 『작촌 조병희 생애록』과 「작촌 자작 행록」에는 선생이 얼마나 치열하게, 그리고 선비로서 강개한 기상을 가지고 살아오셨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맴돌다가 넘어져도
멈출 수가 없는 독백
얻는 것도 없고
잃는 것도 없이
침잠한 밤거리에서
컹컹 짖는 수캐마냥
삭정이로 둥지 틀어
까치말로 호를 하니
가죽나무 가지 높아
첫 고동에 트는 여명
봄소식 알리고파서
새벽녘에 깍깍 소리
-조병희 「자화상」 전문
이렇듯 선생은 첫 새벽, 동트는 골목에서 봄소식을 알려주는 까치처럼 고고한 선비로서 시조와 한시 창작을 통하여 우리의 정신세계를 확장해 주었으며, 내 고장의 역사와 이웃들의 삶을 조명해 줌으로써 많은 사람에게 내일을 여는 지혜를 꾸준히 일깨워 주었다.
조정형 회장은 지금도 다가동 고택의 추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수령 100년이 넘는 모과나무가 우뚝 서 있는 이 집에는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명사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다고 했다. 그때마다 이 집에서는 직접 장만한 음식과 술을 나누면서 문학과 예술, 역사 이야기로 날 새는 줄 몰랐다고 한다. 특히 그때 곁들인 술은 선생의 집안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양주가 있었는데 그 맛과 향기가 아주 특별했다. 그것이 오늘날, 잘 알려진 전통명주 이강주(李薑酒)의 기원이 되었다. 이강주(李薑酒 ‘배와 생강’을 재료로 하여 빚어낸 전통명주인데, 대한민국의 대표브랜드가 되기까지에는 선생의 3남 조정형 회장의 집념과 뚝심의 결과라고 한다.
작촌(鵲村) 선생을 비롯한 가족들은 선비 집안에서 ‘술을 만드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며 크게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정형 회장은 아버지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지키고자 했던 것처럼, “명주 이강주(李薑酒)”를 만드는 일이 가문의 전통과 뜻을 거스르는 일이 아니라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사연이 1993년 KBS 드라마 『그 집에 술이 있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 전국에 알려지면서 크게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작촌(鵲村) 선생은 2001년 향토 발전에 이바지한 지역 원로에게 헌정하는 <전북의 어른 상> 제1회 수상자이다. 이 상은 KBS 전주방송총국과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마련한 행사로 평생 향토와 나라발전을 위해 헌신 봉사하는 전북의 원로를 찾아 그 업적을 선양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제정되었다. 당시 KBS 전주방송총국은 작촌(鵲村)의 수상을 기념하기 위해서 ‘작촌(鵲村)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방송하기도 했다. 전북의>
또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전북위원회와 전통명주 조정형 회장은 “작촌(鵲村)의 올곧은 인생관과 열렬한 향토애, 지고한 인품, 꿋꿋한 선비정신을 기리고, 회원들의 창작 열정을 높이기 위해서 2002년 전북펜작촌(鵲村)문학상을 제정”하여 격년제로 수상자를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작촌(鵲村) 선생은 아흔두 해 동안 세상과의 인연을 접고, 2002년 12월 17일 숙환으로 영면하셨다. 선생의 올곧은 성품과 청정한 삶을 기억하는 많은 시민이 크게 애통해했다. 다음 시는 선생께서 숙환으로 입원하고 계실 때 쓴 것으로, 이 세상과 하직한 날 선생의 손자가 낭독했던 「병석에서 보는 TV 영상」이라는 시다.
불면증이 두려워서
낮잠을 물리치고선
TV 영상 앞에
엇비슷 기대앉아
불 뿜는 운동경기에
쏠려 드는 눈정기
스스로 격동되어
주먹을 쥐어도 보고
고조된 응원 소리에
덩달아 열을 올리곤
슬며시 다가온 졸음
잠을 청해 보리라.
-작촌 선생 영결식장에서 손자가 올린 시 조병희 작 전문
작촌(鵲村) 선생은 때로는 강직함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일깨웠고, 때로는 따뜻한 격려와 관심으로 큰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 누구보다도 문학과 예술을 사랑했고, 우리 고장의 역사를 사랑했다. 한평생 시대의 올곧은 선비의 표상으로 전북의 정신을 일깨우고 전북의 긍지를 높여 주었다.
/송일섭 전북문학관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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