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당 내에서 공정경제 3법 내지 5법으로 불리는 개혁입법안의 완화 및 처리시기에 관한 논의가 오가는 모양이다. 경제민주화를 트레이드마크로 삼아 온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오히려 민주당을 향해 법안 통과에 소극적이라며 비판하는 재미있는 장면도 연출되었다. 과거 박근혜 정부가 발의하였다가 폐기된 법안보다도 개혁성 측면에서 후퇴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다수 의석을 점한 여당이 원안대로 신속히 처리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애당초 모두를 만족시키는 개혁이란 존재할 수 없는 이상 누군가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며, 누군가는 시기가 좋지 않다며, 누군가는 오히려 개악이라며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결국 법조문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찬반 양론을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려 조금이라도 더 나은 타협안을 도출할 수 있도록 고민해야겠지만, 그런 골치 아픈 일은 남에게 맡겨두고 드러누워 TV나 보면서 혁명가의 백일몽으로 대리만족이나 하고 싶은 것이 나를 비롯한 필부들의 솔직한 심경일 것이다.
혁명가의 일대기를 다룬 드라마 중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보았던 것은 2014년에 KBS에서 방영한 대하사극 ‘정도전’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시대적 격동기를 다룬 걸출한 사극들은 많지만, 군주의 영웅담이 아니라 일개 관리의 시각에서 혁명의 시도와 좌절을 그린 각본이라 유독 인상 깊었다.
드라마의 배경인 여말 선초는 구체제의 모순이 극에 달한 시점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적폐는 주군(州郡)과 산천(山川)을 경계로 삼아 경작량의 대부분을 앗아가던 권문세족으로의 부의 집중이었다. 백성들은 송곳 꽂을 땅 하나 갖지 못한 채 자영농에서 소작농으로, 소작농에서 노비로 몰락해갔고, 드라마에서 정도전을 비롯한 신진사대부 세력은 이러한 경제구조를 타파하는 토지 개혁을 필생의 목표로 삼게 된다.
정도전이 꿈꾸었던 이상은 백성의 수를 헤아려 땅을 나누어주자는 계민수전(計民收田)의 원리에 입각한 정전제(井田制)였으나, 이는 곧 생산수단을 ‘무상몰수 무상분배’하자는 급진적 사상이었기에 그대로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였다. 대신 조준의 과전법(科田法)으로 타협이 되었고, 개혁은 신속히 진행되어 1390년 고려의 토지대장을 모두 불태우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그런데 드라마에서는 이처럼 통쾌한 토지개혁으로 백성들의 숨통이 트이는 모습만 보여줄 뿐, 이후 과전법이 망가지는 모습은 그리지 않는다. 실제 역사에서는 권문세가와 겨뤄 혁명에 성공한 신진사대부들이 공신전(功臣田)이라는 명목으로 토지를 받아 세습하며 수조권(收租權)을 갖게 된다. 조준, 정도전 등 공신에게 주어진 공신전이 태종 대에 벌써 경기도 토지의 20% 가량에 달했다고 하니, 개혁을 주창한 자들 스스로 개혁의 명분을 퇴색시켜버린 셈이다. 불타는 토지대장을 보며 환호하였던 백성들로서는 개혁세력이 또 다른 기득권이자 적폐로 변해가는 과정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을 것이다.
금회기에 추진되는 경제민주화 관련 입법안은 대주주 총수 일가의 사익 편취 견제 장치를 강화하는 정도의 내용일 뿐, 누구의 것을 빼앗아 나누어주자는 식의 급진적인 주장과는 거리가 멀다. 타협과 협치를 이유로 어느 정도 물러설지 두고 보아야 할 것이나, 당초 취지를 무색케 할 정도로 원안에서 후퇴한다면 결국 또 개혁세력이 초심을 잃고 기득권에 포섭되어 버렸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박지원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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